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나 잔말 말고 일단 외는 게 능사이던 시절, 뜻도 모르고 주문처럼 되뇌 지금도 쿡 찌르면 툭 튀어나오는 어구들이 있다. 태정태세문단세 같은 것들. 홍진에묻힌분네는 상춘곡, 얄리얄리얄라셩은 청산별곡. 수헤리베비씨는 주기율표, 칼칼나마알아철은 이온화경향. 참 그러고 보니 3-4조 칠언절구는 과연 리듬 돋는 게 혀끝에 착착 감기는 묘함이 있다. 그런 칠언주문 중 생물시간엔 종속과목강문계가 있었다.
그렇다 생물분류법. 이를테면 인간은 동물계-척삭동물문-포유강-(중간생략)-호모사피엔스종 뭐 이런 식. 여기서 조금 더 떠올린다면 칼 폰 린네라는 이름도 기억나겠지. 이 체계를 만든 분류학의 아버지. 그런데 갑자기 웬 린네냐, 이 책에서 사정없이 린네를 까기 때문이다.
2) 위인전스러운 인상이 무색하게 린네는 생명다양성에 대해 직접 아는 바가 거의 없었으며, 자기 나라 스웨덴 안에서 라플란드 북쪽 지방보다 더 멀리 가지 않았고, 스웨덴어가 아닌 언어를 쓰는 사람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 고 저자는 꼬집는다. ‘감상적이고 미신적이며 교양이 없는 무례한 촌뜨기’라는 린네의 전기작가의 말도 빌린다.
다음은 백인 황인 홍인 흑인에 대한 린네의 인간분류법이다.
| 린네는 인간을 분류하면서 외국인은 대륙에 따라 색깔로 구분된 서로 다른 인간의 아종이라고 생각했다.
| 유럽인을 지칭하는 호모 사피엔스 유러파에우스 Homo Sapiens Europaeus 는 ‘희고, 진지하고, 강인하며’ 찰랑거리는 금발 모발에 파란 눈을 지녔다. 그들은 ‘적극적이고, 아주 영리하며, 창의적’이라고 린네는 자신의 분류법에 적었다. ‘꼭 맞는 옷을 입음. 법의 지배를 받음.’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은 이와는 다른 호모 사피엔스아시아티쿠스 Homo Sapiens Asiaticus 라는 아종이었다. ‘노랗고, 음침하고, 탐욕스럽다’고 그는 적었다. ‘검은 모발. 검은 눈. 사납고, 오만하고, 욕구를 따른다. 헐렁한 옷을 입음. 의견의 지배를 받음.’
아메리카 민족들은 호모 사피엔스 아메리카누스 Homo Sapiens Americanus 라는 아종이었다. ‘빨갛고, 성미가 고약하고, 예속 상태’라고 린네는 설명했다. ‘모발이 검고, 곧으며, 굵다. 콧구멍이 넓다. 얼굴이 거칠고 수염이 거의 없다. 집요하고, 자족적이며, 자유롭다. 직접 자기 몸에 빨간 선을 칠한다. 관습의 지배를 받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체 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아종은 호모 사피엔스 아페르 Homo Sapiens afer 였다. 린네는 개인적으로 이 아종은 완전한 인간이 아닐 수 있고, 인간과 혈거인의 교배종에서 내려온 후손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의 분류법에는 ‘검고, 무표정하고, 게으르다’고 나와 있다. ‘모발이 꼬불꼬불하다. 피부가 부드럽다. 코가 평평하다. 입술이 두껍다. 여성에게 생식기 덮개가 있고, 가슴이 크다. 교활하고, 굼뜨고, 멍청하다. 몸에 기름을 바른다. 변덕의 지배를 받음.’
| 린네가 근대 분류학의 아버지로서 역사 속 한자리에 등극할 때, 자연과 역사의 힘으로서 작용한 이주자와 이주는 뒷전으로 물러났다. 이주자들이 사람과 장소 사이에서 만들어낸 세포의 결합조직은 주목할 만한 생물학적 역할을 거의 하지 못했다. 거의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만하면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얼마나 큰 반감을 가지고 있는지 감이 올 것이다. 저자 스스로가 인도 이민 2세로서 “이주는 환경 변화에 대한 아주 오래된 대응이자 숨쉬기만큼이나 필수적인 생물학적 원칙”이라고 반박한다.
3) 린네 이야기는 한 챕터일 뿐, 이주 부정론을 성토하고 타당론을 비호하는 데 이 책은 상당분량의 역사적 생물학적 사례를 할애한다. 예를 들어 부정적 이주의 대명사인 레밍의 집단자살은 세트에서 연출된 장면이라는 것. 1959년 아카데미 최우수 다큐멘터리 상까지 받은 <화이트 와일드니스>의 해당 장면은 디즈니 영화제작자들이 동물조련사를 고용해서 일부러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려 찍은 연출임을 고발한다.
4) 새로 알게 된 사실도 많고 다시 곱씹어보게 된 생각도 많다. 변화는 자연적이고 불가피하며 변화에 대한 적응이 생존의 조건임을 생각할 때 이주에 대한 편협한 반감은 걷어내야 할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인간 이상의) 환경/생태적인 차원에서 토종의 다양성을 해치는 외래침입종의 위협도 엄존하는 숙제임을 고민해 본다. 생명의 생동력은 단 하나의 관점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목적성을 띤 저자의 논지가 일방적으로 흐르는 감도 없지 않다. 결국 중요한 것은 밸런스, 균형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지 않을 수 없다. 종속과목강문계는 어쩌면 내일이라도 바뀔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