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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Jan 11. 2023

《신의 구부러진 선》 속 신화와 문학

넷플릭스 영화


《신의 구부러진 선》

《Los Renglones torcidos de Dios》


제목

'선'이라고 번역된 스페인어 renglón은 글이나 문서의 '한 줄, 단락'에 해당하는 의미로, 영어의 line보다는 row에 가까운 단어다. 1차원의 선이라기보다 2차원 이상의 면적을 갖는다고 할까. 동사 torcer도 '꼬다, 비틀다'의 심상이 강한 것이, 우리말 번역 제목은 부드럽게 휜 곡선 느낌을 주지만 그보다는 극 중 조현병 환자가 써 보낸 편지처럼 삐뚤빼뚤 각진 덩어리느낌이 난다. 따라서 제목을 <신이 쓴 비뚤어진 문장들>로 바꿔 읽어본다. (물론 단어의 의미는 사용자에 따라 상대적이다.)


제목을 이같이 읽고 나면 영화에 상당히 문학적인 옷이 덧입힌다. 신의 문장이라.. 결국, 신화인가? 스릴러라는 장르적 특성상 플롯과 장치에 유념한 영화평들은 많이 검색된다. 스토리 평가는 그분들께 맡기고, 이 글에선 숨은 함의를 파악해보고자 한다. 줄거리를 소개하진 않겠지만 아직 본작을 안 본 분께는 확실한 스포일러가 될 테니 여기서 멈추시기 바란다. 다만 이미 시청이 끝난 분들껜 또 다른 종류의 해석 재미를 드릴는지도 모르겠다.



주의 : 이하 글엔 스포가 포함돼 있으며 불친절합니다.



신화

신의 문학은 신화일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사립탐정 알리스이지만 비밀의 열쇠는 쌍둥이 형제 로물로와 레모가 쥐고 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로마 건국신화의 등장인물들이다. 어려서 버려져 늑대 젖을 먹고 자라 고대 로마의 초석이 되었다. 여기에 첫 번째 단서가 있다. 로마라는 지명은 로물루스에서 따온 것이다. 그럼 레무스는 어디로 갔나? 로물루스가 죽였다. 도시를 세울 자리를 두고 형제가 다투었고, 형 로물루스가 동생 레무스를 돌로 쳐 죽였다. 여기에 신화의 층이 한 겹 더 입혀진다.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살인자 카인. 신의 사랑을 두고 질투에 휩싸인 카인은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였다. 자신들의 선조 이야기를 창세기에 빗대 창조해 낸 로마인과 그 로마신화를 끌고 온 영화. 우연일까? 영화 속 형제들은 서로 싸우진 않지만, 적극적인 흉내쟁이 로물로와 달리 말 못 하는 레모는 매우 수동적이다. 자세히 관찰하면 수풀 속에 지어놓은 로물로의 아지트에 이른바 여동생은 초대돼도 레모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에선 형이 직접 죽이지 않지만 동생을 죽게 만드는 단초를 제공한다. 형은 동생을 지우고 싶었을까? 둘 중 누가 진짜 살아남았을까? 혹시 애초에 둘이 아니었던 건 아니었을까? 배우는 사무엘 솔레르 Samuel Soler, 단 한 명이다.



로물루스는 여주인공 알리스 굴드 Alice Gould 를 엄마라고 부른다. 굴드라는 성(姓)이 스페인스럽지 않다. 굴드 Gould 는 고대 잉글랜드 앵글로-색슨 족의 성으로서 '금(gold)의 자식'이라는 뜻이다. 알리스는 의사와의 면접에서 자신의 아버지는 영국인이라고 말한다. 굳이 말하면 혈통이 반반 섞였다는 얘기다. 로마신화 속 로물루스 형제의 부모도 신과 인간 반반이었다. 어머니 레아 실비아는 여사제, 아버지는 전쟁의 신 마르스다.


굴드라는 성을 따라 캐나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 Glenn Gould 까지 찾아가면 오버일까? 피아노 천재였던 그도, '미친' 사람으로 여겨졌다.


1955년 굴드가 녹음을 위해 뉴욕의 한 스튜디오에 나타났을 때의 일화는 유명하다. 다소 덥게 느껴지는 6월의 날씨임에도 굴드는 외투를 입고 머플러를 둘렀으며 베레모에 장갑을 끼고 있었다. 또 뉴욕의 물은 믿을 게 못된다며 캐나다에서 직접 생수 2병과 알약이 든 약병 5개를 가져왔고, 보통의 피아노 의자보다 낮은 흔들거리는 접이의자까지 들고 왔다. 그는 또 연주가 시작되기 20분 전에 뜨거운 물에 두 손을 담그고 자신이 가져온 큰 타올로 손을 닦았다. 녹음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음악에 완전히 몰입하여 입을 벌리고 음악을 따라 부르거나 몸을 앞뒤로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했다. 때로는 지휘를 하듯 손을 내저으며 춤을 추기도 했다. 이러한 기묘한 그의 모습은 연속 스틸사진으로 기록되어 이 음반의 표지로 쓰였다. 그리고 이 음반은 음악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음반 중 하나가 되었고, 발매 당시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했다. 군중을 두려워하고 대중 앞에 나서기를 끔찍이도 싫어했던 굴드는 캐나다에 은거하다 1982년 5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글렌 굴드 [Glenn Gould]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소설이든 영화든 서구 작품에서 그리스로마신화가 참조되는 건 흔한 일이다. 오이디푸스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부터 《스타워즈》의 "아이 엠 유어 파더"까지 곳곳에서 원용되었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에 뿌리를 두고 있는 유럽 문화권 관람자들에겐 이 영화가 확연히 다른 정서로 감상될 것이다.



문학

이 영화가 스페인 작품이라는 점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저 유명한 고전 《만차 마을의 기발한 시골기사 돈 끼호떼(이하 돈끼호떼)》를 소환하게 한다. 고향을 떠난 돈끼호떼에겐 기사에 어울리는 성(城)이 필요하다. 정체성을 든든히 받쳐줄 캐슬을 두어야 창을 꼬아 잡고 필드로 나설 수 있다. 알리스에게도 부유한 사립탐정이라는 성이 필요했다. 수사를 한다는 명분 안에 완벽히 숨을 수 있기에 그녀는 미친 사람들 틈에서 안정적으로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풍차가 악마로 보이고 작부를 성녀로 여기는 돈끼호떼는 스스로 세계를 구한다고 생각한다. 알리스 역시 마찬가지다. 미궁에 빠진 살인범과 부패한 병원장의 실상을 까발리는 데에 자신의 헌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믿는다. 편집증 paranoia 의 대표적인 양상은 더할 수 없이 선한 지선(善)의 추구와 자신은 절대로 틀리지 않았다는 자기확증에 있다. 이를 위해 흔히 동원하는 것이 편 가르기와 주변인물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이다. 이들 안에는 '남을 조종하는 우월 콤플렉스'가 깊이 내재되어 있다. 우리 주변에 익히 알려진 사람 중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증세이다.


세르반테스는 편집증 환자 돈끼호떼를 통해 당시 시대상을 조롱하고 풍자했다. 돈끼호떼의 입을 빌려 세르반테스는 소리쳤다.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면 누가 제정신일 수 있겠소? 제정신인 것이 도리어 미친 짓이오!" 그는 대중들에게 묻고 싶었다. 미친 노인 돈끼호떼를 보며 낄낄대는 여러분은 제정신이라고 생각합니까? 약자를 돕고 불의에 맞서는 영웅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하는 돈끼호떼의 정신상태가 우리와 다를 건 무엇이지요? 내가 믿고 있는 내가 정말 나라고 확신할 수 있나요? 마찬가지로, 알리스는 과연 정신병자가 맞는 걸까?



대조

영화가 효과적으로 동원하고 있는 레토릭은 상반되는 두 개념의 대조이다. 불과 물, 거인과 난쟁이, 과거와 현재, 자연과 인공. 영화는 반대되는 심상들끼리 내내 병치시켜며 끝없이 대조의 이미지를 끌어낸다. 선과 악의 경계는 어디인가? 짝사랑과 스토킹의 구별은 무엇인가? 과연 예스 or 노 만장일치로 정상과 비정상을 할 수 있는 걸까? 처음에 흰 외투를 입고 들어왔던 주인공은 나갈 땐 외투를 벗고 검은 옷차림이다. 퇴소 여부를 결정하는 총회에 흰 가운의 의사들 사이 홀로 눈에 띄는 검정이다. 끝까지 선악이 모호한 원장만이 회색 정장을 입고 있다.



대조되며 공존하는 두 심상은 서로에게 영향을 친다. '되먹이기'다. 관객에게 선후관계의 혼란을 유도하는 서로 다른 두 시제의 되먹임은 매우 흥미로운 영화적 장치로 쓰인다. 제 꼬리를 물고 원을 그리는 뱀 우로보로스 ouroboros 처럼, 종말이 발단으로 되돌아오고 결과가 다시 새로운 원인을 꺼낸다.


영화에 깨진 거울이 종종 등장하는 건 새로울 것은 없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표현하기 위해 이만한 이미지가 더 있으랴. 자체로서 새롭진 않은데, 주인공 이름이 알리스인 것에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중의하는 면도 있었던 건 아닌지 잠시 그런 생각도 해 보았다.



광기

미친 자는 누구이고 미치지 않은 자는 누구인가?


그래서 누가 범인인데? 결론을 내려야 직성이 풀리는 입장에선 영화 미장센의 미장이 어딘가 고르지 않아 보일 것이다. 수많은 스릴러를 학습해 온 현대 관객에게 흑백대조 몇을 단순배치하는 것으론 스릴링이 충분하지 않다. 반전이란 개념 자체에 더 이상 반전을 못 느끼는 시대다. 하지만 정답이 꼭 한 개여야 한다는 고집을 깨고 보면 다른 시선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영화 중반, 주인공의 혼란스런 유탈 씬은 자아분열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자기의심의 변화일 수도 있다. 씬의 시선은 하나 또는 둘이 아니다. 다층적으로 분산되어 있다. 경계를 허문 것이다. 스스로의 눈으로도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시선. 답을 찾는 과정 자체를 답으로 제시하고 있다. 상당히 긴 러닝타임을 잡아먹는 이 씬을 이렇지 보지 않으면 후반에 다시 돌아오는 주인공의 자기확신이 상당히 부자연스럽다. (아마도 그래서 많은 관객들에게 길고 불필요한 사족으로 보였을 것이다.) 원장과 경감이 나누는 대화에서 하나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어차피 신의 구부러진 선들끼리 벌인 일이니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말. 그게 해답일지도 모른다. 신이 바르게 쓴 문장은 애초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도처에 비뚤어진 줄들로 가득찬 세상이 우주일지 모른다.


마지막 나가는 길에 주인공은 남은 환자 하나하나에 시선을 준다.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는 엔딩컷은 《살인의 추억》을 연상시킨다. 관객을 직시하며 범인을 찾던 송강호. 알리스는 눈으로 관객에게 질문한다. 당신이 보기엔 내가 미쳤냐고. 그리고 그 질문 역시 되먹여진다. 그러는 당신은 안 미친 게 확실하냐고. 최초에 던져졌던 광기의 클리셰다. 자기가 미쳤다고 인정하는 미친 사람은 없다.




기타

원작이 궁금했다. 또르꾸아또 루까 데 떼나 Torcuato Luca de Tena 의 1979년작 소설이라고 한다. 순간 소설가의 이름이 로까 loca 인 줄 고 무릎을 잘못 쳤다. 로꼬(로까) loco(loca) 는 스페인어로 미친 사람을 뜻한다. (결국, 관계 없음.)


1979년이면 스페인 내전을 일으킨 파시스트 프랑코 총통(1892-1975)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정치 사회적으로 정신 멀쩡하기 쉽지 않은 시기였다. (실제 1981년에 23-F로 불리는 극우 쿠데타가 일어났다.)



사족

보는 내내 뿌염이 걸렸다. 알리스를 연기한 배우 바르바라 레니 Bárbara Lennie 의 머리는 천연 금발이 아니다. 그녀의 sns에서 진짜 머리색을 확인할 수 있다. 고혹적인 금발을 뽐내면서 등장한 후 시간이 갈수록 머리카락 뿌리 부분이 검게 드러난다. 병원에 미용실이 따로 있진 않을 테니 입소 후 시간 경과의 리얼리티가 사는 건 좋은데, 실제와 망상 사이 도치된 장면들마다 벗겨진 뿌염의 높이가 미세히 달라서 한번 주목하고 나니 계속 눈에 띄었다. 촬영과 편집의 순서가 달라서 그런 것인데, 아무리 그래도 보란 듯이 곱게 가르마를 타는 장면을 연출하는 감독이 그 정도 신경을 안 썼을까 싶어 신경이 아주 약간 쓰였다. 편집에 집착하면 그도 편집증적 직업병일 터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신경 안 쓰시길 바라며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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