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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Nov 18. 2022

호날두는 꼰대인 걸까

자존심 vs 자존감

카타르 월드컵을 앞두고 호날두의  인터뷰가 또 화제가 되었다. 물론 안 좋은 뉘앙스로.


얘기인즉슨, 


옛 맨유 동료 루니를 험담하고

"제가 잘 생겨서 질투하나 보죠. 사실이기도 하고요"


현 맨유의 젊은 선수들을 폄하하며

"요즘 친구들은 간절함이 없어요. 뭐든 쉽게 얻으려 하죠"


자존심 대결에 미러링을 사용하여 

"감독은 나를 존중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그를 존중하지 않는다"


늘 떨던 잘난 체를 또 떤 건데. 


그래서 구단에서도 에라이 골칫덩어리, 

스타디움에 붙은 그의 대형 걸개 사진을 뜯어냈더라 뭐 그런 내용. 

(결국 방출당해 현재 무소속..)


워낙 이쪽 망가 데다

일전에 노쇼 사건으로 '호날강두'라는 기가 막힌 라임의 애칭까지 선사받고 

어쩌다 국내팬들의 애증의 대상이 된 슈퍼스타넋두리에 

그저 피식- 웃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 


근데 이거,


나이를 먹으니 공감력이 증대되고 포용력이 넓어진 건지,

호르몬 변화가 갱년기를 앞당기려는 건지,


가시 돋힌 냉소 아래 희미하게 깔린 어떠한 맥락의 아지랑이가

신기루처럼 아른거려 잠시 흠칫,

했다.


뛰어난 능력의 잘난 인간이

겸양까지 갖췄다면야

금상첨화겠으나,


그 뾰로통한 호우주의보가

언뜻 딱해 보이기도 하는 

위험한 시츄에이션..?


자칫했다간 호의가 둘리 되기 십상이요, 

비호감 두둔하는 본새론 본전도  건질 터이,

불필요한 오해는 잽싸게 피해 가련다.


아재와 아해 중 어느쪽을 두둔하는 썰?

다.


메시와 호날두 중 어느쪽을 선호하는 썰?

역시 아니다.


꼰대에 대한 일반적 정의를

좀 다른 접근으로 꼬아보려는 시도.


라떼와 지위로 나누는 '물리적 꼰대' 말고

배움의 성장판이 닫힌 '심리적 꼰대'야말로

진정한 꼰대라는 정의.


X고 Y고,

M이고 Z고,

꼰대를 만드는 건


도식적으로 일괄 할당된 스테레오타입이 아니라

맨바이맨, 사람 그 자체라는 생각.


변할 용기가 없는.

관성에서 벗어날 준비가 안 된.

호혜나 정반합의 가치에 문을 걸어 잠근.

꽉 닫힌 상태 자체가 바로 꼰대 아닐까 라는 자문.


그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가치관? 인생관? 선후천적으로 주어지고 길러내진 그릇의 크기?


 반 컵을 긍정으로 읽느냐 부정으로 읽느냐 류의 관점 차이?


위기가 곧 기회라는 소리, 말로는 많이들 하는데,


위기랑 기회란 놈들 둘이서 각기 따로 찾아오는 게 아니라

똑같은 놈 하나를 두고 마다 멋대로 해석하는 거라는,


언제나 자신을 중심에 두는 편협한 시선과

완벽을 추구하는 불완전한 실존

꼰대를 꼬아내는 결정적 차이,

라는 결론.


적절한 비유로 인정받을진 모르겠지만

-알아보려면 던져볼 밖에-


단순 인지를 뛰어넘는 메타인지의 영역을 가꾸지 못한다면 안타깝게도 그는 꼰대,

라고 이 정의에선 정의 내린다.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 생김새를 평하고,

1+1=3의 시너지 썸 대신 1-1=0의 제로갇히며,

맥락의 why보다 당장의 what목숨 거는, 

너 죽고 나 죽자는 치킨게임의 무한 반복.


지위고하 막론, 새로움의 안테나를 바짝 올리고

 것을 빼앗길까 전전긍긍 없이 

배움의 스펀지를 흠뻑 적실 준비가 되어있다면, 


불만 보따리를 끌어안고 안주한 채 

꼬투리잡기안줏거리 삼사람보다

꼰대스럽지 않을까?


무엇이 많고 적고, 높고 낮고, 세고 약하고, 

그런  따지지 말고 말이다.


나로선,

단연코 말할 수 있다.


듣기  소리 약으로 

문제를 부각하기보다 해결모색하이라면

꼰대의 자존심 대신 삶의 자존감 줄 아는 사람이라고.

왜냐면,

우리 삶은 한 번뿐이.


워라밸 소확행 휘게 휘게 -아차, 두 번 반복은 휘바 휘바던가-,

시대 따라 유행 따라 무슨 용어가 새로 튀어나오든 간에,


"나중을 위해 지금을 희생"하라거나 

"전체를 위해 개인을 접어"두라는 식의

케케묵은 이데올로기는 "무조건 타파!"하라,

또 다른 케케묵은 번역 또한 타파,


스스로의 우주를 찾고 결단자아.

 정신 또한 공유할 줄 아는 시선이라면

 괜찮지 않을?


다시 말하지만, 


그건 내 인생이니까.

딱 한 번 뿐이니까.


원한 적 없었지만 주어졌고,

좋으나 싫으나 숨 쉬고 있는 중이니까.


이왕이면 주홍글씨보다

다홍치마니까.


남을 탓하지 않아도

나한테 떳떳하니까.


완료형인 성공보다

진행형인 성장이 더 짜릿하니까.


나카지마 아츠시는 산월기에서

'겁 많은 자존심'과 '존대한 수치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


인생은 아무것도 이루지 않기에는 너무도 길지만
무언가를 이루기에는 너무도 짧은 것이라고
입으로는 경구를 읊조리면서,

사실은 자신의 부족한 재능이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비겁한 두려움과
고심을 싫어하는 게으름이
나의 모든 것이었던 게지.



싸우지들 말고

매너와 페어플레이가 넘쳐나는

멋진 월드컵을 기원하며,


이하  데 또 꼬아본

호날두스런 댓구

썰을 마쳐본다.



자존심은 고,

자존감은 한다.


자존심은 경쟁하고,

자존감은 포용한다.


자존심은 깎아 내리고, 

자존감은 세워 올린다.


꼰대는,

 사이에 껴 있다.



(결국 호날두는 아무래두 꼰대였던 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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