매월당을 만나고 소확행을 생각하다

by 시냇물

여기저기 봄이 몰려오는 3월 하순 경포호를 다녀오다가 매월당 김시습 기념관을 보고 반가웠다. 단종의 슬픈 역사가 서려있는 내 고향 영월에서는 매년 4월 초순이면 단종문화제가 열리는 데 사육신, 생육신(김시습 포함)이 포함된 가장행렬에 몇 번인가 참가했던 기억이 나서 더 그랬다.


사육신은 그 면면의 기억이 명료한데 생육신은 가물가물하나 김시습은 그래도 뚜렷이 기억된다. 매월당이란 호가 멋있고 우리나라 첫 한문소설 금오신화의 작자를 기억했던 덕분이다.


그런데 왜 이분의 기념관이 경포호 주변에 있을까 궁금했다. 이리저리 찾아보니 강릉 김씨라 관향(시조가 태어난 곳)이 강릉이며, 어머니가 이곳에서 돌아가셔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고 한다.

강릉 김씨 문중에서 기념관을 만들었지만 유지가 쉽지 않아 현재는 시청에서 관리한다고 한다. 이해할만하고 홍매가 강릉의 시화인지라 잘된 것 같다. 위치도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경포호 부근이라 안성맞춤이다.


돌아보니 매월당의 일생은 경포호 건너편에서 자란 허난설헌 초희만큼 기구했다. 사춘기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시며 역경은 시작되었다. 3년간 시묘를 하고 아버지의 재혼으로 외가에 맡겨졌는데 외숙모가 얼마 안 돼서 죽고, 아버지도 중병에 걸리며, 결혼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이뒤로 승려생활, 재혼, 방랑생활 등등

더욱이 어린 매월당의 자질을 알아보고 등용을 약속했던 세종이 사망한 후 정치적 혼란, 세조 찬탈로 이어지자 세상을 등져 버렸다. 처연한 인생살이와 정치 사회적 여건은 이분을 영원한 outsider로 만들었지만 그 대신 문학적 소양을 발현시킨 것 같다.


매월당은 문재가 뛰어나고 지조 있는 삶을 사신 분으로 우리에게 기억되지만 문학적 소양을 우리가 피부로 직접 느끼기는 쉽지 않다. 그 유명한 금오신화도 한문소설이고 매월당 서예 산책의 시 100선도 잠시 훑어보았으나 과문한지라 그 진가를 잘 모르겠다.

오히려 어려서 신동으로 소문이 나자 5살 때 자기를 보러 온 정승 허조를 두고 ‘고목에 꽃이 피니 마음 늙지 않았다오(老木開花心不老)’란 시구를 지었다는 일화가 더 피부에 와닿는다.


노년의 삶은 한양 외곽 수락산에 터를 잡고 수행과 학문에 전념했었고, 49세의 김시습은 다시 짐을 꾸려 강원도 일대를 돌며 10여 년을 보냈다. 특히 강릉, 양양, 설악산을 두루 여행하며 쓴 ‘관동일록’에는 100여 편의 시를 썼다 한다. 이 사실도 매월당 기념관이 강릉 경포대에 위치해도 될만한 사유중 하나일 것 같다.


어려서 천재성을 발현되어 주변의 시선을 받는 사람들의 삶은 쉽지 않다. 시계를 조금만 뒤로 돌려봐도 기구한 운명을 살거나 요절한 천재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인지 이분과 같은 비범함 보다 소박한 생활 속 평범한 행복을 찾는 소확행의 트렌드가 우리에게 훅 다가온 것 같다. 사람들이 출세지향적 물질주의 문명에 지쳐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어떤 친구가 묻는다 소확행 하나벼? 넌 소확행이 뭐냐?


내가 아내랑 속초 살이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소소한 것에서 행복을 찾으며 살자고 그랬지만 디테일에 악마가 있듯이 쉽지 않다. 엊그제는 말투 때문에 다투었다. 다 자기가 정한 기준과 방식이 있다. 그것을 기준으로 상대를 지배하거나 소유하려 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있는 그대로 상대를 봐주는 존재적인 삶은 말보다 그렇게 쉽지 않은 가보다. 그래서 지지고 볶고 사는 게 인생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