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래도 돈이 되지 않을 것 같은, 나의 글쓰기
“여러분, 내가 사라지는 거예요. 더는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닌 거죠.”
강의 내용은 명쾌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핵심. 때문에 나와 비슷한 콘텐츠를 생산하는 크리에이터들을 계속 모니터링하고 모방할 필요가 있다는 것. 줌 강의가 끝나고, 나는 강의 내용을 정리하다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글을 써서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시작은 단순했다. 나는 속에서 곪아가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사랑하는 아이들과 종일 집에 있으면서도 온전히 행복하지 않아 고통스러웠다. 휴직 기간이 길어질수록, 이야기를 나눌 어른이 필요했다. 우연히 비슷한 나이 또래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모인 온라인 카페를 찾았다. 독서와 글쓰기 스터디에 발을 들여놓았다. 한 권 두 권 책이 쌓여갔다. 책 속 문장이 내 몸을 통과하며, 내 안에 눌려 있던 기억들과 섞였다. 목까지 차오른 고통과 슬픔이 손끝에서 글자로 풀려나가는 느낌은 몹시 짜릿했다.
내 삶의 순간순간에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뾰족한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그 가시를 하나씩 뽑아 문장으로 배열하면서, 나는 개인의 이야기를 세상과 분리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렇게 취향이 만들어졌다. 나는 자기 계발보다 타인의 고통에 감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관심이 많다. 신간과 베스트셀러도 흥미롭지만, 미처 못 읽은 페미니즘 고전에도 무척 끌린다. 책뿐만 아니라, 참여하는 모임도 평소 관심사도 그렇게 ‘대중적’이지는 않다.
이야기를 몸 밖으로 길어 올리는 것만으로는 내 욕구가 채워지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어 줄 상대가 필요했다. SNS에 서평을 올리고, 친구들과 웹진을 발행했다. SNS 이웃과 구독자를 늘리고 싶다는 욕망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인플루언서들의 계정을 유심히 들여다보기도 하고, 그 계정처럼 SNS 형태를 바꾸어 보기도 했다. SNS를 운영해서 많은 돈을 버는 사람들이 점점 더 눈에 들어왔다. 물밀듯이 쏟아지는 SNS 강의 광고에도 자주 시선을 빼앗겼다.
그중 콘텐츠 만들기를 주제로 한 원데이클래스를 줌으로 들었다. 강사는 콘텐츠 크리에이터라면 나를 통해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싶어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하는 명료한 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근본적인 의문에 휩싸였다. 나는 과연 사람들이 원하는 걸 하고 싶은 걸까. 내가 글쓰기를 처음 시작한 이유는 무엇이었지. 나는 글을 써서 돈을 벌고 싶은 걸까.
정년까지 버틸 수 있는 회사에 다니지 않았다면, 콘텐츠를 통해 돈을 벌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꼬박꼬박 월급 주는 회사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이런 고민을 하는 것도 일종의 특권이라는 것을 안다. 동시에 이렇게 권력에 민감해진 것도 그간 내가 읽은 책 덕분인데, 싶어서 약간은 울적해졌다. 역시 돈을 버는 쪽으로는 가망이 없는 건가. 아무리 마음 깊숙한 곳에 물어봐도, 돈을 벌기 위해 수요를 파악해가며 SNS에 더 집중하고 싶은 열의가 타오르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창작’의 느낌을 떠올리며, 삼각형을 하나 그려보았다. 정 가운데에는 글쓰기를 쓰고 그 아래 작게 독서라고 적었다. 이 활동에 고려하고 싶은 요소들을 각 꼭짓점에 써넣어 보았다. 취향, 시간, 에너지. 지금은 이렇게 세 가지다. 나는 차별금지를 외치다 누군가에게는 ‘프로불편러’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관점이 사라진 글은 쓰고 싶지 않다. 내 안의 목소리와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책이 공명하여 글로 탄생했을 때 밀려오는 희열. 그것을 포기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