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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Feb 05. 2022

가우디의 도시 : 하지만 그는 행복했을까?

@바르셀로나, 스페인


볼거리도 많고 이런저런 미사여구도 풍족한 지중해 도시 바르셀로나. 새파란 하늘 아래 빛나는 이 도시 앞에 가장 많이 수식어 중 하나는 아마도 '가우디의 도시'일 것이다.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연간 삼천만 명이 넘는다는 어마어마한 수의 방문객 중에서 가우디의 작품을 한 가지도 안 보고 떠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여기가우디, 저기도 가우디, 백 년 동안 바르셀로나를 먹여 살리고 있는 천재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í, 1852-1926).


사실 바르셀로나를 처음 방문한 사람에겐 가우디 작품 일순만으로 웬만큼 무난한 투어가 되한다.


Lampposts,1878 @Plaça Reial

1. 이알 광장 가스 가로등


대학생 가우디의 첫 작품.

바르셀로나 시에서 주최한 가로등 공모전에 당당히 당선.  하지만 고작 가로등인데 헤르메스의 투구까지 씌우는 최강 디테일의 작품 정신 고집하는 바람에 박리다매 대량생산 오더를 집행해야 하는 담당 공무원 입장에선 ㅎㄷㄷ. 타산이 안 맞아 주문을 무르자 빡친 가우디는 이후 시에서 시키는 일은 절대 안 했다 함.



Casa Batlló, 1904-1906 @Passeig de Gràcia, Eixample

2. 까사 바뜨요


부자 직물 업자 바뜨요네 집이라 까사 바뜨요. 바뜨요 패밀리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집을 고 싶어서 가우디를 초빙. 공룡 등껍질 같은 지붕과 해골과 뼈다귀를 닮은 기둥들은 수호성인 산 조르디가 용을 무찌른 전설을 표현. 파란색 깨진 타일들이 눈부시게 반짝이는 벽면은 푸른 지중해를 상징. 마주 보는 까사 밀라는 산, 까사 바뜨요는 바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하모니.



Casa Milà (La Pedrera), 1906-1910 @92, Passeig de Gràcia

3. 라 뻬드레라(La Pedrera)

a.k.a. 까사 밀라


부자 기업가 밀라네 집이라 까사 밀라. 이곳에선 채석장이란 뜻의 라 뻬드레라로 더 많이 불림. 채석장이란 말처럼 신성한 돌산 몬세랏을 통째로 깎아놓은 듯한 자연주의. 돌인데도 물결치듯 유려한 라스의 곡선. 지붕에 올라가면 다스베이더 마스크를 닮은 희한한 굴뚝들의 별천지. 놀라운 건 엄연히 주민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란 사실.



그러나 나는 이쯤에서

인간 가우디에 대해 좀 다른 조망을 시도하고자 한다. 천재다 멋있다 대단하다 듣기에  좋아도, 가우디 인생 또한 말 못 할 속사정이 없지 않았으리라.




소년 가우디는 종합병동이었다.

온갖 질병에 시달렸고 심한 류머티즘을 앓았다. 심신이 병약한 탓에 사람보다 자연을 상대하는 게 편했고 점점 말없고 방어적인 소년이 되었다. 몸이 좋아질 거란 믿음에 평생 철저한 채식주의자로 살았다. 하지만 좋아진 건 없었다. 종교적 소신으로 금식도 여러 차례 반복했다. 한 번에 40일을 금식한 적도 있었다. 그럴수록 병세 더 악화되었다. 소년은 점점 더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갔다.


청년 가우디는 모태솔로였다.

여자를 몰랐다. 일밖에 몰랐다. 평생 딱 한번, 서른두 살 때 조세파 모레우(Josefa Moreu)라는 여교사에게 반했는데, 하필 유부녀였다. 뭔 집념인지 그녀가 이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용기를 내 고백도 했건만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연애엔 영 젬병이었다. 절망한 가우디는 종교를 도피처로 삼았다. 신에게 귀의할수록 다친 마음은 점점 더 닫혀갔다. 사교적이지 못한 그를 주위에선 퉁명스럽고 거만한 인간이라고 욕했다. 30살이나 어린 새카만 후배 피카소한테선 "지옥에나 가라고 그래"라는 막말까지 들었다. 그의 심정을 이해해준 건 몇 안 되는 친구들뿐이었다. 평생 후원자 유세비 구엘(Eusebi Güell)이 그중 한 명이었다.


Park Güell, 1900-1914 @Carmel Hill, Gràcia

4. 구엘 공원


바르셀로나 시내를 굽어보는 북쪽 돌 언덕에 위치한 구엘공원은 원래 공원이 아니라 일종의 계획 신도시였다. 자연과 함께 사는 유토피아 마을을 구현하고자 했던 가우디와 구엘의 꿈은 그러나 대거 미분양 사태로 산산조각이 나고. 새옹지마랄까 덕분에 지금은 모든 사람을 위한 휴식 공간이 되었으니 오히려 다행이려나. 유명한 타일 도롱뇽부터 헨젤과 그레텔 과자집을 닮은 아기자기한 건물들까지 웬만하면 아침 일찍 가보시길 추천합니다.



독거노인 가우디는 거리에서 사 했다.

1926년 6월 7일 오후 6시, 노년의 가우디는 기거하던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공사장에서 나와 산펠립네리 성당까지 제법 먼 산책길에 나섰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그는 테투안 광장을 지나 4차선 대로를 건너다 달려오던 30번 트램에 치였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노인을 도와주는 행인은 아무도 없었다. 가우디는 평소에도 신분증 없이 다 헤진 거지꼴로 다녔다. 사람들은 그를 노숙자로 오해하고 그대로 방치해두었다. 몇 시간 뒤에 경찰이 와서야 겨우 병원으로 실려갔고 그다음 날에야 교통사고를 당한 거지가 가우디임이 확인됐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사흘 뒤인 6월 10일 가우디는 전재산을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기부할 것과 장례행렬을 만들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평생 갈구하던 신의 곁으로 떠나갔다. 그의 나이 일흔 넷이었다. 사람들은 가우디의 두 번째 유언만큼은 지키지 않았다. 장례식 날 병원에서 성당까지 그의 관을 따르는 행렬이 바르셀로나 시가지를 가득 메웠다.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애도문이 실렸다.

 바르셀로나의 성자가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돌마저도 그를 위해 울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꼰대였던 꼰대는 없다.

왠지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그가 먼저 사람들을 멀리 했다고 하지만 누구보다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산 건 가우디 본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도 자신의 삶이 만족스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먼저 다가가고 싶어도 다가가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 몇 번씩 주저하던 끝에 어쩌다 겨우 용기 내 내민 거친 손, 서툰 말투는 상대에게 불친절함과 퉁명스러움으로 오해받았가능성이 높다. 그런 경우 몇 번 겪고 나면 다시는 먼저 손을 내밀지 않으리라 마음속 깊이 맹세하게 다. 결국 진심을 입증하유일한 신에게 위임받은 일을 열심히 하는 밖에 없다고 믿었을 것이다. 열심히 일할수록 천재 소리를 들었겠지만 그 소리가 죽을 때까지 그를 옭아맨 족쇄가 됐을지도 모른다.  


가우디의 속마음은 너무도 따뜻하고 여려서, 그래서 억울한 마음에 고집불통이 됐을 거란 상상이, 나는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 주변에도 따뜻한 애정을 적절히 표현할 줄 모르는, 그래서 꼰대가 돼버린 선배, 아버지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내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


만약에 가우디가 잠시 일손을 놓고 남태평양 어느 아름다운 섬으로 훌쩍 휴가라도 떠났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어차피 생전에 다 짓지도 못할 건물이었는데...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성당만 생각하다 간 가우디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지하 한편에 누워 늘도 없이 객들을 맞을 뿐이다.

 

Antoni Gaudí, 1852-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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