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원 Feb 06. 2022

투우 : 명과 암의 아레나

@팜플로나, 스페인


스페인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대표적인 풍물 중 하나는 투우일 것이다. 빨갛고 노란 스페인 국기처럼 정열의 이미지를 담아내기에 투우만 한 게 없다.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 도로변 언덕에서는 큼지막하게 버티고 선 대형 검정소 입간판이따금 만나게 된다.


삐까도르 picador 와 반데리예로 banderillero
마타도르 matador

투우 경기엔 세 단계의 투우사 그룹이 등장한다. 제일 먼저 삐까도르 picador. 갑옷 입은 말을 타고 나와 긴 창으로 혈기왕성한 소와 초반 기싸움을 벌인다. 삐까르 picar 동사의 뜻이 찌르다 이다. 두 번째 순서는 짧은 작살을 2개씩 소 등에 꽂으며 힘을 빼는 반데리예로 banderillero. 그렇게 몇십 분 성질을 건드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혈혈단신 소와 일대일 대결을 벌이는 주인공이 마타도르 matador  부르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투우사다. 이 모든 씬들은 마구잡이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 나름의 큐시트를 갖고 진행된다. 경기장 꼭대기에 자리 잡은 일종의 연출자가 있어서 전체적인 분위기와 흐름을 보면서 손수건을 걸어 다음 단계로의 진행을 지시 조율한다.


"다음 순서, 진행시켜!"

투우 경기가 열리는 시간은 하늘이 황색에서 핏빛으로 물들어가는 늦은 오후다. 자연스레 양지(sol)와 음지(somb) 자리가 나뉘는데 이베리아뜨겁기로 소문난 볕을 감안할 때 그늘지는 쪽이 더 비쌀 것은 당연하다. 양달과 응달 두 자리의 분위기는 판이하다. 비싼 응달석은 멤버십 연간회원권을 끊은 나이 지긋한 골수팬들이 차분히 경기를 분석하며 보는 느낌이라면, 사선으로 지는 해를 만면에 받는 양달석은 밴드가 나팔 불고 웃통 제친 술꾼들이 병나발  훌리건 스타일의 열광 도가니다.


투우라는 전통 풍습 자체명과 암이 나뉜다. 동물학대 논란은 스페인 내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바르셀로나가 속한 까딸루냐 지방에서는 (정치적 요인을 포함해서) 법적으로 투우가 금지된 지 꽤 됐다. 세비야나 론다처럼 투우의 전통이 강한 안달루시아 지방에서도 경기를 볼 수 있는 기간은 일 년 중 몇 주로 한정돼 있다. 나의 현장 경험은 북부 나바라 지방 팜플로나에서 매년 7월 초 열리는 전통 축제 산 페르민의 엔씨에로였는데, 이 지역은 노벨상 수상 소설어니스트 헤밍웨이를 유명한 투우광으로 만든 역사적 이기도 하다.


응달과 양달 (VIP석 vs B석)




백문이 불여일견이듯, 사진으로 보고 책으로 읽은 것과 육안으로 현장을 목도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직접 들어선 투우장에서 오감으로 감각한 현장뜻밖의 양가적 감정을 강렬히 선사했다. 동물을 좋아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누가 안 그러겠냐만) 마음이 불편해지는 광경임은 분명한데, 오랜 세월 전통을 지켜이곳 주민들에겐 지극히 통상적인 장면이라는 바로 곁에서 확인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이 낯설. 나이 든 장년들은 그렇다 쳐도 어린 꼬마들까지 온 가족이 나들이 나와 우리네 프로야구 응원하듯 환호하며 즐기는 풍광이  충격적이었다. 남의 나라 전통에 이방인의 잣대를 들이대 문화의 상대성이니 다양성이니 어려운 기들을 끄집어내지 않더라 난감한 작업다. 이럴 때면 약방의 감초처럼 항상 등장하는 과거 어느 불란서 여배우의 개고기 발언을 들먹이지 않아타문화에 대한 성급한 재단은 위험하다. 심지어 현대동물권 감수성으로는 위 예시를 역지사지 삼는 자체가 시대착오적일지모르겠다. 어쨌거나 단순히 옳다 그르다 이분법으로 딱 잘라 판단하기는 힘든 문제임은 틀림없다.


여기에논쟁적 사례를 확대하기 시작하면 명확한 선을 긋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중국 3대 진미라는 샥스핀의 수요를 채우기 위해 지느러미만 잘린 채 기되는 수만 마리 상어들의 비극. 3000년 역사라는 이탈리아의 전통 참치잡이 '마탄자'의 살육 현장. 매년 여름 페로 제도에서 행해지는 고래 도살 축제 '그라인다드랍'. 어떤 것이 문화이고 어떤 것이 생업이며 어떤 것부터 기호이고 탐욕인가? 어떤 것은 인도적이고 어떤 것은 야만적인가? 지켜나갈 가치가 있는 전통의 자격은 몇 년짜리 역사부터 부여해 합리적이려나?


살생이 문제의 본질인가? 그럼 서유럽식 투우가 아니면 아시아식 투견, 투계 정도는 수용 가능한가? 청도 소싸움은 누구를 위한 싸움인가? 화천 산천어 축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과천 경마공원 편할까? 동물과 가축이 다르고 반려와 식용이 다른 건가? 용도에 따라, 계통진화 정도에 따라 기준을 차등 적용하면 되는 일인가? 그렇다면 의료용으로 인간 장기를 품은 돼지는 어떻게 봐야 하며, 달팽이 점액을 뽑아 토끼 안구에 실험한 화장품은 어떻게 써야 하나? 동물윤리에 저촉되는 일은 모두 반대하면 간단할까? 그러다 인간윤리를 앞세워야 할 상황이 뉴스 속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내 가족에게 닥치면 그때도 결백할 수 있까? 어려운 문제다. 고민해야 하는 문제다. 일방적 결론으로는 해결이 나지 않을 문제다.




만약 투우장관중들이 로마 콜로세움의 폭도들처럼 피에 취해 미쳐 날뛰고 끝났다면 차라리 내적 갈등이 덜했을 것이다. 그런데, 경기가 끝난 뒤의 묘한 분위기가 또 다른 충격으로 다가왔다. 소와의 영적 교감이라고 해야 하나? 그 아이러니를 어떻게 묘사해야 적당할지. 훌륭한 투우사일수록 소의 고통을 최소화시킨다. 아니, 반대로 말하는 게 맞겠다. 단번에 숨통을 끊는 투우사여야 인정 받는다. 마타도르의 마지막 의무는 함께 목숨을 걸고 정면승부를 펼친 소에 대한 리스펙트의 피니시다. 앞서 붉은 물레따를 현란하게 휘두르며 멋진 퍼포먼스를 아무리 많이 였다 도 마지막 일격에 실패한 투우사는 엄청난 야유를 감수해야 한다. 진이 빠져 무릎을 꿇었는데 다시 일어나는 소도 있다. 관중들의 경의는 이럴 때 투우사가 아니라 소를 향한다. 끝내 쓰러진 소가 경기장에서 실려 나가는 최후의 순간까지 전원 기립하여 예우를 갖추는 모습은 예상치 못한 면모였다.  지점에서 투우는 단순한 오락거리가 아니라 하나의 리추얼, 제의가 되었다.


투우를  보라면 보겠는가? 잘 모르겠다. 한 번으로 족한 것 같다. 투우는 사라져야 할 악습인가? 잘 모르겠다. 현장을 알게 된 후 도리어 생각이 복잡해다. 완벽한 답은 완벽한 비건들만이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단, 완벽히 완벽하다면.


La Plaza de Toros @Ronda, Andalucía


매거진의 이전글 가우디의 도시 : 하지만 그는 행복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