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례 딸이 왔다. 딸을 밖에 세워 둘 수 없었던 점례는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였다. 정숙은 점례 딸 얼굴을 보는 순간 배알이 꼴렸다. 점례 딸은 한 눈에 봐도 예뻤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은 나여야 하는데…….나여야 하는데…….’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계속 되뇌었다.
예쁜 얼굴로 정숙의 엄마에게 공손하게 인사한 점례의 딸은 자신을 난희라고 소개했다. ‘난희. 얼굴만큼 이름도 예쁘구나.’ 정숙은 알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점례 딸이라고? 참 예쁘게 생겼네.”
엄마의 말은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난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난희가 정숙을 향해 싱긋 웃으며 인사했다.
“정숙 아가씨지요? 엄마께 말씀 많이 들었어요. 참 고우시고 예쁘다고. 참말이네요.”
난희의 말에 점례도 웃고 정숙의 엄마도 웃었지만 정숙은 웃지 않았다.
‘저것이 언제 날 봤다고 아는 척이지?’
하지만 모두 다 웃고 있으니 뒤늦게 따라 웃었다.
엄마는 딸이 왔으니 점례를 일찍 퇴근시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저녁에 남편과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었다. 점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엄마의 배려로 난희는 거실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점례는 부지런히 저녁을 준비했다. 엄마도 점례를 거들었다. 정숙은 난희와 함께 거실에 있고 싶지 않아 2층 자기 방으로 향했다. 그러다 다시 돌아 내려왔다.
“내 방에서 기다릴래?”
정숙의 말을 들은 점례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황급히 부엌에서 뛰어 나왔다.
“아이고, 아가씨. 아니에요. 감히 아가씨 방에. 얘가 무슨.”
하지만 난희 표정은 아니었다. 정숙의 방이라니! 귀하디 귀한 아가씨의 방이라니! 그 방을 구경하고 싶어 안달 난 표정이었다. 정숙은 그런 난희의 표정을 한눈에 읽을 수 있었다.
“뭐 어때. 나도 심심하단 말야. 엄마랑 점례는 다 바쁘잖아. 점례 일 끝날때까지 내 방에서 책 읽고 피아노 치고 놀면 되지. 난희도 내 방에 가고 싶지 않아?”
정숙의 말에 난희의 눈이 반짝였다.
‘흥! 가고 싶어 죽겠지?’
난희는 대답하지 않은 채 자신의 엄마를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엄마! 난희 내 방에 데려가도 되지?”
정숙이 고민하던 점례와 난희의 마음에 쐐기를 박았다.
그제야 부엌에서 나온 정숙의 엄마도 흔쾌히 허락했다.
“그럼. 안될 거 뭐 있어? 우리 정숙이가 혼자서 엄마 기다릴 난희가 마음에 걸렸구나?”
정숙은 그런 엄마를 향해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숙은 난희의 손을 덥석 잡아 끌었다.
“나랑 같이 내 방에 가자. 응?”
난희는 정숙에게 잡힌 손을 빼지 않고 못 이기는 척 2층으로 향했다.
정숙의 방에 들어선 난희의 입이 헤 하고 벌어졌다.
“책꽂이에 있는 책 읽어도 되고, 피아노도 쳐 봐도 되. 근데 피아노는 칠 줄 알아?”
“아니요. 핵교에서 선생님께서 풍금 치는 걸 어깨 너머로 본 적만 있어요.”
정숙이 의기양양하게 피아노 뚜껑을 열고 빨간색 덮개 천을 걷자 하얀 건반이 모습을 드러냈다. 난희의 입이 다시 헤 하고 벌어졌다. 피아노 건반은 누런 풍금 건반의 색과 달랐다. 난희는 조심스럽게 피아노 건반을 눌러보았다.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난희가 정숙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예쁘다. 그냥도 예쁜데 웃으니 더 예쁘다. 책꽂이에 수많은 책이 꽂혀 있어도, 풍금보다 더 비싼 피아노가 있어도 정숙은 난희에게 진 것 같았다. 처음 느껴보는 패배감에 당혹스러웠다. ‘이 불쾌한 감정은 뭐지?’ 패배감은 이내 분노로 이어졌다. 정숙은 난희 옆을 지나 자신의 옷장에서 원피스 한 벌을, 서랍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정숙은 손에 든 칼로 자신의 옷을 북북 찢기 시작했다. 피아노에 정신이 팔려 있던 난희가 뒤늦게 뒤를 돌아봤다.
“아가씨! 왜 이러세요? 그만두세요. 아이고, 이 귀한 옷이 다 상했네. 이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얼른 내려놓으세요.”
“이거 놔! 놓으라고!”
정숙은 소리치며 팔을 휘둘렀고 그 순간 뭔가 사악~ 스치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난희가 자신의 볼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있었고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꺄아악~”
정숙의 비명 소리에 놀란 정숙의 엄마, 점례가 뛰어 올라왔다. 정숙의 엄마는 침대에 엎드려 울고 있는 정숙에게, 점례는 얼굴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난희에게로 달려갔다.
“난희에게 이것저것 보여주고 있었는데 내 원피스를 보고 입어보고 싶다고 하잖아. 그래서 내가 그건 안된다고 하니까 갑자기 칼을 꺼내들고 원피스를 찢는거야. 내가 말리니까 자기 얼굴을 칼로 그었어. 엄마 무서워. 엄마, 쟤 난희 무서워.”
정숙은 엄마에게 안겨 흐느꼈다. 점례는 난희를 쳐다보았다. 난희는 얼어 붙어 있었다. 다시 정숙을 쳐다 본 순간, 정숙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늘 엄마가 손이 야무지다고 칭찬하던 점례, 무엇보다 눈치가 빠른 점례였다. 점례는 그 순간 알아차렸다. 이 모든 것이 정숙의 짓이라는 걸.
그때 정숙의 아버지가 손님들과 들이닥쳤다. 2층의 소란스러움을 눈치 챈 아버지가 2층으로 올라왔다. 점례는 정숙의 아버지를 본 순간 난희 무릎 꿇리며 자신도 꿇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이 미친년이 아가씨 예쁜 옷을 보고 눈이 돌았나봅니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정숙의 엄마는 그런 점례를 일으켜 세우며 우선 병원부터 가보라며 돈을 쥐어 주었다. 정숙은 아버지의 품에 안겨 다시 흐느꼈다.
정숙은 그때 깨달았다. 자신의 예쁘장한 얼굴과 똑똑한 머리보다 더 강력한 힘이 있다는 것, 그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부모라는 것, 이 강력한 힘은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발 아래 무릎 꿇게 할 거라는 것, 오늘 느낀 이 불쾌한 감정을 다시는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