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려야겠다 마음을 먹었으면 우선 주변의 아무거나 그리자. 그려야 시작된다. 그리고 나면 생각보다 내 실력은 정말 형편없다. 흔하게 우리가 그림을 잘 그린다고 얘기하는 부분에는 묘사를 잘한다는 말로 대체할 수 있다. 보통은 누가 봐도 형태가 있고 잘 묘사된 그림들을 그리고 싶어 한다. 묘사가 잘 된 그림을 그리려면 잘 그리는 훈련이 필요하다. 계속 망치면서 그림 실력을 쌓아나갈 수밖에 없다. 자유로운 느낌을 추구하는 그림도 마찬가지다. 느낌 따라 그린 다고 그렸는데 나중에 보면 엉망이다. 3살짜리 조카보다 못 그렸다 느껴지는 그림이다. 이런 것이 두려워 시작을 못하면 안 된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 우선 옆에 있는 아무 노트나 아무 연필이나 펜이나 잡고 우선 그리자. 재료를 사고 한참을 망설이면 결국 시작할 타이밍을 놓치게 된다. 마음을 먹는 그 순간에 시작을 하는 게 가장 좋다. 망쳐도 상관없다. 1년 뒤의 내 그림은 훌륭할 테니 라는 생각을 가지고 조금씩 서툰 그림들을 그리자.
그냥 하면 돼지 하는 생각으로
3살 된 조카가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종이컵으로 탑을 쌓는 놀이를 하다가 컵이 중심을 잃고 무너지면 20개의 컵 중 두세 개만 무너졌을 뿐인데도 기분이 상했는지 쌓아 올린 모든 컵을 손으로 발로 전부 쓰러트렸다. 자신이 애써 올린 컵이 무너지는 것을 보는 게 어지간히도 속상했었나 보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은 놀이를 하는데 또 컵이 무너졌다. 어린 고사리 같은 손으로 삐뚤삐뚤 쌓아 올린 컵은 쉽게 그리고 자주 무너진다. 근데 이날 컵이 무너지자 조카가 "다시 하면 돼지"라고 얘기를 했다. 그 순간의 감동이란. 당연하게 짜증을 내며 컵을 무너트릴 줄 알고 달래줄 심정으로 아이를 봤는데 너무 해맑게 넘어진 컵들을 다시 주으며 하는 그 말 한마디. 이 어린아이도 깨우친걸. 맞아 다시 하면 돼지. 내가 그동안 쌓아 올린 것들이 무너져도 다시 하면 그만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를 때
다시 시작하겠다 마음은 먹었는데 막막했다. 마음은 열정에 불타오르는데 당장 손에 잡히는 일거리가 없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우선 매일 산책하는 동네를 사진으로 찍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진을 보며 드로잉을 했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서 출발하자. 산책을 하며 드로잉으로 하면 괜찮겠다 싶은 것들을 찍었다. 매일 산책하니 그리는 것보다 찍어오는 사진이 더 많았다. 그래. 우선 매일 한두 장 이것들을 그리고 찍어서 올리자. 그냥 무작정 시작했다. 손이라도 풀고 있어야 다음으로 진행이 될 수 있다. 무작정 손 놓고 그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면 그 때라는 것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엉망인걸 알고 시작한다면 조금은 쉽다. 어차피 망칠 거고 마음에 들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해보자. 그래서일까? 매일 새롭게 그려지는 내 그림들이 좋다. 마음에 든다. 계속 매일 드로잉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지겨워진다. 조금씩의 변화도 줘보고 손에 더 맞는 재료들을 찾는다. 종이도 조금 더 커졌다. 그러다 문득 이제는 캔버스에 그려봐도 괜찮을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래전 사두고 계속되는 망설임에 캔버그에 붓질도 한번 하지 못했었는데. 캔버스로 그림을 옮겼다. 역시나 엉망이었다. 어차피 엉망일 거 알아서 그냥 계속 그렸다. 지금도 여전히 그리고 있다. 나는 내 그림이 마음에 든다. 어제보다 오늘의 그림이 더 좋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나가다 보면 한걸음 두 걸음 더 앞으로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도 나는 작업실에 간다. 그리고 그림을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