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수 3

by 모개

퇴근 후 냉장고부터 열었다. 반찬통이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다. 같은 종류의 반찬통에 가지런히 담겨진 반찬들. 엄마가 다녀갔고, 지수가 통에 담아 정리했구나. 정운은 맥주 한 캔을 꺼냈다. 냉장고 앞에 선 채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엄마가 가져온 밑반찬들이 있었지만 꺼내 먹지 않았다. 다들 엄마가 직접 만든 반찬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정운과 지수는 안다. 그녀는 절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 사람이 아니라는 걸.


시원한 맥주 탄산이 목구멍을 자극해 움찔했다. 오히려 이런 자극이 좋았다. 순식간에 맥주 반 캔을 마신 후 거실을 둘러본다. 인테리어 잡지 속에서 방금 튀어나온 것처럼 완벽하게 정리된 거실이 보인다. 남은 맥주는 소파에서 마시고 싶었지만 이내 말았다. 반듯하게 정리된 소파는 저 상태 그대로 잘 있어야 한다. 계속 냉장고 앞에서 나머지 맥주 반 캔을 들이켰다.지수에게 적당히 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매일 늦은 퇴근으로 집안일과 육아를 함께 하지 못했기에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늘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는 거실과 집안을 볼 때면 깨끗함을 넘어 숨이 막혔다.


엄마와 다른 사람.

정운의 맞선 조건은 딱 이거 하나였다. 모든 것이 엄마와 다른 사람이라면 그 어떤 여자와도 결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운의 앞에 앉아 있는 맞선녀들은 죄다 똑똑하고 잘났다. 그의 부모가 누구인지, 어떤 집안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모두 아름다운 미소 속에 각자의 욕망을 숨기고 있었다. 가난한 집안이지만 똑똑한 청년이었던 아버지가 왜 어머니와 결혼했는가! 그녀들 역시 아버지와 같은 이유로 정운과 결혼하고 싶은거겠지. 맞선 자리의 모든 여자들이 속물처럼 느껴져 역겨웠다. 그래서 내가 아닌 배경을 좋아하는 여자들과 맞선 보기를 그만 두었다. 그때 운명처럼 지수를 만났다.


지수는 가난했지만 사이좋은 부모님 아래에서 사랑 받고 자랐다. 공부를 곧잘 했기에 수도권 대학에 갈 수 있었지만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지방 대학을 선택했다. 대학에서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었다. 졸업 후에는 바로 취직해 돈을 벌었다. 매달 지수의 월급은 부모님의 빚을 갚느라 남는 것이 없었기에 시장에서 파는 만 원짜리 티셔츠와 운동화를 사 신었다. 그래도 주눅 들지 않았다. 정운은 통장에 돈이 없어도 늘 긍정적이고 밝고 씩씩한 지수가 참 좋았다.


3년 연애 후 정운은 프로포즈를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의 집안에 대해 이야기했다.(주로 엄마에 대한 이야기였다.)지수는 좀 놀란 것 같았지만 이내 상관없다고 했다. 정운을 사랑하기에 다 괜찮다고 했다. 정운의 엄마는 지방대 출신에 가난한 집안의 지수가 탐탁지 않았다. 엄마의 반응을 예상했던 그는 엄마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을 시작했다. 바로 언론플레이었다. 엄마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이미지가 중요한 사람이었다. 아는 기자를 이용해 언론플레이를 했고 예상대로 엄마의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결혼식 날 어머니는 자신처럼 사랑을 선택한 아들을 지지하는 아름다운 시어머니로 완벽한 연기를 해줬다.


둘은 서울 외곽의 작은 아파트를 마련해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결혼 후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 어버이날이면 지수가 먼저 시댁에 가자고 했다. 정운은 내키지 않았지만 못 이기는 척 지수와 함께 본가에 갔다. 어머니는 늘 정운과 지수를 반겼지만 은연중에 지수를 무시하고 면박을 주었다. 똑똑하고 현명한 지수가 모를 리 없었지만 늘 밝게 웃었다.

그랬던 지수가 아이를 낳고 변했다. 처음에는 신생아 육아로 잘 못 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먹지 못해 살이 빠지기 시작하더니 정신을 놓고 있을 때가 많아졌다. 밝게 빛나던 지수의 마음이 점점 사그라지고 있었다. 가슴이 아프고 안타까웠다. 친한 직장 동료에게 슬쩍 털어놓으니 산후우울증 같다고 했다. ‘그런가? 그럴 수 있지. 양가 부모님 도움도 못 받고 매일 야근하는 나도 도와주지 못하니 그럴만도 하지.’


그날 조퇴를 하고 일찍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지수가 예전의 밝은 모습으로 자신을 반기는 것이 아닌가! 얼떨떨하게 집에 들어오는 정운을 향해 지수가 말했다.

“자기야! 하영이 태어나자마자 피부 안 좋았던 거 알지?”

“으으응."

'하영이 피부가 그랬던가?'


“처음에는 병원에서 태열이라고 했잖아.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낫지 않는거야. 그래서 내가 오늘 다시 병원에 갔거든? 그런데 태열이 아니라 아토피래. 깜짝 놀랐지 뭐야. 하지만 내가 엄만데 가만 있으면 되겠어? 그래서 내가 이것저것 찾아보고 알아봤거든? 아토피인 애들은 간식도 아무거나 먹음 안되고 음식도 가려 먹어야 한대. 그래서 나 하영이 간식 다 버리고 이것저것 만들었어. 저녁도 잘 챙겨 먹이고. 그럼 좋아질거야. 그렇지?”

원래 지수 말이 이렇게 빨랐나? 정운은 그런 지수를 멍 하니 바라보았다.

“그런데 자기 오늘 일찍 왔네. 웬일이래? 저녁 안 먹었지? 조금만 기다려. 내가 차려줄게.”

‘가만! 아토피 그거 심각한 거 아닌가? 쉽게 고칠 수 없다고 들었는데 하영이는 괜찮은걸까? 그런데 지수는 애가 아토피인데 왜 이렇게 기운이 넘치지?’


정운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결혼 전 지수가 집안의 부채를 갚는다는 목표로 악착같이 살았던 것이 생각났다. 지수에게 ‘하영이의 아토피를 낫게 하는 것!’이 새로운 목표가 된 걸까? 그때 저녁을 준비하며 지수가 중얼거렸다.

“내가 우리 하영이 엄마잖아. 엄마라면 아이를 위해 뭐든 할 수 있어야지. 나는 그럴거야. 나는 우리 하영이 엄마니까.”

그 후 지수는 새로운 목표를 향해 악착같다 못해 지나칠 정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월, 화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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