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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Jun 20. 2023

그리움은 허기로 찾아온다

- 베프 S를 추억하며

[내부 저장 공간이 부족합니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왠지 촬영 버튼을 눌러도 찰칵- 소리가 나지 않더라니. 핸드폰 사진첩에는 언제 찍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사진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하염없이 화면을 넘기며 삭제 버튼을 누르다, 문득 손을 멈췄다. 밝게 빛나는 형광등 아래 군데군데 돌아가던 커다란 선풍기. 곰돌이 푸가 그려진 끈적끈적한 식탁보가 덮인 식탁. 알아듣지 못하던 말이 웅웅거리며 귓가를 울리던 곳. 그녀와 함께 갔던 파타야의 푸드코트가 그 사진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직 불볕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늦여름이었다. 그녀와 나는 대학교 때 반 친구로 만났다. 나의 과거 애인을 모두 만나본 유일한 친구였고, 서로의 연애 히스토리를 차례대로 읊을 수 있을 정도로 친했다. 우리는 2014년, 태국 파타야로 여름휴가를 가기로 했다. 유명 여행사의 3박 5일 에어텔 코스였다. 그런데 출발 일주일 전부터 내가 기침이 나기 시작했다. 동네 병원의 약으로 전혀 차도가 없었다. ‘기관지염’이라고 쓰인 대학 병원 약봉지를 움켜쥐고 비행기에 올랐다.



훅 끼쳐오는 덥고 습한 바람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만, 설레는 마음이 더 컸다. 우리는 쏭태우를 타고 여기저기 쏘다녔다. 쏭태우는 벤 뒤쪽을 뚫고 기둥을 세워 여러 사람이 탈 수 있는 형태로 만든 대표적인 교통수단이다. 눈이 부실 만큼 하얀 탑들이 기다랗게 늘어서 있고, 자로 잰 듯 반듯하게 꽃과 나무로 정원을 꾸며 놓은 농눅빌리지부터 갔다. 코끼리 등에 탄 사람들이 나와 전투를 벌이는 내용을 담은 연극도 보고, 코끼리가 자기 몸 만큼 커다란 오토바이를 타는 쇼도 구경했다.  


©  Ashwani Verma, 출처 Unsplash



상아색으로 반짝이던 고운 모래에 물결이 살랑거리던 산호섬에도 갔다. 그녀와 나는 준비해 간 비키니를 입고 파란 하늘과 연한 녹색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잔뜩 찍었다. 어딜 가도 양산을 접으면 따가운 햇살에 피부가 마구 타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내가 기침이 멈추지 않아서, 우리는 물놀이를 할 수 없었고 다른 수상 스포츠에도 도전해 보지 못했다. 평소 새로운 도전을 즐겼던 그녀였지만, 그때는 한 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다.



랜드마크 쇼핑몰인 파타야 센트럴페스티벌도 갔다. 세상의 브랜드가 한자리에 모인 듯 거대했고, 그만큼 익숙한 브랜드도 눈에 많이 띄었다. 태국에 왔으니 태국 브랜드에서 기념품을 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라야’라는 가게에서 큼지막한 리본이 달린 보들보들한 감촉의 가방을 샀다. 판매원은 방수도 되고 아주 가벼워 승무원들에게도 인기가 많다고 강조했다. 당시 한국 돈으로 3만 원 정도 했던 것 같다. 우리는 ‘나라야’ 가방을 하나씩 들고 만족스러운 소비를 했다며 씨익 웃었다.



그녀와 내가 자주 들렀던 음식점은 숙소 근처의 푸드코트였다. 고수를 잔뜩 얹은 참돔 튀김에서부터, 조개와 각종 채소가 듬뿍 들어있는 새콤한 똠얌꿍, 숙주와 달걀·새우가 어우러진 달콤한 팟타이까지 다양한 요리를 팔았다. 우리의 ‘최애’ 메뉴는 케일 볶음이었다. 케일에 마늘만 살짝 넣어 기름에 볶은 것이었는데, 처음에 한 입 먹어보고 깜짝 놀랐다. 살짝 아삭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에 고소한 감칠맛이 일품이었다. 마지막 날에도 우리는 남은 잔돈으로 흰밥에 케일 볶음을 시켜 신나게 먹었다. 



태국의 습한 공기가 내 목으로 쑤욱 들어왔지만 기침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알록달록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정원에서도, 파도가 쏴아 들이치는 해변에서도, 명품 브랜드가 줄지어 들어선 쇼핑몰에서도,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 콜록거렸다. 그녀는 밤에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도 나를 걱정했다. 나는 너무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다음에 그녀와 여행 가면 꼭 더 많은 걸 해보고 더 즐겁게 지내다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다음을 기약할 수 없게 될 줄이야.


[나 아직 여행 가서 샀던 ‘나라야’ 가방 잘 쓰고 있어. 좀 해진 곳이 있긴 하지만.]


그 이후 3년 동안, 나는 지금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아이가 생겼다. 갑자기 너무 달라진 일상에 그녀와 다시 여행을 생각지 못했다. 그래도 연락은 종종 주고받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녀는 내가 보낸 카톡을 읽지 않았다. 이틀이나 지났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여기저기 수소문하던 끝에, 대학교 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걔가 사고를 당해서 지금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있대." 핸드폰 너머의 '중환자실'이라는 소리에 아득해져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 Marty Harrington, 출처 Unsplash


남편이 퇴근하자마자 돌쟁이 아이를 맡기고 택시를 탔다. 대학교 졸업식 때 뵈었던 그녀의 부모님이 중환자실 침대 발치에 계셨지만,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열 개가 넘는 전선이 각종 기계로부터 뻗어 나와 그녀의 몸에 연결되어 있었다. 얼굴은 금방이라도 눈을 뜰 것처럼 그대로였지만, 다리가 두꺼운 나무둥치처럼 심하게 부어있었다. 나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잡고 ‘꼭 깨어나서 우리 집에 놀러 오라.’라고 말하며 울먹였다. 



그녀는 서울 모처에서 혼자 살았다. 2017년 3월 어느 날, 밤늦은 퇴근길에 앞에서 오는 차를 피하려다 발을 헛디뎠다. 하필 가드레일이 휘어져 있어서 그대로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렸다. 출혈이 심해 한 달간 중환자실에 머물다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장례식에 가족들 외에는 부르지 않아, 나는 나중에야 추모 공원으로 그녀를 다시 만나러 갈 수 있었다. 그 후 2년 동안 그녀의 부재에 익숙해지려 노력했다. 그녀가 떠났다는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밤새 슬픔을 곱씹었고, 심리 상담을 받으며 그녀를 제대로 애도하기 위해 장례식 때 하고 싶었던 말을 작별 편지로 썼다. 



그렇게 살아낸 지난한 시간을 떠올리다, 문득 허기를 느끼고 현실로 돌아왔다.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그녀가 사고를 당했을 때 두 살이었던 아이는 이제 네 살이 되었다. 머릿속에서 단 하나의 메뉴가 맴돌았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동네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제일 큰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채소 판매대에서 케일을 찾아 집으로 돌아왔다. 핸드폰으로 ‘케일 볶음 레시피’를 검색했다. 아무래도 주스로 먹는 사람이 훨씬 많은지, 비슷해 보이는 조리법을 겨우 찾았다.  



나는 냄비에 물을 붓고 소금을 조금 넣었다. 가스레인지에 냄비를 얹고 불을 켰다. 비닐봉지를 뜯어 한 장 한 장 조심스레 케일을 씻었다. 보글보글 끓는 물에 케일을 넣고 잠시 기다렸다. 분명 너무 물컹하지도 너무 아삭하지도 않던 느낌이었는데. 케일을 체에 건져놓고 냉장고에서 다진 마늘과 파를 꺼냈다.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마늘과 파를 낮은 불로 익혔다. 고소하고 달큼한 냄새가 풍겼다. 양파와 케일을 넣고 젓가락으로 뒤적였다. 과연 같은 맛이 날까?



파타야에서 먹었던 그 맛이 아니었다. 싱거운가 싶어 소금을 더 뿌려보았지만 소용없었다. 핸드폰에 남겨진 케일 볶음 사진을 아무리 확대해 봐도, 케일과 마늘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케일 볶음 한 접시를 다 비우고도 허기가 가시지 않았다. 목이 멨다. 허기는 배고픔에서만 비롯되지 않았다. 그리움이 허기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이상, 부족한 건 양념이 아니었다. 내가 만든 요리에 더 필요한 것은 그녀의 존재였다. 그 맛은 그녀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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