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서울에서 가장 비싼 호텔 커피숍이다. 직원의 안내로 중앙에 위치한 테이블에 앉았다. 커피 한 잔을 시킨 후 지그시 눈을 감았다. 곧 나타날 남자에 대해 생각했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연애를 몇 번 하기도 했다. 모두 깊은 만남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대학 졸업반이 되자 중매쟁이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들을 통해 다양한 남자들을 만났다. 똑똑한 남자들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았다. 얼굴이 잘생긴 남자들은 빈 깡통처럼 머리가 텅 비어 있었다. 돈 많은 남자들은 정숙의 부모를 등에 업고 더 많은 돈을 벌기를 원했다. 그동안 자신이 만났던 남자들을 떠올리자 머리가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전도유망한 물리학자라.’
오늘 만남은 친구가 만들어 준 자리였다. 부모님의 요구에 못 이겨 나갔던 선 자리에 지쳐갈 때 즈음이었다. 같은 과 친구에게 하소연 했더니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정말 괜찮은 남자를 하나 알긴 아는데……. 너희 집이 워낙 대단한, 아니 뭐 솔직히 너네 집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 그래서 내가 좀 망설였는데 한 번 만나볼래?”
“어떤 사람인데?”
“집안은 뭐 너희 집과 비교도 못 되지. 그런데 이 남자 어릴 때부터 엄청난 수재였대. 그래서 K대학에 전체 수석으로 들어왔고. 입학하고도 계속 과 1등이었어. 교수들도 오랜만에 천재가 들어왔다며 엄청 반기고 좋아했다지. 그런데 그 집안이 계속 남자 발목을 잡는거야. 능력이 되면 뭐하니. 돈이 없는걸.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싶어도 돈이 없어 못 갔나봐. 다행히 과 교수들이 도와줘 K대학원에 자리를 하나 만들어줬어. 교수들 연구일을 도우며 용돈 받고 있나봐. 성실하고 똑똑하고 인물 그만하면 괜찮고. 그런데 집이 가난해도 너무 가난한 모양이더라.”
정숙은 눈을 감은 채 친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혹시 윤정숙씨?”
눈을 뜬 정숙의 눈 앞에 그가 서 있었다.
부모는 강하게 반대했다. 아무리 똑똑하고 잘났다고 해도 이 남자는 안된다고 했다. 그녀의 고집에 한 발 물러나 연애는 허락했지만 결혼만은 안된다고 했다. 하지만 정숙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지금까지 뜻대로 되지 않은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결혼도 뜻대로 해야 한다. 부모님의 뜻을 꺾기 위해 단식에 들어갔다. 굶기 시작하면 부모가 백기를 들 것을 잘 아는 정숙이었다.
결혼식 전날, 자신 없는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당신은 왜 나와 결혼하는거지?”
“나는 당신 하나 보고 결혼하는거야. 당신 집안, 돈은 내게 중요하지 않아. 그건 내가 갖고 있으니까. 당신의 똑똑한 머리, 반듯한 얼굴, 당신 일에 대한 열정. 나는 그게 좋아. 그러니 주눅들지마. 당신은 우리 부모님이 아닌 나랑 결혼하는거야. 나도 당신 부모님이 아닌 당신과 결혼하는 거고. 그러니 잊지마. 나만 보고 내 얘기만 들으면 되.”
정숙의 말에 조금 밝아진 그의 얼굴을 보며 정숙은 환하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정숙은 그에게 되묻지 않았다. 그럼 왜 당신은 나와 결혼하는거냐고. 듣지 않아도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벗어날 수 없는 가난과 자신만 바라보는 부모와 형제들이 지긋지긋했겠지. 아무리 똑똑해도 공부를 잘해도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그것들이 숨막혔겠지. 정숙은 남들은 선하다고 말하는 그 눈에 숨겨진 그의 강렬한 욕망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 그렇다면 나는 네가 그들을 버릴 수 있게 도와줄게. 대신 평생 내 옆에 서서 나의 삶을 더 완벽한 삶으로 바꿔줘.’
대단한 집안의 딸이지만 가난한 집안의 남자와 사랑 하나로 반대를 무릎쓰고 결혼한 여자.
똑똑하고 좋은 대학까지 나왔지만 자신의 성공보다 남편의 성공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내조하는 여자.
너는 그걸 내 앞에 달아줘.
정숙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으며 결혼식장 안으로 들어섰다. 이 순간만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였고 행복한 신랑이었다. 결혼식을 올린 후 두 사람은 바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정숙의 바람대로 버클리 대학에 들어가 박사 학위를 마쳤다. 그 후 MIT에서 포스트닥 과정까지 끝내고 유명한 물리학자가 되었다. 그리고 먼 나라 미국에서 공부한다는 이유로 남자의 가족과 인연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