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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직업은 가정주부입니다

전문적인 가사노동

by 레민

아무런 재주도 없는 내가 집안일만 하며 살아온 것은 참으로 적성에 맞는 일이었다.(라고 말하면 스스로 위안이 될는지.)

그러나 가끔 직업란을 작성해야 할 때 무직이라 해야 하나 전업주부라 해야 하나 혹은 가정주부가 좀 더 나아 보일까 잠시 머리를 굴리기도 했으니,

결국 이 모든 표현은 경제적으로 일을 가지지 않은 사람과 같은 말임을 깨닫고 그냥 간단히 '주부'라고 떨떠름히 표기하곤 했다.
오랜만에 동창을 만나거나 새로 알게 된 사람들에게 일하세요? 무슨 일 하시나요?라는 질문을 던지거나 받게 될 때가 있다.

그들 중 대개는 직업을 갖고 있기도 하고 또 몇몇은 나처럼 '그냥 주부'로 살기도 한다.

동지 의식에 반가워서 "우리 그냥 놉시다" 말하며 웃곤 했지만 놉시다 뒤의 뭔가 께름칙한 느낌은 곧 자격지심이랄지 돈벌이 없이 놀고(?) 있다는 것에 대한 마음 나눔이었는지.

"일 안 하고 놀아요"가 가정주부의 동격이 아님을 잘 알면서 가사를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세태에 당사자인 나도 동참했었다.

그러나 중년을 살면서 서서히 노년을 준비해야 할 시기가 다가 오자 나의 이러한 자신 없는 마음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일을 안 하긴, 직업으로 아닐 뿐이지.

왜? 뭐, 집안일이 어때서? 때 맞춰 아이들 키워내고 집안 경제 개념 있게 일구는 일이 여느 전문 직업보다 못하단 법이 어디 있다고.

게다가 얼마 전 읽은 책에서 가장 좋은 치매 방지법이 집안 일 하는 것이라고 딱 못 박은 부분을 보고 아, 이거다 싶지 않았던가?

집안일이란 결코 하찮지 않다.
끊임없이 살펴야 하고 손 가는 일이 의외로 많다.

물론 안 해도 그만일 수 있으나 결국엔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다.

기억해 둬야 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

냉장고 속 내용물을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오래된 식료품과 갓 사 온 물건의 활용도를 높일 수 없다.(높이기는커녕 죽이는 일이 태반일걸)

분리배출일을 한 주만 놓쳐도 어수선한 공간에 한숨짓듯이 그러지 않기 위해서라면 시공에 합당한 노동을 거쳐야 한다.

노년이 되어서도 이런 일을 꾸준히 할 수 있다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 쓸데없다고, 별 일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게다.

대부분 별 일이 아닌 것 에서부터 구멍이 생기기 시작한다는 걸 간과하는 처사다.
아무려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실속적인 치매 예방을 오늘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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