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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Nov 09. 2024

2024 아너 소사이어티

1. 월드비전을 통해 아동후원을 해온 지 18년째다. 그동안 예닐곱 명의 친구들과 인연을 맺었다. 지금은 한 아이뿐이다. 얼마 전 아이의 일곱 번째 생일이었다. 복지관에 전화를 걸어 아이가 무엇을 좋아할지 물었다. "ㅇㅇ이는 예쁜 옷을 좋아해요. 걸그룹이 꿈이거든요." 소식지에 적혀있던 아동학대라는 단어가 눈에 밟혔다. 돈보다는 아이가 직접 원하는 물건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예쁜 옷을 고르자니 자신이 없었다. 일곱 살짜리 여자애가 행복해할 예쁜 옷이 어떤 옷인지 솔직히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투른 안목이 아이에게 괜한 실망만 안길까 염려스러웠다. 생활비는 보태도 생활은 보탤 수 없다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무엇이 새삼스러웠다.


2. 일들이 일거에 밀어닥칠 때가 있다. 어려운 일일수록 그렇다. 머리가 좀 복잡한 요즘인데 집주인이 돌연 거액의 보증금 증액을 요청해 왔다. 2년마다 돌아오는 세입자의 비애다. 대비한다고 했는데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뛰어넘었다. 주거의 불안정은 사람을 피폐하게 한다. 설상가상 정부 규제로 대출도 막혔다. 평생 신용으로 살았는데 빚도 맘대로 못 지는 세상이다. 누구 탓을 해야 하나. 엄동설한에 계획에 없던 이삿짐을 싸야 한다. 이마저도 임대인이 돈을 빼주기 전엔 불가능하다. 얼어붙은 전세시장에 호가는 높고 잔금을 무사히 치르리란 보장이 없다. 내 돈이지만 남의 집에 묶여있다.


3. 아너 소사이어티에서 올해도 초청장이 왔다. 한 해를 마무리할 때가 됐단 얘기다. 작년보다 행사 규모도, 기부자 수도 조금 는 듯하다. 학생 만 명에게 치킨 삼천 마리를 쏘았다는 사장님부터 부모를 넘어 조손에 이르는 3대째 패밀리아너까지 많은 분들이 함께하셨다. 10억을 넘겨 초고액기부자 클럽에 드신 여사님이 말씀하셨다. "나이 들수록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더라고요. 사회에 돌리고 가고 싶습니다." 기부캠페인을 펼쳐온 신한금융 회장님이 말씀하셨다. "처음엔 부끄러웠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좋은 일일수록 더 많이 알리고 나누는 게 필요합니다."


4. 위 1,2,3을 차례로 읽은 누군가는 의아할 것이다. 돈이 모자라 걱정이라며 후원은 무엇이고 기부는 또 무엇이냐. 기부할 돈은 있으면서 집세낼 돈은 없다는 게 뭔 위선이냐. 


그러게 말이다. 솔직히 나도 가끔 헷갈린다. 돈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상을 살면서 동시에 돈에 초연한 가치를 추구한다는 게 말이 되는 걸까.


그런데 말이다. 모순돼 보이는 두 사실이 내 안에선 의외로 쉽게 합치한다. 간단하다. 돈은, 필요할 때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필요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 진리를 이미 잘 알고 있다. 돈은 필요의 대상이지 추구의 대상이 아니다. 살아가는 데 돈은 필수불가결하지만 어디까지나 필요가 먼저이지 돈이 먼저인 것이 아니다. 나는 현재 돈이 필요한 상황이다. 따라서 늘 그래왔듯 지혜를 다해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동시에 나는 어려운 이웃의 필요에 무감각하지 않을 것이다. 힘이 닿는 한 그 역시 최선을 다할 것이다. 왜냐면 그것이 돈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인 돈은 썩지만 흐르는 돈은 점점 풍성해진다. 살면서 내가 이룬 것은 혼자 이룬 것이 없으며 다시 누군가에게 이어질 때 더 높은 가치를 획득한다. 


가졌음에 감사할 수 있다면 나눌 수 있음에도 감사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아무렇게나 퍼줄 거란 착각은 금물이다. 기부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오히려 돈을 허투루 쓰지 않는다. 돈 많은 부자들이나 하는 배부른 소리란 생각도 곡해다. 억만금을 쌓아두고도 자기밖에 모르는, 마음이 가난한 부자들이 세상에 수두룩하다. 남의 집에 세들어 사는 월급쟁이지만 나는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부유한 금수저이고자 한다.


날이 차다. 찰수록 필요가 드러난다. 꼭 필요한 곳에 꼭 필요한 것들이 쓰이는, 따뜻한 겨울을 소망한다. 내게도, 당신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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