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방패가 되는 글쓰기] 내가 특별하다고 착각될 때

- 세상을 두배로 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인식을 전환하라

by 김창익

[보헤미안 랩소디가 예술인 이유]


예술은 ‘어?’로 시작해 ‘와!’로 끝나야 한다. 미학자 진중권은 지난달 이화여대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서 “예술은 미적 주체가 새로운 관념을 만들고, 그 해석을 관철시키는 행동”이라고 했다. 새로우면서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마르셀 뒤샹이 설치한 변기가 예술이 된 건 이같은 기준을 충족했기 때문이다. 보는 사람들은 처음에 ‘어?’하고 놀랐다. 돈을 내고 미술품을 감상하러 왔는데 떡 하니 변기가 놓여있다고 생각해보라.


여기서 끝났다면 뒤샹의 변기는 예술이 될 수 없었다. 뒤샹은 변기를 만드는 작업 자체가 아니라 그 것을 선택해 전시한 행위 자체가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뒤샹은 이로써 관객을 새로운 판단의 도전앞에 세웠다. 이를 예술로 인정할 것인가를 놓고 평단은 고민 했다. 그리고 인정했다. 대중은 새로운 감성적 자극을 받았고, 아름다운 경험으로 받아들였다. ‘와!’로 끝난 것이다.


진중권의 관점은 칸트가 배경이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근대 예술철학의 기초를 세웠다. 칸트에게 예술이란 기존의 잣대로는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새로워야 한다. 동시에 칸트는 판단의 결과 보편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져야 한다고 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악으로 판단하는 보편적 윤리가 있듯 똥을 더럽게, 꽃을 아름답게 여기는 심미적 보편성이 있다는 게 칸트 생각이다.


예술가는 일단 일을 한다. 음악을 만들고, 그림을 그린다. 여기까지는 창작이 아니라 생산이다. 예술의 범주로 끌어올리는 건 관객의 몫이다. 통념을 깨는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으로 다가서서 자세히 듣고 보게 해야 한다. 자꾸 들어보고, 쳐다본 결과 아름답다고 느껴야 한다.


퀸의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부른 보헤미안 랩소디는 이런 관점에서 예술이다. 락과 오페라를 결합한 6분짜리 하이브리드에 관객은 경악했다. 평단이 혹평으로 맞이한 이 곡에서 관객은 무한히 확장되는 감성적 경험을 했다. 눈물을 흘리고 소리를 지르며 열광했다. 보편적으로 아름다운 곡으로 받아들였다.


‘인공지능(AI)이 예술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AI가 생산한 음악과 그림이 어?로 시작해 와!로 끝나는 경험을 제공한다면 예술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많은 이가 예술한다는 미명아래 생산물을 쏟아내지만 어?로 시작해 와!로 끝나지 않으면 그저 제품이다.


지난 10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프랑스 AI 어비어스가 그린 ‘에드몽 드 벨라미’란 초상화가 약 5억원에 낙찰됐다. 에드몽 드 벨라미는 빅데이터와 딥러닝의 결과물이다. 개발자는 14~20세기에 그려진 초상화 1만5000여점을 입력해 학습시켰다.


시장 가격은 예술로 인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예술과는 별개다. 낙찰자는 AI가 그린 그림 중 최초의 낙찰품이란 희소성이 미래가치를 보증한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경제적 판단이다.


에드몽 드 벨라미는 일단 관객을 새로운 판단의 무대위로 올리는 데는 성공했다. ‘AI의 그림을 예술로 봐야하는가’란 질문이 화두가 된 것만으로도 그렇다. 하지만 이 초상화가 미적 보편성을 만족하는 가는 좀 더 지켜볼 문제다. 보는 이에 따라 벨라미 초상화는 그저 눈도 코도 뭉개진 이상한 그림에 불과하다.


에드몽 드 벨라미가 예술로 인정될 경우 그림의 소유권은 누구에게 있을까를 생각해봐야 한다. 어비어스가 법인격, 즉 독립된 주체로 인정되면 비로소 AI가 예술했다고 할 수 있다. 아직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림값 5억원의 소유권은 어비어스가 아니라 개발자의 몫이었다. 법적으로 보면 어비어스는 창작의 수단이었을 뿐이다. 사진 예술품의 소유권이 사진기가 아니라 사진기의 주인에게 있는 것과 같다.


가까운 미래엔 AI가 작품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유럽연합은 지난해 11월 AI를 전자인간, 즉 법인격으로 인정했다. 올해 2월엔 AI에게 살인죄를 선고할 수 있다는 결의안에 서명도 했다. AI가 개발자의 지시가 아니라 자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때라는 전제가 붙는다. 강정석 MIT 대학교 미디어랩 AI 연구원은 “기술이 이 정도로 발전하는 건 시간의 문제”라고 했다.


AI가 예술할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은 이미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AI가 예술가가 되는 건 전적으로 자신의 작품이 관객에게 기존 관념을 깨는 즐거움을 제공하는 지의 문제다. 부언하면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김창익 window@ajunews.com







칼럼을 쓰면서...



AI(인공지능)이 절대로 범접할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이 있을까.


단순 계산 이상의 기능을 하는 AI 출현 이후 사람들이 많이 하는 질문 중 하나다. 산업혁명 시대 콘베이어 벨트에 자신의 일자리를 내준 기억은 200년 이후 현세대를 살아가는 DNA에 각인돼 있다. 역사상 최고의 SF 영화로 꼽히는 터미네이터를 비롯해, AI, 블레이드 러너 등은 공통적으로 암울한 미래를 그리고 있다. 이는 어쩌면 네안데르탈인을 몰살하고 살아남은 호모사피엔스의 생존 본능인 지도 모른다. 미지의 존재가 나타날 경우 일단은 알람을 켜야 생존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AI란 그 것을 독점적으로 생산하고 소유하는 일부 재벌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사람에겐 잠재적으로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다. 사람들이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직업을 묻는 건 어느 방향으로 도망을 쳐야 생존 확률이 높아질 지에 관한 것이다.


AI로 부터의 안전지대를 찾는 건 분명 미래의 인류, 심지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절박한 일이다. 생존이 걸린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을 전쟁의 최고 지침서인 손자병법에서 찾을 수 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란 계명은 4차산업혁명 시대 인간과 AI간의 전쟁에서도 적용된다. 이 중 지기, 즉 자신을 아는 것과 관련해 인간은 결정적인 착각을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 것은 바로 우리의 바람을 객관적인 사실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AI가 인간의 이성과 논리를 필요로 하는 부분은 쉽게 대체할 할 수 있지만, 감정과 직관이 담당하는 영역은 대체 불가능하거나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 것은 아마도 감정과 직관이 인간 고유의 능력이고 이성과 논리와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그 것을 초월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를 다른 대상, 심지어 다른 동물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로 인식해 왔다.


연구를 통해 많은 부분 이런 생각이 인간의 착각이란 점이 증명됐다. 아기 침팬지가 죽자 엄마 침팬지가 우울증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감정은 외부 자극에 따른 화학작용이 뇌에 전달된 것으로, 모든 감정은 특정 자극과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성과 논리를 초월하는 게 아니라 이성과 논리의 다른 영역이다. 직관 또한 논리를 초월한 미지의 작용이 아니다. 그 것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논리의 작용이다. 인간은 수십년간 창의력을 담당하는 뇌의 특정 부위를 찾지 못해 그 것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의 기능이라고 생각했다. 특정 역할을 하는 뇌의 특정 부위들이 서로 연결돼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게 창의력이란 게 최근 연구결과에서 발혀졌다.


우주전쟁이란 영화는 지구를 침범한 외계인을 무찌르는 SF 영화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인간을 대신해 외계인을 물리친 건 바로 바이러스다. 신대륙을 발견한 유럽이 원주민으로부터 아메리카 대륙을 쉽게 뺐을 수 있었던 것도 칼과 총이 아니라 전염병을 옮기는 바이러스였다. 외계인을 물리친 것도 신대륙에서 가장 왕성하게 번식한 것도 실상은 미생물였던 것이다. 바이러스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이 지구의 주인이고, 신대륙을 강탈한 역사의 주인공이다.


인간의 몸조차 인식의 대상으로 본 데카르트에서 근세 철학이 시작되고, 우주가 인간을 중심으로 도는 게 아니라 인간이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사실을 깨달은 갈릴레오로부터 근대과학이 비롯됐다. 인류의 역사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특별한 대상에서 내려놓고 객관화한 순간들이다. 우리가 만든 AI를 우리가 이기는 방법도 AI와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전 02화[삶의 방패가 되는 글쓰기] 무시당하는 느낌이 들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