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 이야기
졸혼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이혼의 약한 버전쯤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개념은 단순한 실용적 제도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결혼과 개인, 자유와 관계, 책임과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되었다. 졸혼은 '결혼의 졸업'이라는 말이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결혼이 더 이상 기능적 연합으로 작동하지 않는 지점에서, 서로를 해방시키는 방식이며, 동시에 관계의 지속을 선택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 독특한 구조는 단절이 아닌 전환, 종결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공존을 예고한다. 졸혼은 결혼 제도의 본질을 되묻고, 동시에 인간 존재의 자율성과 타자성과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게 한다.
전통적 결혼은 계약이다. 그것은 법적, 종교적, 도덕적 울타리 속에서 개인을 둘로 묶고, 그 둘을 하나의 사회적 단위로 구성한다. 이 제도는 근대국가의 탄생과 함께 강화되었고, 개인이 아닌 가족 단위의 삶을 중심으로 공동체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 구조는 기본적으로 희생을 전제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사라져도, 함께 살아야 한다는 책임감, 자녀와 재산, 가족이라는 연결 고리들이 강력하게 개인을 제약한다. 졸혼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한다. 감정이 사라졌지만 법적 이혼으로 나아가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걸어온 이들이 택할 수 있는 실존적 타협이자 결단이다. 관계는 유지하되, 실질적 자유를 서로에게 허락하는 방식. 이것은 종래의 ‘함께 살아야 한다’는 명제를 해체하고, ‘함께 살아도 각자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새로운 형식을 제안한다.
TV에 나오는 연예인들 뿐만 아니라, 실제로 내 주변을 봐도 그렇다. 졸혼이라는 결단을 확연히 선언한 커플은 드물지만, 졸혼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꽤 보인다. 요즘은 이르면 40대 후반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이는 시대적 흐름에 따른 다채로운 혼인관의 분화를 의미하며, 따라서 졸혼이라는 생활양식에 대해서 면밀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자유와 관계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인간은 타자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관계를 통해 자기를 인식하고, 사랑을 통해 성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무한히 자기 자신을 꿈꾸는 존재이기도 하다. 타자와 맺는 관계는 때로 자기실현의 장애물이 되기도 하고, 거울이 되기도 한다. 졸혼은 이 모순된 욕망들 사이에서 하나의 해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방식’을 실험하려는 시도다. 마르틴 부버가 말했던 ‘나-너’의 관계는 ‘나-그것’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지속적인 갱신을 요구한다. 졸혼은 그 갱신의 실패를 인정하면서도, 완전한 단절을 유예하는 중용적 선택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졸혼은 사랑의 종말에 관한 서사이기도 하다. 우리는 흔히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도 그렇게 믿고 싶어한다. 하지만 사랑은 종종 끝나며, 그 끝을 인정하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성숙이다. 졸혼은 '사랑의 실패'를 '존재의 실패'로 환원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우정, 책임, 정서적 유대 같은 것들을 하나의 가치로 재평가한다. 그것은 사랑의 파산 이후에도 관계가 완전히 붕괴되지 않고 다른 형태로 진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는 과거에 메여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의 삶을 방향을 트는 실존적 전환이다. 이 전환은 사랑을 폐기하지 않고, 그 사랑이 남긴 유산을 다른 방식으로 계승한다.
졸혼은 인간 존재의 '중첩적 정체성'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우리는 단일한 자아가 아니다. 우리는 배우자이자 부모이며, 동시에 자기 삶의 주체다. 그러나 결혼은 이 다양한 자아들을 하나의 사회적 틀에 가두려는 경향이 있다. 졸혼은 이 틀을 다시 해체하고, 각 자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한다. 타자에 대한 책임과 자기 실현이라는 양극의 욕망 사이에서, 졸혼은 중간의 경로를 제시한다. 그것은 자기애가 아니라 자기존중의 표현이며, 타인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는 방식이다. 나와 너가 더 이상 ‘부부’라는 하나의 틀로 묶이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의 인생에 여전히 머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험하는 것이다.
결국 졸혼은 우리 사회가 이제 더 이상 기능 중심의 결혼에 안주하지 않는다는 신호다. 사람들은 더 이상 '함께 사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함께 살아가는 동안에도 자기 자신이고 싶어 한다. 그들은 개인으로서의 독립성과 타인으로서의 관계성을 동시에 살고자 한다. 졸혼은 그 가능성의 지평을 여는 실험적 제도의 일환이다. 그것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철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제도의 경계를 유연하게 재설계하려는 시도이며, 결혼이라는 구조가 내포하고 있는 권력과 억압을 더 섬세하게 바라보게 만든다.
우리는 졸혼을 혼인 제도의 실패로 볼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 정직함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사랑이 끝났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끝났지만 서로의 인생에 정직하게 머무는 방식'이다. 이 선택은 겁쟁이의 회피가 아니라, 용기 있는 애도의 형식이다. 졸혼은 모든 부부에게 필요한 해법은 아니지만, 사랑과 삶의 다양성을 받아들이려는 시대정신이 만들어낸 중요한 상징이다. 우리는 더 이상 제도에 인간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양태에 따라 제도를 조율하는 운동성을 필요로 한다. 졸혼은 바로 그 조율의 실험이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도 인간은 남는다. 그리고 그 인간이 서로에게 여전히 의미가 있다면, 우리는 졸혼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그 의미를 지속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