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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Jun 26. 2023

네가 사라졌다

- 당신은 아이를 미워한 적이 있나요 

그 순간, 사실 네가 없어지기를 바랐다. 스스로 믿기지 않을 만큼 미움이 솟았다. 문득 네 기척이 느껴지지 않기에 옆을 돌아보았는데,

거짓말처럼,

네가 사라졌다.




너의 동생이 태어난 지 넉 달이 조금 지났을 때였다. 시터 이모님에게 네 동생을 맡기고, 어린이집으로 너를 데리러 갔다. 등원할 때 네가 부탁했던 킥보드를 챙겼다. 양쪽 손목에 보호대를 끼고 어린이집으로 걸어갔다. ‘엄마!’하고 외치며 네가 뛰어나왔다. 원장 선생님에게 인사하고 집으로 가려는데, 킥보드를 타고 앞서가던 네가 건널목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디 가? 집에 가야지.”

“나 저기 가서 젤리 사고 싶어.”


귀찮고 힘들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지만 오늘 장을 봐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잠깐 들러서 조금만 사고 집에 가야지. 나는 너와 함께 길을 건넜다. 따스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민들레가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이제 막 여름으로 넘어가는 늦봄의 냄새가 났다.


© Eduardo Soares, 출처 Unsplash


쇼핑몰 안에서는 킥보드를 탈 수 없다. 나는 왼손으로 킥보드를 밀고, 오른손으로 너의 손을 잡았다. 어린이집 가방은 오른쪽 어깨에 멨다. 지하 1층으로 내려가서 식료품 매장으로 갔다. 카트에 타자는 내 말에 너는 싫다고 가볍게 거절했다. 깔깔 웃으며 과일 진열대로 뛰어가는 네 모습을 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각도를 바꾸어 봐도 킥보드를 카트 아래 고정할 수 없었다. 왼손으로 킥보드를 밀고 오른손으로 카트를 밀어야 했다. 양파, 애호박, 달걀, 우유, 닭다리살, 훈제오리고기…… 물건을 담다 보니 카트 안이 꽉 찼다.


“엄마, 젤리 샀어?”

아 참, 젤리 사러 왔지. 과자가 진열된 곳을 여러 번 오갔지만 네가 찾는 젤리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 있다!”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졌던 네가 저 멀리에서 젤리 봉지를 손에 쥐고 뛰어왔다. 내가 둘러보던 곳은 국내 과자 판매대였다. 눈이 밝은 너는 수입 과자 판매대를 쉽게 찾았다.


우리는 계산대에 물건을 올려놓기 시작했다. 너도 자그마한 손으로 카트에서 물건을 꺼내려 했다. 그러다 양파가 담긴 그물망의 끈이 풀렸다. 양파들이 바닥으로 데구루루 굴러갔다. 양파를 쫓아가는 나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십만 원 넘게 나오다니.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종량제 봉투 두 개에 물건을 꾹꾹 나누어 담았다.






터질 것 같은 봉투 하나를 킥보드 위에 싣고 왼손으로 킥보드 손잡이를 잡았다. 다른 봉투도 무거웠지만, 오른손으로 들 수밖에 없었다. 킥보드는 계속 위태롭게 기우뚱거렸다. 다섯 번째로 봉투가 떨어졌을 때는 팔이 후들거리고 손목이 시큰거렸다. 내가 낑낑거리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동안 너는 신이 난 강아지처럼 지하 1층을 뛰어다녔다. 사람이 은근히 많아 네가 다른 사람과 부딪치지는 않을까 조바심이 났다.



겨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1층으로 올라왔다. 곧 쇼핑몰 출구라는 생각에 나는 조금 기운이 났다. 그런데 갑자기 네가 말했다.


“엄마, 나 장난감 사고 싶어.”

나는 눈을 휘둥그레하게 뜨고 너를 쳐다보았다. 장난감을 사려면 3층으로 올라가야 했다. 입술을 깨물며 짜증을 꾹 눌렀다.

“엄마 지금 짐이 너무 많아. 장 본 물건도 한가득 이고, 킥보드에……어린이집 가방도 있잖아. 우리 다음에 가자.”

“아냐, 싫어! 지금 갈래! 지금!”


너는 바닥에 주저앉아 지금, 이라고 계속 외쳤다. 주위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우리를 쳐다보았다. 나는 열이 뱃속에서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너는 주먹을 쥐고 앉아 바닥을 여러 번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머릿속에서 뭔가 툭 끊기는 기분이 들었고, 멍한 얼굴로 너에게 말했다.


“엄마는 못 가겠어. 가려면 너 혼자 가든지 마음대로 해.”


너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출구 쪽으로 조금 걸어가자, 네가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지금 상황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네가 미웠다. 그래서 짐을 질질 끌며 돌아보지 않고 출구를 향해 곧장 걸어갔다. 휘몰아치는 감정이 자꾸 속으로 너에게 소리쳤다. 어디 한번 혼자 가보라고, 나는 지금 너와 같이 있고 싶지 않다고. 그런데 갑자기 너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나는 당황해서 뒤를 돌아보았는데, 네가 사라지고 없었다.



© mostafa meraji, 출처 Unsplash



정말 혼자 가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정말 없어지기를 원했던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찰나의 순간에 네가 눈앞에서 사라질 수 있지? 문득 네가 3층으로 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난감 매장은 3층에 있고, 너는 혼자 가겠다고 마음먹었을 수도 있으니. 엘리베이터는 너를 놓친 자리 바로 옆에 있었다. 왼쪽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나는 킥보드, 가방, 봉투를 죄다 엘리베이터 앞 의자에 기대 놓았다. 오른쪽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 버튼을 눌렀다.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다. 문이 열렸고 나는 네가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너는 없었다. 나는 3층을 뛰어다니며 너를 애타게 찾았다.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정신없이 뛰다가 보안요원을 발견했다. 너를 잃어버렸다고, 인상착의와 이름을 말하는데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보안요원은 보안실에 상황을 알렸다. 나는 보안요원들과 3층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뛰다가, 혹시나 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이럴 수가. 엘리베이터 앞 의자에 세워 놓았던 킥보드가 없었다. 그때 보안요원에게 무전기로 연락이 왔다. CCTV를 확인해 보았는데, 너로 추정되는 아이가 킥보드를 타고 쇼핑몰 밖으로 나갔다고.



쇼핑몰 주변을 찾는 건 보안요원들에게 맡기고, 나는 집이 있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봄바람에 흘러가는 민들레 씨도, 캇캇 거리며 나뭇가지를 들고 둥지로 날아가는 까치도,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너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나도 더는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핸드폰 벨이 울렸다.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이었다.

“어머니! 저 XXX동 지하 1층 주차장인데요. ㅇㅇ랑 같이 있어요. 이리 오세요.”

“네??”


원장님이 우리 집 공동 현관 앞에 너와 같이 있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나는 혼란과 기쁨이 뒤엉킨 마음을 누르며 지하 주차장으로 뛰어갔다. 너를 보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하지. 무엇보다 너를 탓하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아야겠다고 되뇌었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원장님 옆에 네가 킥보드를 붙잡고 서 있었다. 너를 보는 순간 나는 긴장이 풀려버렸다. 너와 네 주변이 환하게 빛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제야 온몸에 다시 피가 도는 것 같았다. 나는 지금 세상의 무엇도 더 부럽지 않아. 내 인생의 행운을 지금 너를 찾는 데 다 썼다고 해도 조금도 아깝지 않아.


따스한 날씨에도 너는 차갑게 얼어 있었다. 굳어버린 밀랍 인형같이 얼굴에서 아무 표정도 느낄 수가 없었다. 나는 너를 으스러뜨릴 듯이 안았다.


“많이 무서웠지……. 엄마가 정말 미안해.”


그제야 네 눈가가 빨갛게 변했고 눈물이 고였다. 네가 불안한 마음을 억지로 누르며 여기까지 혼자 킥보드를 타고 건널목을 건넜을 모습을 떠올리니, 심장을 쥐어짜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던 원장님이 눈가를 살짝 훔치며 다가왔다.


“마침 제가 XXX동에 아이 과외 끝나는 시간 맞춰서 데리러 왔는데, ㅇㅇ가 공동 현관 앞에 있더라고요.”



©Olesya Yemets, 출처 Unsplash


그 이후 한동안 비슷한 악몽을 자주 꾸었다. 꿈에서 매번 너를 잃어버렸고, 사람들은 엄마가 되어서 어떻게 아이가 없어지길 바랄 수 있느냐고 비난했다. 엄마라면 당연히 아이를 언제나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내가 엄마 자격이 없다고 몰아세웠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곤 했다. 때로는 베갯잇에 눈물 자국이 남아있었다.


엄마도 아이를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엄마 됨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책과 영화, 엄마들의 이야기를 보고 들었다. 사회가 헌신적으로 희생하는 엄마의 모습을 이상으로 표방해왔다는 것을 배웠다. 엄마와 아이라는 특별한 사이라도, 결국은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 맺음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지금도 그때 너와 헤어졌던 순간이 가끔 떠오른다. 매번 나는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래도 나는 과거의 나를 밀어내지 않는다. 양가감정을 모두 인정하기로 했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부정하고 싶지 않고, 너를 찾았을 때 느꼈던 그 기쁨, 무엇과도 바꿀 수 없던 그 행복도 잊고 싶지 않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너는 가끔 나를 귀찮아한다.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학교에서 혼자 하교하기도 하고, 학교 근처 학원에 혼자 다녀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네가 훌쩍 컸다는 것을 실감한다. 서로에게 마음이 상할 때도 있지만, 우리가 함께 살기에 자연스레 벌어지는 일일 테다.


매일 자기 전 나는 하루치의 힘듦을 뒤로 하고, 너를 꼬옥 안는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변치 않는 나의 마음을 너에게 고백한다.



엄마가 많이 사랑해. 네가 있어서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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