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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Apr 30. 2022

니모와 말미잘

나다움을 찾아서


흰동가리의 대장은 엄마입니다. 가장 몸집이 큰 암컷이 말미잘 보금자리를 호령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우두머리 엄마 자리에 부재가 생기면 그다음 크기의 암컷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특별한 점은 그녀가 원래는 그였다는 사실입니다. 수컷으로 살던 녀석이 우두머리 암컷이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상황이 발생하면 성전환을 하는 겁니다. 그 아래로 서열을 따라 조금씩 몸집 작은 수컷들이 말미잘 사이사이에 숨어 눈치껏 차례를 기다리고 있지요. 시스템 상 리더의 유고 시 지정 생존자는 늘 존재합니다. 의외의 과정을 거칠 수도 있습니다만 누구 하나 없다고 세상이 갑자기 달라지는 일은 없습니다.


영국 속담에 "튼튼한 울타리가 좋은 이웃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만의 바운더리를 잘 지키는 것이 자신의 존재감을 살리일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초원 위 사자부터 숲 속 다람쥐까지 분비물과 암내를 묻혀가며 하루도 빠짐없이 영역 순찰의 수고를 멈추지 않는 것은 그래야 제 거소가 무연고가 아니며 엄연히 무고한 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기를 기라 하고 아닌 걸 아니라 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만, 때론 '그런' 것도 '아니오'라고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상대가 놀라서 기여 아니여? 내 쪽 선을 넘는 게 현명한 일일 한 번쯤 생각해보게 됩니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아닙니다. 도리어 자존감이 취약한 사람입니다. 스스로 자존하지 못하고 자신의 잘남을 비춰줄 상대를 찾아다닙니다. 신화 속 나르키소스가 그랬습니다. 앞을 못 보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이 미소년이 자신을 알지 못해야 오래 산다고 예언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나르키소스는 못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에 홀려 실체 잃은 미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나르시시스트는 항상 본인을 알아줄 거울을 필요로 합니다. "거울아 거울아"를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백설공주의 계모가 어딜 봐서 자존감이 높아 보이나요. 나를 높이는 데 남을 필요로 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항상 상대를 '타자화'합니다. 쉽게 말해 대상이 필요는 하지만 함께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언제라도 올라설 기회를 엿보며 정체성의 탈바꿈도 마다하지 않는 니모들에겐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하는 말미잘이 습니다. 누군가에게 해삼멍게말미잘이라고 불리는 건 놀림당하는 것임에 분명하지만 말미잘은 결코 바보똥개멍충이가 아닙니다. 말미잘의 영어 이름은 씨 아네모네 sea anemone 입니다. 신화 속 아름다운 아네모네 꽃은 시기와 질투, 배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말미잘도 다양한 생김새만큼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삽니다. 아무 생각 없이 한 곳에 붙어 한입으로 먹고 싸고 다 하는 것 같지만 잘못 건드리면 쏩니다. 정말 위급할 땐 공중으로 뛰어올라 격정적인 웨이브를 추며 탈출하는 묘기를 보이기도 합니다. 혹시 삶이 말미잘 같다고 느껴지나요? 괜찮습니다. 정상입니다. 비교하고 눈치 보고 자만하고 좌절하는 것 모두, 습관처럼 내 붙은 자리를 남에게 의존해왔기에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나는 나로 있는 것이 제일 나답습니다.


나다운 사람은 남이 남다운 것도 받아들일 줄 압니다. 서로의 고유한 영역을 존중할 줄 압니다. 수선화든 아네모네든 꽃은 남의 색깔을 탐하지 않습니다. 탓하지도 않습니다. 나의 색깔은 내가 내는 것입니다. 내 복은 내 선택이 불러옵니다. 나다움을 아네 모르네를 빨리 파악해야 속이 편안합니다. 니모를 찾으려면 니모 굴 속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세상이 있고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어서 세상이 있습니다. 내가 없는 세상을 고민하지 마세요. 잘 굴러갈 겁니다. 안 굴러간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내가 없는 세계는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바라보는 세계는 내 특유의 가치로 재단한 세계이며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내 고유한 의지와 감정이 투사된 것들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나의 가치를 발견하는 내가 있어줘야 비로소 나답게 존재합니다. 오늘도 매순간 나다우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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