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이 밝았다. 덕담과 신년사와 새해 첫둥이 탄생 기사가 반긴다. 디지털 연하장에는 토끼가 한복을 입고 세배를 하고 있다. 엄밀하겐 음력설이 지나야 띠가 바뀔 텐데 남보다 늦는 게 싫은 사람들은 일찌감치 간지(干支)를 소환한다. 올해는 계묘년(癸卯年), 검은 토끼의 해란다. (닭 계鷄, 고양이 묘猫 아님 주의)
검은 고양이는 많이 봤어도 검은 토끼는 개인적으로 많이 못 본 것 같다. 작고 귀여운 깜장 토끼라니, 생각만 해도 깜찍하다. 까만 반려토끼를 키우는 분도 분명 계시겠다. 위 사진 속 아이는 광주시 한 동물원에서 찍힌 눈밭 위 토끼라는데, 야생이었다면 눈에 재깍 띄어 제일 먼저 도태됐을 상이다. 옥토끼든 재토끼든 다들 무고 무탈하길 빈다.
근데,
언제부터 띠에 색깔이 들어가기 시작했지? 어릴 때 기억엔 십이지 따라 그냥 동물만 바뀌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언제부터 백말이니 황금돼지니 색 있는 동물들이 등장한 거야? 그러고 보니 (이제 작년이 된) 2022년은 임인년(壬寅年), 검은 호랑이의 해였다. 어라, 검은색은 안 바뀌었네?
궁금해진다.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12支 열두 동물은 알겠는데,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10干은 각각 무슨 색들을 나타내는 건지?
오방색(五方色)이란 게 있다. 들어봤을 거다. 옛날 어느 대통령 취임식에 오방색 주머니가 걸려 앞날이 길하길 축원했더랬다. 청(파랑)적(빨강)황(노랑)백(하양) 흑(검정) 다섯 가지 색이다.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오행에서 나왔다.
오곡밥도 있다. 곧 다가올 정월대보름에 먹게 될 잡곡밥이다. 흰 찹쌀, 검정콩에다가 어디는 노란 조, 수수, 붉은팥을 넣는다 하고 어디선 청색 조, 붉은 기장, 노란 보리라 하는데, 뭐든 골고루 먹으면 몸에 좋을 것 같다.
청적황백흑.
입에 붙도록 반복해서 몇 번 읊어보자. 이 5색이 10간에 차례로 대응하는 것이다. 10을 5로 나눠야 하니 둘씩 묶여 갑을-청병정-적무기-황경신-백 임계-흑이 된다.
이제 우리도 10간과 12지를 합쳐 60갑자 '색동물띠'를 다 만들어낼 수 있다! 임진(壬辰)왜란은 검은 용의 해였고 병자(丙子)호란은 빨간 쥐의 해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 언뜻 역사와 전통이 유구해 보이는 이 동물색 따지기가 실상은 얼마 되지도 않은 상술이었단다. 고려시대도 조선시대도 아니고 불과 1990년(庚午年)에 "백말띠 여자는 드세다"는 근거 없는 속설과 함께 등장해서 "황금돼지띠는 금전운이 좋다"는 둥 온갖 꿈보다 해몽을 붙여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정착 돼버렸다는 것이다.
사실 오행은 나무(木), 불(火), 흙(土), 쇠(金), 물(水)의 다섯 가지 기운으로 우주 만물과 그 변화를 설명하려는 동양철학의 오랜 시도였다.
목화토금수. 얘도 입에 붙도록 한번 외워보자.
오행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데
목화토금수 차례로 가보면,
나무에서 불이 나고 →
불이 나면 재(흙)가 생기고 →
흙이 뭉쳐 쇠가 되며 →
쇠에서 물이 맺혀 →
그 물이 다시 나무를 키우니
이를 상생한다고 한다.
반대로 하나씩 건너뛰면,
나무는 흙을 먹고 ↔
흙은 물을 가두고 ↔
물은 불을 끄고 ↔
불은 쇠를 녹이며 ↔
쇠는 나무를 베니
이는 상극이라고 한다.
청적황백흑
목화토금수.
오, 왠지 어디 가서 아는 척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왕 입에 붙인 거 하나만 더 욕심내 보자.
오방색에 방(方)이라는 글자가 붙은 이유는 오행이 방위도 나타내기 때문이다. 파랑은 동쪽, 빨강은 남쪽, 노랑은 중앙, 하양은 서쪽, 검정은 북쪽.
청적황백흑
목화토금수
동남중서북.
한번 더.
청적황백흑
목화토금수
동남중서북.
총정리.
청 목 동 갑을 적 화 남 병정 황 토 중 무기 백 금 서 경신 흑 수 북 임계
우와.
검은 토끼 따라갔다가 갑자기 오행굴에 빠져 육십갑자 나라의 앨리스가 돼서 똑똑해져 돌아왔다.
물론, 오행으로 설명하는 게 이것밖에 없을 리가 없다. 인의예지신에서 오장육부까지아무렴 우주만물을 죄 설명한다는데. 새해 첫날부터 무리하면 골 아프니 사주풀이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오늘은 예 정도에서 마치는 게 좋겠다.
마치기 전에 하나만.
다음 계묘년엔 검은 토끼가 어느 북쪽 깊은 산속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는 옹달샘 토끼로 캐릭터 진화해서 돌아오지 않을까?
ps. 내친김에.
내년은 2024년 갑진년(甲辰年)이다. 갑은파란색, 진은 용이니까 청룡의 해 되겠다. 참고로 모든 갑○년은 맨 끝자리 수가 항상 4로 끝난다. 갑자사화1504 갑신정변1884 갑오경장1894. 그럼 내년에 갑이 돼서 다시 뵙자. 해피 뉴 토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