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방패가 되는 글쓰기] 내가 뱀에게 위협이 될 때

- 법의 존재 이유

by 김창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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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을 쓰면서...


금단의 열매를 따 먹고 인간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지혜를 얻었다. 그 대가로 인간은 죽도록 노동을 하고 출산을 하는 존재로 전락했다. 이전까지 지혜는 하느님이 인간에겐 허락하지 않은 영역이었다. 에덴 동산에서 신의 섭리대로 행복하게 살다 죽으면 그 뿐이었다.


신이 아담과 이브를 낙원에서 추방한 건 선악과를 따먹은 벌의 의미만은 아니다. 생명의 나무를 따 먹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어쩌면 더 컸다. 지혜와 영생의 존재는 곧 신이었다.


지금은 4차산업 혁명 시대.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는 휴먼레벨의 인공지능(AI) 양산을 눈앞에 두고 고민에 빠졌다. 지혜를 가진 인공지능은 곧 인간이기 때문이다. 엔지니어들은 가상의 세계에 인공지능이 절대 따먹어서는 안되는 선악과를 심어야 할 지를 조만간 결정해야 한다.


지혜의 존재가 곧 죄인 건 철저히 신의 입장이다. 그 것은 신의 권능에 대한 도전이었을까, 아니면 선과 악의 판단이 필요없는 존재가 신이 설계한 인간 본연의 모습이었을까. 그렇다면 신은 왜 굳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것을 알면서 낙원에 금단의 열매를 심었을까.


아담이 이브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인간은 어쨋든 선악을 판단하는 유일한 신의 피조물이 됐다. 노동과 출산이 힘들 때 인간은 그 대가로 지혜를 얻은 존재란 사실을 상기하면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살다보면 누군가를 옹호하기도, 반대로 다른이를 비판하기도 한다. 강요에 의한 경우도 다반사다. 조직내에서 이른바 줄을 세울 때 내 편을 확인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상대를 공격하게하는 것이다.

칼럼 쓰는 게 직업인 기자는 비판이 일상적인 업무다. 처음엔 그 일이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옳고 그름, 선과 악에 대한 잣대는 적어도 상아탑 내에서까지는 비교적 명확한 것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비판이 쉽지 않은 일이 됐다.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심지어 선악이 바뀌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 기준은 개개인마다, 집단마다, 국가별로 다른 것이었다. 처음부터 선과 악이란 게 존재하는 지도 의문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역사상 수많은 현자들이 선과 악의 기준을 세우려 애를 썼다. 그리스의 현인과 종교학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트텔레스, 칸트와 니체, 공자와 맹자 등 동서고금을 꿰뚫어 현자들이 선악 사이에 선명한 금을 긋기 위해 노력했다. 결과적으로 모두 실패했다. 성과는 있었다. 선악의 개념은 상대적이란 절대적인 진리를 깨달았다.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서양에선 인간이 선악의 판단 주체였다. 인간과 우주의 조화를 중시했던 동양은 인간만이 판단의 주체가 아니었다. 자연도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이자 대상이었다. 열매 몇 알이 남은 걸 까치를 위한 감나무의 배려라고 생각하는 게 우리식 생각이다.


개개인, 개별 집단, 개별 국가가 각각 선악의 판단 주체라는 건 기준이 제각각이란 얘기다. 서양인에게 선악이란 결국 ‘나’에게 즐거움을 주느냐로 결정된다. 자연과의 조화란 전제를 생각했던 동양엔 선악의 판단에 대해 어느정도 절대적인 가이드라인이 있는 셈이다.


서양이 동양보다 마약에 관대한 건 개인의 쾌락이 선이라는 철학적 기반 때문일 수도 있다. 등산 중 뱀을 마주칠 경우 서양인에게 뱀은 무조건 악이다. 자신에게 불쾌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뱀은 선악의 판단 대상이지 주체가 될 수 없다. 뱀의 입장에서 보면 등산객이 불청객인데 말이다. 사람이 위협을 느낀만큼 뱀도 겁을 먹는다.


서양이 성소수자에게 보다 개방적인 것도 선악의 기준이 보다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음양의 조화를 중시하는 동양에선 양과양, 음과음의 결합은 자연의 이치를 깨는 것이다. 결국 악이다.


서양은 사회계약이 필요했다. 선악에 대한 지배적인 판단기준이 없었던 서양은 개개인의 각기 다른 판단을 통제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했다. 동양에선 공맹의 가르침이 상당히 오랫동안 사회계약을 대신했다. 법의 발달은 개인주의의 산물이다. 뒤집어보면 법이 없이는 사회안정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개성과 다양성이 중시될수록 선악의 판단은 모호해진다. 나에게 선이 타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수도, 심지어 위협감을 주기도 한다.


조직에서 열심히 일하는 동료는 선인가? 오너가 보기엔 선일 가능성이 크다. 월급값을 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먼저 승진하는 동료가 나에게도 선일까. 자신의 밥그릇을 위협하는 것만으로도 동료의 근명성은 곧 악이다. 그 것이 후배라면 오죽할까. 머리 나쁘고 부지런한 상사가 후배들의 공적이 되는 건 그의 선의가 타인에겐 악이 되기 때문이다. 손발이 피곤해질테니 말이다.


당연한 말 같지만 조직생활에서 이점을 망각해 곤경에 처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자신의 능력이 타인에게는 위협, 즉 악이된다. 패기있고 능력있는 직원이 종종 피라미드의 정점에 서지 못하는 건 자신이 누군가에겐 악이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조직이 커질수록 조직원의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세부적인 상황까지 매뉴얼을 만들어야 한다. 권력의 우위에 있는 개인이 악에 대한 자의적인 판단을 할 수 없도록 해야한다는 뜻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4차산업혁명시대 정부가 승차공유 기업들을 악이라고 규제하는 건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택시기사 입장에선 타다가 분명 악이다. 타다 입장에선 반대로 택시기사들이 악이다. 정부가 두가지 악중에 택시기사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앞서 말했듯 선악에 대한 이해관계자들의 판단기준이 다를 때 사회 안정을 위해 만든 게 법이다. 타다의 영업은 비록 법의 허점을 이용한 것이긴 하지만 그 선을 넘지는 않았다. 검찰이 타다를 기소한 것은 유감이지만, 이를 계기로 사법부가 행정부가 망각한 사회계약의 의미를 되새겨주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