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로달러 시장의 발생 배경과 시티오브런던의 복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브레튼우즈 체제(1944)는 달러를 금과 고정(온스당 35달러)시키고, 주요 통화들을 달러에 연동했다. 전후 복구와 미국의 대외지출로 세계 곳곳에 달러가 쌓였고, 달러는 사실상 국제결제의 표준이 되었다. 그런데 1950년대 들어 달러가 미국 바깥에서 더 자유롭게, 더 높은 금리를 약속하며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른바 유로달러 시장의 태동이다. 냉전의 긴장 속에서 1956년 헝가리 사태 이후 소련이 보유 달러가 미국에서 동결될 위험을 우려해 런던의 모스크바너로드니은행으로 예치를 옮겼다는 유명한 일화는, 정치적 리스크 회피가 ‘역외 달러’의 동기를 제공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동시에 미국 국내 규제가 역외 달러 성장을 자극했다. 당시 미국은 예금금리 상한을 두는 Regulation Q를 운영해 국내 은행이 지급할 수 있는 금리를 제한했다. 결과적으로 대형 예금주와 기업은 더 높은 수익을 찾아 미국 밖의 달러 예금으로 이동했고, 런던은 이 수요를 재빨리 흡수했다. Regulation Q는 유로달러 성장의 결정적 요인 중 하나였다.
1963년의 이자평준화세(Interest Equalization Tax, IET)는 역외 채권 시장을 사실상 런던으로 이전시키는 기폭제였다. 뉴욕에서 외국 발행채를 사는 비용이 세금으로 높아지자, 첫 ‘현대적’ 유로본드로 평가되는 이탈리아 고속도로청의 1963년 달러 표시 채권이 런던에서 발행·분산되며 새로운 국제달러 조달 허브가 자리 잡았다.
브레튼우즈의 고정환율 체제는 1971년 닉슨 쇼크(금태환 정지)로 사실상 와해되었다. 이후 변동환율·자본이동 자유화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런던은 역외 달러의 중개지로 더욱 부상했다. 영국은 1979년 외환통제 전면 철폐로 자본 이동을 한꺼번에 풀었고, 1986년에는 이른바 ‘빅뱅’이라 불린 런던 증권시장 대개편으로 수수료 자유화·전자거래 도입·업권 장벽 해체가 이루어졌다. 이 조치들은 시티오브런던을 규제유연·경쟁적 생태계로 재구성하며, 달러·파운드·엔·마르크 등 다통화 국제금융을 흡인하는 플랫폼으로 만들었다.
이 시기의 기술·계약 인프라도 중요했다. 1986년 영국은행협회(BBA)는 LIBOR를 공식 벤치마크로 출범시켜 런던에서 형성되는 단기 달러자금 가격을 전 세계 대출·스왑·FRAs 가격결정의 기준으로 표준화했다. LIBOR는 유로달러 시장의 ‘가격 언어’였고, 2023년 중단될 때까지 글로벌 계약의 중추였다.
요컨대, 유로달러 시장은 정치적 리스크 회피, 미국 국내 규제 차익, 영국의 규제개혁이 포개져 탄생했고, 런던은 ‘달러의 발권자’가 아닌 ‘달러의 중개·레버리지 허브’로 복권했다. 달러의 국제화와 시티의 부활은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키며 공진했고, 그 공진의 제도적 언어가 바로 LIBOR와 역외 시장의 계약·관행이었다.
2. 유로달러 시장이 달러 생태계에 미친 영향
첫째, 달러 유동성의 외연 확장이다. 유로달러는 연준의 지급준비·예금보험 바깥에서 형성되는 달러 부채·자산을 의미한다. 국제은행업·국제채권시장에서 달러는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며, 이는 본토 밖 거주자 간 거래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달러는 미국 통화를 넘어 거래·결제·저축·헤지의 범용 인터페이스가 되었고, 그 중개허브로서 런던의 역할이 공고해졌다.
둘째, 통화정책의 간접화와 ‘이중 회로’다. 연준이 정책금리를 조정해도, 역외 달러 가격은 현지 레포·CP·스왑·유로본드 시장의 수급과 위험 프리미엄에 의해 별도의 궤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위기 시에는 이 ‘그림자 달러’ 회로가 급격히 경색되며 글로벌 달러 부족을 야기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연준은 ECB, 영란은행, 일본은행 등과 달러 스왑라인을 열어 역외 은행의 달러러닝을 막았고, 이후 팬데믹기에도 상설·확대해 국제적 최종대부자 역할을 사실상 수행했다.
셋째, 공공 백스톱의 제도화다. 2020년 3월 연준은 외국중앙은행·국제기구가 보유한 미 국채를 담보로 달러를 조달할 수 있는 FIMA 레포 시설을 신설했고, 2021년 상설화했다. 이는 스왑라인 비대상국의 공식부문에도 마지막 안전판을 제공해, 역외 달러 시스템의 구조적 취약을 흡수하는 ‘공적 배수로’를 추가한 셈이다.
넷째, 규모와 지표의 진화다. 유로달러의 가격언어였던 LIBOR는 조작 스캔들과 현물거래 희소성 문제로 2023년 종지부를 찍었고, SOFR 등 새로운 지표로 이행했다. 그러나 벤치마크의 교체가 역외 달러의 기능을 약화시킨 것은 아니다. 2024년 기준으로도 국경간 은행 청구권과 신흥국으로의 신용은 계속 확장 중이다.
다섯째, 신흥국의 취약성 전이다. 역외 달러 부채를 지닌 기업·금융기관은 달러 강세·글로벌 금리상승기에 차환비용 급등과 자본유출 압력을 동시에 받는다. 이때 연준의 정책변화와 역외 달러시장 경색이 결합하면, 현지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자율성은 제한된다. 이는 통화주권과 금융안정에 구조적 제약을 준다.
정리하면, 유로달러는 달러 패권의 지리적 확장과 연준 통화정책의 간접화를 동시에 낳았다. 달러는 국제금융의 공용 언어가 되었고, 미국은 위기 때마다 스왑라인·FIMA로 사실상 글로벌 백스톱을 제공해 왔다. 반면, 그 대가로 미국 바깥에서 발생한 달러 신용 사이클의 충격을 공공부문이 흡수해야 하는 구조가 굳어졌다. 이 딜레마, 즉 패권확장과 거버넌스 부담이 달러 생태계의 핵심 역설이다.
3. 스테이블코인: 디지털 시대의 또 다른 역외 달러 가능성
스테이블코인은 법정통화 연동 토큰으로, 대다수가 달러에 1:1 페그를 약속하며 퍼블릭 블록체인 위에서 유통된다. 공개 네트워크에서 순환하는 디지털 토큰으로, 대개 달러 페그와 상환 약속을 내세우지만, 설계와 거버넌스에 따라 화폐로서의 완결성과 건전성에는 한계가 있다. 동시에, 거버넌스를 정비하면 국경 간 결제·자산토큰화 인프라의 한 축이 될 잠재력도 인정된다.
시장 규모는 이미 ‘니치’를 넘어섰다. 2025년 8월 현재 테더(USDT) 시가총액은 약 1,660억 달러, USDC는 약 680억 달러 수준이다. 페이팔 USD도 10억 달러 이상으로 성장했다. 전체 스테이블코인 규모는 2,500억 달러 안팎으로 평가된다.
구조적으로 보면, 스테이블코인은 역외 달러의 디지털 버전이라는 점에서 유로달러와 닮았다. 첫째, 발행·유통의 관할이 분산되어 있다. 둘째, 규제차익의 유인이 작동한다. 셋째, 준비자산이 주로 현금·미국 단기국채·레포로 구성되면서, 토큰 유통 확대가 미국 국채 수요를 자극한다는 분석이 많다.
다만, 유로달러와의 차이도 분명하다. 유로달러는 은행 대차대조표를 통한 신용창출이 중심인 반면, 대부분의 스테이블코인은 완전담보형 유통증표 성격이 강하다. 즉, 스테이블코인은 유동성과 결제성은 제공하지만 신용을 창출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대규모 상환·페그 이탈 리스크, 준비자산 불투명성, 불법자금 오용 가능성은 공공의 개입과 감독을 요구한다.
빅테크의 역할은 ‘디지털 역외 달러’의 향방을 가를 변수다. 2019년 메타의 리브라 프로젝트는 글로벌 결제 네트워크를 겨냥했으나 규제반발로 중단되었다. 반면 2023년 페이팔의 스테이블코인 출시는 전통 빅테크의 달러토큰 실험이 규제내 수용 경로를 찾고 있음을 보여준다. 만약 애플, 아마존, 알리페이 같은 초대형 결제 네트워크 발행사들이 규제 적합성과 은행·카드 네트워크와의 상호운용을 확보한다면, 이들은 유로달러 시대의 런던처럼 역외 달러의 새로운 조율자로 부상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스테이블코인은 유로달러의 기능을 디지털로 재현하면서도, 신용창출이 아닌 유동성 브리지라는 점에서 다른 동학을 갖는다. 규제 정합성과 준비자산의 투명성, 대형 결제네트워크의 참여 여부에 따라, 조율자의 좌석은 런던에서 빅테크·규제당국·은행연합으로 재편될 수 있다. 미국은 스왑라인과 FIMA로 백스톱을 제공하듯, 국채와 레포 시장을 통해 디지털 역외 달러의 기초자산을 공급하는 역할을 떠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달러 패권의 디지털 연장선이자, 공공 거버넌스 부담의 새로운 형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