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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Aug 15. 2022

우리는 중첩자로 존재한다

이솝우화의 박쥐를 위한 변론


질문. 힘 있는 중간자는 가능한가?


드러난 다수는 선악이 명확한 하나의 진리를 주창하며 동류끼리 무리짓는 습성이 있다. 쉽게 규정되지 않는 기타 소수의 다양한 개성과 포착되지 않은 발현 가능성을 적대한다. 패거리를 이뤄 안전을 보장받고 집단으로 축적한 정보를 배타적으로 유하여 내 무리의 생존 우위를 독점하고자 한다. 다정한 것들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모두에게 다정했던 것은 저들끼리만 다정한 것들에 치여 살아남기 쉽지 않았다. 갑순이도 옳고 을순이도 옳고 부인도 옳소 했다는 황희 정승이나, 전란 중에도 당쟁 삼매경인 조정에서 양시양비론을 펼친 율곡이 과연 일화의 훈훈함만큼 실제로 평가받는지 의구스럽다. 중용(庸)을 중용(用)한 유교 윤리는 도덕책 밖에서 현실감을 잃는다. 중도의 길에 용감히 서서 어쩌면 숭상받을 수 있었을 이솝 우화 속 박쥐는 들짐승과 날짐승 양편으로부터 공히 배척당하고 변절의 심벌로 남았다. 불편부당한, 뛸 수도 날 수도 있는, 유니크한 다원 공감 능력은 단순한 피아식별을 요구하는 편 가르기 본능에 밀려 생존에 취약한 걸림돌이 된다. 뭉치거나 묻히거나, 숨기거나 삭이거나, 아주 가끔 외로운 늑대가 되어 자멸하거나, 아무리 의지를 굳힌다 해도 건설적인 선택지는 많지 않다.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용어로 같은 시간을 사는 모든 사람이 같은 시대를 사는 것은 아님을 설명했다.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 XY세대와 MZ세대, 디지털 세대와 버추얼 세대는 같은 유니버스 안에 있지만 각기 다른 메타버스를 살아간다. 실존이 다양하다면 인식도 다양해야 마땅해 보이는데, 호모 사피엔스의 본능은 방어가 우선이며 최선의 방어는 언제나 선공이기에 소속이 확실하지 않은 타인에 대한 경계심을 디폴트로 둔다. (호모 사피엔스의 homo의 어원이 라틴어는 사람, 그리스어는 같다의 뜻이라는 게 흥미롭다.) 이쪽 아니면 저쪽이고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이다. 그렇게 편이 갈리고 나면 상대적 우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반드시 역사가 동원된다.




우리는 역사적 인물을 영웅 아니면 악당으로 가른다. 역사적 사명을 부르짖는 자들이 가치중립적(이라고 잘못 믿어지는) 이름 없는 시민들(또는 민중, 국민, 백성, 민초..)을 들먹일 때는 순전히 과반을 차지하기 위한 명분이 필요할 때다. 중립은 없다. 중간은 배신의 낙인을 찍기 딱인 공간이다. 에드워드 카의 말대로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가 역사라면 그 끊임없음은 부단하고(constant) 반복적이며(repetitive) 연속적(continuous)일 순 있겠으나 중도적(moderate)이진 않아 보인다. ('끊임없는 대화'의 원문 표현은 'unending dialogue'이다.) 한편, 한번 위인의 반열에 올린 이를 재평가하기 위해선 때로 급격한 형세 전환이 필요하다.


삶은 논쟁적이다. 위인의 삶일수록 그렇다. 인류사에 남을 업적의 이면에는 반드시 그늘이 있다. 창의와 변혁의 아이콘으로 지금까지도 선망받고 있는 스티브 잡스는 이른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독선적이고 비합리적이었으며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즐겨 모욕감을 안겼다.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밝혀 영원히 교과서에 남은 노벨상 수상자 왓슨과 크릭은 위대한 과학자였으나 고결한 도덕군자는 아니었다. 로절린드 프랭클린의 X선 회절 사진을 가로챈 차치하더라도, 명백한 인종차별주의자로서 스스로를 증명했. (특히 제임스 듀이 왓슨은 말년에 흑인은 유전적으로 지능이 열등하다는 공개 망언으로 명예를 박탈당하고 노벨 메달을 팔아치우기도 했다.) 생명의 암호를 해독해낸 그는 영웅인가 악당인가?


핵분열의 힘을 활용한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로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고, 엔진의 효율을 개선한 유연 휘발유와 안전한 냉매 프레온 가스를 발명한 토머스 미즐리는 인류의 복지에 기여함과 동시에 환경 파괴의 차원의 문을 열었다. 예로운 노벨상의 상금도 생전에 다이너마이트 발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죽음의 상인' 알프레드 노벨의 대속금에서 출발했다. 이 선구적 천재들은 인류의 히어로인가 빌런인가?




룰루 밀러의 베스트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 등장하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과 루이 아가시의 이야기 역시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이들은 당대 저명한 생물학자들이었으며 각각 스탠퍼드대 총장과 하버드대의 존경받는 교수였다. 이들이 평생을 바친 연구는 인류의 지식에 이바지하였으나 또한 이들을 우생학의 길로 이끌었다. 찰스 다윈의 사촌 프랜시스 골턴이 창시한 우생학은 인종 개량이라는 명목으로 유럽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와 미국의 사회 부적격자 거세, 나치의 집단학살에 이르기까지 사회진화론이라는 그릇된 신념의 틀을 제공했다. 현대의 기준으로는 상상조차 힘든 반인륜적 사이비 이념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겐 자명한 '과학'으로 여겨졌다.


자, 이제 여기서 우리는 상당히 껄끄러운 논쟁적 주제와 맞닥뜨리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그때를 산 이들에게 지금의 잣대를 갖다 대는 것은 타당할까?


타당하다면, 어디까지 대는 것이 알맞을까?


우주에 변치 않는 보편적 절대 진리가 존재한다는 전제(예를 들어 '천부인권')에 바탕을 두면 위 질문의 답은 예스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절대적 틀을 살짝이라도 의심하게 되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진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그때도 그랬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그때를 살았다면 그 시대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사고를 할 수 있었을까? 과거를 미화하자는 것이 아니라 불편한 진실을 모른 척하기 쉽지 않다는 이야기다.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잘못된 지식이 뒤집히기 전까지, 좀 더 엄밀히 표현하자면 올바른 지식이 등장할 여건이 무르익기 전까지, 천동설을 믿은 이들에게 '절대 진리'를 부인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역사의 각 단계에 살았던 모든 인간이 21세기 현대인의 기준을 충족하못한다고 탓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도 여성과 노예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지금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신념들이 22세기에 구닥다리 취급을 받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오해를 피하기 위해 짧게 다시 정리해 보자. 얘기의 방점은 이제 '잣대'가 아니라 '그때'에 찍힌다. 잣대가 틀린 것이 아니라 적용의 폭이 고민이다. 너도 옳고 도 옳고의 동시적 상대성이 그때도 옳고 지금도 옳고의 통시적 상대성으로 확장된다. 그런 비열한 박쥐 같은 소리 하지도 말라고 간단히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불편한 진실은 부인해도 존재한다. 과연 우리는 불편하고 불안한 상대적 진리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위에 예시한 19세기 고생물학자 루이 아가시의 족적을 밟아보다가 스위스의 과거사 논쟁에 대한 한 기고를 읽게 되었다. 역사 바로 세우기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어서 유럽에서도 식민주의의 어두운 과거를 지우려는 시도들이 이 이루어진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람블라스 거리 끝에서 위압적인 높이로 대서양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관광명물 콜럼버스 상의 철거 논쟁이 대표적이다. (2016년 거의 철거될 뻔하다가 아직도 그대로인 것으로 알고 있다.) 스위스의 상징 알프스에는 스위스 태생인 루이 아가시의 이름을 기린 아가시 봉(Agassiz horn)이 있다. 인종차별주의자의 이름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청원이 지속적으로 올라오지만 "부정적 역사도 역사다"라는 이유로 기각되고 있다. 찬반 양 의견은 팽팽하다. 이름을 남겨도 지워도 누군가의 비난은 남는다. 흥미를 끈 건 기고자의 다음과 같은 표현이었다. "그 시대 사람들은 마치 외국인과도 같다."




대한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옥중 아들에게 "너의 죽음은 한 사람 것이 아닌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 것이다. 나라를 위해 딴맘 먹지 말고 죽어라!"하고 결기에 찬 편지를 보냈다. 안 의사는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는 유언을 남기고 의연히 순국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 하겠다. 그런데 그 안중근의 아들인 안준생은 30년 뒤 아버지가 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을 찾아가 고개 숙여 사죄한다. 이 어찌 된 일인가? 백범 김구가 민족 반역자라며 분노할 정도로 그의 친일 변절은 일견 이해할 수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안중근 의사의 아들인데 말이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1910년 고작 4살이었던 차남 안준생은 평생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 변변한 직업도 가지지 못하고 구걸로 연명하며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그런 그에게 1939년 조선 총독이 찾아와 안전과 생활보장을 약속했을 때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한 치의 고민도 없었을까? 6년만 더 참으면 해방이 될 거라는 미래를 가장 어두웠던 그때에 상상할 수 있었을까? 사실인지 모르겠으나 전언에 의하면 안준생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한다. "아버지는 민족의 영웅이지만 나는 우리 가족의 영웅이다."




위험한 지점에 도달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근현대사를 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특히 친일청산은 현재진행형의 문제다. 공교롭게 오늘이 광복절인데 특정 사건이나 시대를 염두에 두고 날 잡아 쓴 글은 아니다. 오랜 궁리해봐도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를 궁리하다 오늘이 됐을 뿐이다.


서두에 던진 질문은 이랬다.

힘 있는 중간자는 가능한가?


힘이라는 모호한 수식어구를 빼고 단순하게 가보자.

중간자는 가능한가?


다시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자.

중간이란 애초에 존재하는가? 어느 쪽과도 온전히 구별되는 별개의 중립지대가 과연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가?


글을 구상하면서 만들어낸 말이지만 '중간자'라는 지칭부터 오류였을 수 있다. 우리는 중간자가 아니라 '중첩자'로 존재한다. 단일대오를 이뤄 구별되고 일체된 삶을 사는 듯 보이지만 실상 우리 모두는 모두에 '걸쳐' 있다. 우리는 박쥐다. 이와 저의 모습을 조금씩 모두 지닌 박쥐다. 양시양비는 무책임한 궤변이 아니라 그 자체 실존의 모습이자 조건이다. E니 I니 마치 세상에 딱 두 부류의 사람들만 존재하는 것처럼 (재미삼아) MBTI를 따지더라도 불변하는 명확한 경계선 같은 게 있는 건 아니다. 이것 몇%, 저것 몇%, 변동 가능성을 내포한 확률의 파동이 섞여 있을 뿐이다.


물론 여러 얼굴을 가졌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을 피해 갈 핑계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출발점을 영점조정하는 것으로 문제의식을 바꿔볼 수는 있다. 갑작스러운 비약일지 모르겠으나 "변하지 않는 우주의 원리"는 바로 "변한다"는 사실임을 되새긴다면 영점조정이라는 귀결이 생뚱맞진 않다. 우리의 문제의식은 고착되지 고 끊임없이 조정돼야 한다. 삶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그에 맞춰 질문을 확장해가야 한다. 중간이라는 3차원 공간 개념에 시간축을 더해 중첩이라는 4차원 좌표로 확장하고 매일 다시금 새롭게 압축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완전히 만족스럽진 않더라도 오늘 질문은 오늘치만큼 바꿔야 한다.


질문. 그땐 맞고 지금은 틀리다.

          그럼, 내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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