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5월 92세 나이로 타계한 앨리스 먼로는 캐나다 최초 노벨상 수상 작가다. 체호프를 잇는 단편 소설의 대가라는 평을 받았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시골 작은 마을을 세상 밖으로 끌어낸 느낌으로 인간관계에 얽힌 저마다의 사연이 흥미롭고 진지하게 펼쳐진다. 척박한 생활환경 속에 희극과 비극이 교차하고 일상 이면의 속물근성과 추악함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 없는 우리네 모습이다. 시대적 슬픔을 이겨내고 공동체를 이루어 지역 발전을 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에 선 사람들. 기득권 사회로 들어가기 위한 여자들과 어린 소녀의 고군분투가 낯설지 않은 등 현대에 읽어도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 한 여인이 있다. 나와 비슷한 처지라 생각되어 친근감이 들었는지 혹은 기시감이 생겼는지는 모를 일이다. 단편 <작업실>은 '내 삶을 해결할 방법이 불현듯 떠오른 것은 어느 날 저녁 셔츠를 다림질하고 있을 때였다.'로 시작한다. 나 역시 한동안 다림질만 하던 시절이 있었다. 남편 와이셔츠며 하루 입고 구겨진 바지, 아이들 교복 블라우스를 매일 다림질해야 했던 그 일은 내게 고역이었다. 지금처럼 에어 드레서가 있던 것도 아니다. 빨래는 쉬운데 다림질은 어려웠다. 아무려나 내가 여기서 말하려는 건 다림질이 내포하는 집안일이다.
그녀는 이어 말한다. "아무래도 작업실을 얻어야겠어요." 본인 스스로도 허황한 소리라고 생각하지만 소극적으로 고백한다. "나는 작가다."라고. 공간이 없어서 글을 못쓰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가족 안에서 보호는 받으나 시달리고 가족의 정을 누리나 얽매이며 이런저런 뒤치다꺼리 속에서 작업실을 꿈꾸는 여자. "적당히 싼 거 있으면 그러든지" 하는 남편의 반승낙과 함께 <작업실>의 명칭이 주는 위엄 있고 안온한 분위기와 그곳에서 뭔가 대단한 일을 한다는 기분으로 계약하는데. 다음 펼쳐지는 상황이 웃프고 괴롭더니 끝내 악의적이다. 고민 끝에 큰마음먹고 얻은 사무실에서 마주한 임대인. 쓸데없는 참견과 조언 충고를 일삼으며 대놓고 친밀을 강요한다. 어느 날은 아예 작업실에 눌러앉아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언제나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다는 듯 그를 쫓아낼 마음이 얼마나 물러 터졌는지 알아챈다. 도무지 배려라고는 모르는 사람이다. 사무실 문에 쪽지를 붙여 작업실 사용 방법을 운운하고 급기야 글 쓰는 여자의 태도까지 논한다. 날이 갈수록 쪽지 내용은 악랄해지고 하지 않은 일에 대해 누명을 씌우는 등 남자를 죽이고 싶은 심정마저 갖게 한다. 사회의 괴물은 시공간을 망라하고 존재하는 법, 여자는 감정을 억누르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그가 이겼음을 인지한다. 짐을 챙겨 한때 작업실이던 공간을 떠나며 믿음을 배신하는 또 다른 이야기를 써보기로 마음먹는다. 언젠가 다른 작업실을 다시 찾아볼 요량이지만 아직은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자기만의 공간을 갖기란 이렇게도 어려운 일인가? 일상의 글을 써나간 작가 앨리스 먼로, 단편임에도 간간이 멈추어 선다. 마치 간이역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