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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Feb 07. 2022

월든, 투우, 그리고 케렌시아


한때 방송가에 힐링, 휴식, 개인의 행복을 코드로 한 비슷한 기획안이 유행처럼 돈 적이 있습니다. 휘게, 욜로, 워라벨, 소확행.. 비슷비슷한 신조어들 사이 소리 소문 없이 스며든 낯선 외래 단어가 하나 있었는데요.  


케렌시아.


복잡한 도시와 일상을 떠나 자연 속 나만의 시공간으로의 도피? 식? 거기에 살짝의 미니멀리즘? 뭐 그런 느낌으로 이해됐었던 것 같은데요, 박신혜 소지섭 씨가 등장한 <숲 속의 작은 집>이라는 프로가 나왔다 들어간 것도 이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케렌시아가 뜻하는 바는 정확히 무엇일까요?


글을 이어가기 전에 발음부터 잡고 가겠습니다. querencia는 스페인어입니다. 사람에 따라 퀘렌시아 케렌시아 카렌시아, 다양하게 부르지만 가능한 한 국어화해본다면 께렌시아가 가깝겠습니다. 스페인어에 ㅋ 발음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된소리 ㄲ 에 가깝습니다. 스페인에서 버거킹을 찾으려면 부르게낀을 불러야 합니다. 코리아 Korea가 아니라 꼬레아 Corea를 생각하면 쉽습니다. 모음 ue도 복모음 ㅞ  아니라 ㅔ 로 발음합니다. 필리핀 맥주 San Miguel은 산 미구엘이 아니라 산 미겔입니다. 그리하여 퀘렌시아는 진작에 탈락. 이하 글에선 께렌시아로 발음하고 쓰겠습니다.  


께렌시아 querencia의 사전적 의미는 애착입니다. 이 단어의 동사원형 querer는 '원하다'라는 뜻으로 자주 쓰이는 기본 동사입니다. 백지영 씨 노래 <내 귀에 캔디> 가사 중에 “떼 끼에로 Te quiero” 기억나시나요? 캔디처럼 귀에 착 감기던 그 닭살 멘트는 ‘널 원해’였던 것이지요. 자, 어원 이야기는 이만 하고 잠시 새소리, 물소리 들리는 책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월든:숲 속의 생활 (Walden;or, Life in the Woods)



헨리 데이비드 소로 (Henry David Thoreau)의 <월든>이 작년에 갑자기 뜬 건 기분 탓인가요 아님 이유가 있을까요? 코로나 여파일 수도, 출판사 전략일 수도 있겠으나 1854년에 쓴 책이 170년이 지난 지금도 '머스트'셀러 대우를 받는 걸 보면 뭔가 그럴만한 흐름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책. 읽어보신 분들 겠지만 월든이라는 호숫가에 작은 통나무 집 하나 짓고 자연인 생활을 한 소로 본인의 자전적 수필입니다. 역시 힐링과 휴식에 대한 이야기인 걸까요? 아니면 귀농..? 글쎄요, 자급자족한 건 맞는데 소로라는 인물이 유유자적하기만 한 스타일은 아니었던 것 같군요.  


소로가 월든에 지은 집 레플리카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파이터였습니다. 미국적 삶에 반기를 든 반골이었습니다. 서부 영토 팽창을 위해 미국이 멕시코와 벌인 전쟁을 불의로 보고 맞서다 투옥되기습니다.


 "국민이기 전에 인간입니다."
 "법이기 전에 정의와 양심입니다."


<월든>보다 먼저 쓴 책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에서 그가 던진 메시지입니다. 그의 비폭력 저항 사상은 마하트마 간디의 인도 독립운동 등 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옆 작은 마을 콩코드에 있는 연못 하나

월든에서의 삶도 스스로를 대상으로 한 하나의 실험이었습니다. 물질문명을 배척하고 생태주의를 주장하며 마을 근처 숲으로 들어가 딱 2년 2개월 2일 동안 자발적 고립 생활을 했습니다. 대자연의 광활한 호수처럼 그려지는 이미지와 달리 월든은 소로가 태어난 매사추세츠 주의 콩코드라는 작은 마을에 있는 둘레 4km짜리 못 pond입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찾고 해서 백사장도 넓히고 관광지처럼 됐다네요.


소로는 문명으로 돌아온 후로도 사유제와 노예제를 비판하는 등 절대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소로의 실천은 간디, 마틴 루터 킹 등 역사적 인물들에게뿐만 아니라 다양한 보통사람들에게도 전달되었습니다. 숀 펜이 제작 감독한 논픽션 영화 <인투 더 와일드 (Into the Wild)>에서 실존인물 크리스 맥캔들리스는 추운 알래스카의 버려진 버스 안에서 스물넷의 나이에 객(고독)사하면서도 마음속 깊이 <월든>을 품었습니다. 비록 죽기 전 마지막으로 새겨놓은 건 "Happiness only real when shared.(행복은 나눠야 진짜.)" 절절한 고백이었지만 말이죠.


죽은 뒤 그의 사진기에서 발견된 크리스 맥캔들리스의 셀카




투우와 께렌시아


퀘렌시아는 회복의 장소이다.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 힘들고 지쳤을 때 기운을 얻는 곳, 본연의 자기 자신에 가장 가까워지는 곳이다.


류시화 작가의 최근 베스트셀러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의 첫 단원입니다. 그는 2013년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미 이런 포스팅을 해놨습니다.  

"안전하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삶의 작은 영역. 명상 서적들에서는 퀘렌시아를 '인간의 내면세계에 있는 성소'라고 말한다.
......
언제 어디서나 진실한 자신이 될 수 있다면, 싸움을 멈추고 평화로움 속에 휴식할 수 있다면, 이 세상 전체가 나의 퀘렌시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2013.10.18  

     

평화로운 휴식의 장소로서 께렌시아를 활용하기를 즐겨한 작가는 투우 이야기를 꺼냅니다.  


투우장의 퀘렌시아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투우가 진행되는 동안 소는 어디가 자신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이며 숨을 고를 수 있는 자리인지를 살핀다. 그리고 그 장소를 자신의 퀘렌시아로 삼는다. 투우사는 소와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그 장소를 알아내어 소가 그곳으로 가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그리곤 소설가 헤밍웨이를 소환합니다.

  

투우를 이해하기 위해 수백 번 넘게 투우장을 드나든 헤밍웨이는 "퀘렌시아에 있을 때 소는 말할 수 없이 강해져서 쓰러뜨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라고 썼다.


께렌시아와 투우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혹시 우리도 둘 사이에서 유의미한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투우사 후안 델 라 팔마에게 조언 중인 헤밍웨이




쟁취: 싸웠기 때문에 따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와 투우의 관계는 단지 ‘이해하기 위해’라는 표현만으론 부족합니다. 헤밍웨이는 투우에 집착했습니다. 탐닉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부터 스페인 내전까지 제 발로 모험과 위험을 찾아다녔던 헤밍웨이는 당대 최고의 투우사들과 어울려 저 북부 나바라의 팜플로나부터 뜨거운 남쪽 안달루시아의 론다, 말라가까지 스페인 전역을 누볐습니다. 충동적이고 전투적인 그에게 불링은 생과 사가 처절한 핏빛으로 생생히 현현하는 실존의 사색장이었습니다. <The Sun Also Rises (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 1926)>부터 <Death in the Afternoon (오후의 죽음, 1932)>을 거쳐 유작이 된 <The Dangerous Summer (위험한 여름, 1960)>에 이르기까지 헤밍웨이 끊임없이 투우를 논하고 해석하고 종교의 차원으로 의식화했습니다. 특히 <오후의 죽음>에서 께렌시아를 정의하는 다음 대목은 흡사 류시화 작가가 옮겨 쓴 원본판 같습니다.


"A querencia is a place the bull naturally wants to go to in the ring, a preferred locality. It is a place which develops in the course of the fight where the bull makes his home. It does not usually show at once, but develops in his brain as the fight goes on. In this place he feels that he has his back against the wall and in his querencia he is inestimably more dangerous and almost impossible to kill."
"께렌시아는 투우 중 소가 자연스럽게 찾아내는 집 같은 장소입니다. 처음부터 단번에 보이진 않지만 싸움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머릿속에서 형성되어 갑니다. 그곳에 선 소는 자신의 등 뒤에 막다른 벽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이기 불가능할 정도로 매우 위험합니다. 그곳이 그의 께렌시아입니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오후의 죽음>


황소가 자신이 가장 강하다고 느끼는, 그래서 가장 애착을 갖는 께렌시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투우에 내재된 삶의 근원적 성찰로부터 풀어가야 합니다. 투우를 모르는 분한 분도 안 계시겠지만은, 여행책자에 나오는 전통놀이 정도로 이해하는 것과 실제 붉고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현장의 열기와 역동을 목도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아래 글을 통해 투우에 대한 상세설명과 실제 투우장의 모습을 참조한 뒤 이하를 읽으시면 도움 될 것 같습니다.)


https://brunch.co.kr/@ez1pd/26


우리에게 익숙한, 빨간 망토를 휘두르며 올레를 외치는 투우사(마타도르)는 경기의 하이라이트이긴 하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경기장의 진짜 주인공인 투우는 이미 수십 분 간 삐까도르와 반데리예로를 차례로 상대하며 기진맥진해진 상태입니다. 이제 투우는 마지막 상대 마타도르와 일대일 최후의 결전을 벌이기 위해 자신의 께렌시아에 버티고 서서 잔숨을 몰아쉽니다. 이 지점에서 ‘귀소’라는 형이상학적 의미가 께렌시아에 더해집니다. 투우는 여태껏 싸워왔고 드디어 마지막 결전을 목전에 뒀습니다. 마침내 마타도르와 대면하기까지 투우는 한 번도 쉬거나 물러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싸워왔기에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뒷걸음치지 않고 달렸기에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경기장 안에 인간들의 피신처는 따로 있습니다. '좁은 통로'라는 뜻의 까예혼 callejón 이 그곳입니다. 경기장 가장자리를 따라 관중석 펜스와의 사이에 띄엄띄엄 낮은 담벼락 같은  세워놓고는 위험하면 그 사이 좁은 틈으로 잽싸게 숨어들어갑니다.

 

callejón

인간은 여차하면 피했지만,

투우는 항상 아레나 가운데 있었습니다.


까예혼은 회피처지만,

께렌시아는 싸워서 얻은 쟁취처입니다.  


궂은 현실을 피해 희희낙락 안주하는 휴게의 장소가 아닙니다.

세상만사 잊고 여유만만 신선놀음하는 힐링의 시간이 아닙니다.




진력: 다했기 때문에 끝냈다.


께렌시아의 순간 소와 사람은 삶과 죽음을 두고 마지막 선택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소는 끝이 왔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런 소를 유능한 마타도르는 공감합니다. 그리고 관중의 환호를 유도합니다. 피날레까지 최선을 다해 싸워온 소를 위한 헌정입니다.


최고의 마타도르는 단 일격으로 끝을 니다. 그 일격으로 죽음의 문턱을 넘은 소는 깊은 곳에서부터 모든 것을 토해내며 쓰러집니다. 진을 다한 식은 육신이 경기장을 완전히 떠날 때까지 모든 관중들이 기립박수로 진혼 합니다. 만약 이 피날레가 한 번에 이뤄지않으 그날 투우장은 엄청난 비난과 야유로 뒤덮입니다. 


“삶과 죽음을,
이를테면 격렬한 죽음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전쟁이 끝난 오늘에 와서는 투우장뿐이다.”


헤밍웨이는 투우를 전쟁에 비유하여 인간이 가장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최소한의 위엄을 지키며 죽음을 초월하는 의지와 본능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죽음의 순간 끝까지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이는 곧 있는 힘을 다한 이입니다.


진력은 안간힘입니다.

진력은 전력투구입니다.

진력은 혼신의 힘을 쏟아부음입니다.


힐링을 위한 힐링은 정작 힐링이 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소로가 노동 없이 누워만 지냈다면 월든 호수는 모기떼를 위한 공양처 이상 아니었을 겁니다. 생전에 소로를 흠모한 법정스님은 월든 호수를 직접 찾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스님은 어떤 진실을 보았을까요? 평안을 얻기 전에 먼저 진력부터 다한 삶의 흔적을 발견하지 않았을까요?


법정스님의 무소유가 어떤 스님껜 소유였다지. 애초에 입구가 좁은 항아리는 비우는 것부터 힘이 듭니다. 정말 인생을 즐기고 현재에 충실하려면 번쩍거리는 곁다리들을 비워내고 본질에 집중하는 데에 힘을 다해야 합니다. 진정한 카르페 디엠은 단속적인 순간의 쾌락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깨닫는 삶의 희열입니다. 오 캡틴, 마이 캡틴!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에게 카르페 디엠의 가치를 배운 학생들은 학교 뒷산에 모여 <월든>의 한 구절을 읽습니다.  



내가 숲으로 간 이유는
사려 깊은 삶을 살면서 인생의 본질을 직면하고,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과연 배울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으며,
죽을 때가 돼서야 내가 진정한 삶을 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월든이 말해주는 진짜 께렌시아


울퉁불퉁한 맨흙바닥에 누워봐야 자갈이라도 골라진 바닥의 고름을 압니다. 습기를 흠뻑 머금은 깊은 숲 속에 갇혀보면 마른 평지 너머 지평선에 감사하게 됩니다.


현실과 직면하는 일상.

일상에 발을 디딘 이상.

그리고 모든 길을 완주하고 돌아온 안식처.

그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평안을 찾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습니다.


You've earned it.

'Cause you've burned it all.



우리가 깨어나는 날이야말로 비로소 새벽이 동트는 날이다.
앞으로 동터야 할 많은 날이 있다.
태양은 아침에 떠오르는 별일뿐이다.

- <월든>, 마지막 문장

Henry David Thoreau (1817 – 1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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