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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심리상담] 나는 여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심리상담 이야기

by 이상혁 심리상담가

상담에서 여성 내담자들을 만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들이 겪는 심리적 갈등이 단순한 개인 문제나 성격적 요인으로만은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 갈등은 그들을 둘러싼 사회 구조가 어떤 방식으로 여성이라는 존재를 규정하고, 또 그 규정에 따라 자신을 이해하도록 만드는지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나는 상담가로서 여성의 자기 인식은 언제나 이 구조적 압력과 정체성 형성 과정 속에서 읽혀야 한다는 점을 점점 더 분명하게 경험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여성의 내면은 더 이상 개인의 독립된 공간이 아니라, 사회가 그녀에게 건네온 메시지들이 겹겹이 쌓여 이뤄진 하나의 장(場)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이러한 메시지는 때로 너무 익숙해서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일상을 구성한다. 여성은 어릴 때부터 주체보다는 타인의 욕구를 민감하게 감지하는 존재로, 혹은 갈등을 조율하고 관계를 지탱하는 존재로서 길러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역할 기대는 누가 명시적으로 강요하지 않아도 이미 사회적 상호작용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



문제는 이러한 기대가 단순한 행동 지침에 그치지 않고,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기준이 되기 쉽다는 사실이다. “나는 왜 이런 상황에서 늘 죄책감을 느끼는가?”, “나는 왜 내 욕구보다 관계를 먼저 떠올리는가?”라는 질문은 사실 개인의 성향보다 사회적 역할 학습의 결과를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여성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보다 자신이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에 대한 지속적인 감시 속에서 자기 인식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도식적 역할 기대와 자기 인식의 연결점을 탐구할 때, 나는 자연스럽게 주디스 버틀러의 수행성(Performativity) 개념을 떠올리게 된다. 버틀러는 젠더가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반복되는 행위의 축적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성 내담자들이 느끼는 압박은 단지 외부의 감시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가 반복하도록 요구하는 특정한 ‘여성적 행위’가 그들의 몸짓, 감정 표현, 생각을 지속적으로 방향짓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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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여성은 사회 속에서 정해진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스스로를 여성으로 각인하는 동시에, 그 역할이 자기인지의 일부가 되는 현상을 경험한다. 이런 수행적 반복은 개인이 자율적으로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사회적 규범이 끊임없이 주입한 결과에 가깝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여성의 정체성은 도덕적 선택이나 개인적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힘이 만들어낸 배치로 드러난다.


눈 여겨볼 부분은, 내담자의 내면에서 갈등이 일어날 때 비로소 수행성의 구조가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예컨대 많은 여성들이 스스로 강하고 자립적인 존재가 되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너무 자기주장이 강하면 주변이 불편해한다’는 불안 또는 ‘여성은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장기적 학습 기억을 지닌 채 살아가곤 한다.


이 갈등은 그들이 모순적이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규범이 내면에서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구조가 하나의 역할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상충하는 역할을 동시에 요구하는 방식으로 여성의 정체성을 흔드는 과정이다. 여성은 강하되 부드러워야 하고, 독립적이되 관계를 중시해야 하며, 자기 욕구를 가져야 하지만 지나치게 욕망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복합적 규범 속에서 자기 인식을 구성하게 된다. 이러한 모순은 구조적 긴장의 결과이자 정체성 수행이 초래하는 심리적 부담의 표현이다.


상담 장면에서 이 구조적 긴장을 인식하기 시작한 내담자들은 점차 자신이 살아온 세계를 다시 바라본다. 그들은 이전에는 ‘내가 문제인가’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순간을, 이제는 ‘왜 나는 이러한 기준에 따라 나를 평가해 왔는가’라는 질문으로 재구성한다. 이 질문의 이동은 단순한 시각 변화가 아니라, 자기 인식을 규정하던 수행적 구조가 균열을 보이는 첫 순간이다.


여성은 이 균열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이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구성된 결과임을 체감하게 되고, 이는 곧 “그렇다면 나는 이 구조를 바꿀 수 있는가”라는 또 하나의 성찰로 이어진다. 구조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면, 수행을 다르게 해볼 가능성도 열리기 때문이다. 이 가능성은 상담실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여성은 과거의 경험을 새로운 기준으로 다시 읽으며, 자신이 무엇을 계속 수행할 것인지, 무엇을 더 이상 수행하지 않을 것인지 선택하는 주체적 위치로 나아간다.


그러나 수행을 다르게 선택하는 일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사회 구조는 개인이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려 할 때마다 예상치 못한 저항을 드러낸다. 여성 내담자들은 자신이 억압적 규범을 따르지 않기로 결심했을 때 오히려 주변의 평가, 관계의 변화, 정체성의 흔들림과 마주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때 그들은 구조가 단순한 상징적 장치가 아니라 실제로 개인의 삶을 규율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체감한다. 버틀러가 말한 것처럼, 수행성은 개인이 쉽게 벗어날 수 있는 연극적 행동이 아니라, 사회적 인정과 현실적 생존을 연결하는 실질적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담에서 다르게 행동할 자유를 이야기할 때, 나는 그것이 종종 ‘새로운 위험을 감수할 자유’라는 의미임을 여성과 함께 이해하려 한다. 이 위험의 현실성을 인정하는 과정은 여성들이 자신의 변화를 단순한 의지나 용기의 문제로 오해하지 않도록 돕는 동시에, 사회 구조가 어떤 방식으로 개인의 변화를 어려움으로 경험하게 만드는지도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의 변화는 실질적으로 가능하며, 많은 여성들은 그 가능성을 현실화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이 더 이상 자동적으로 수행해 왔던 행동들을 고르고, 필요하다면 멈추고, 때로는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를 구성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여성은 자신이 단순히 구조에 순응했던 존재가 아니라, 그 구조를 다시 해석하고 변형할 수 있는 주체임을 발견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체성은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계속해서 다시 쓰일 수 있는 서사로 보이기 시작한다. 자신이 수행해 왔던 여성성의 형태를 의식적으로 재구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역할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의미를 다시 그리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깊은 불안과 함께 깊은 자유를 가져오며, 여성들은 이 자유가 결국 자신을 더 정직하고 더 주체적인 위치로 이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성 내담자들과의 상담에서 나는 구조가 개인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고 그 규정이 어떻게 수행을 통해 유지되는지 살피는 작업이 단순히 이론적 탐구가 아니라 실존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매번 확인한다. 상담가로서 이 과정이 심리상담의 범위를 넘어, 여성들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재해석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갱신하는 존재론적 실천임을 느낀다. 그리고 그 실천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여성들이 사회적 수행 구조를 넘어 자기 존재의 영토를 새롭게 확장해 나가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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