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1>
통째로 짐을 빼고 짐을 넣는 과정은
번잡하긴 하지만 속 편하기도 하다.
잊었던 걸 용케 발견하는 행운도 주고
쓸데없는 걸 과감히 내버릴 용기도 주고
헐고 녹슨 것들을 강제로 닦아내고 새 술을 새 부대로 옮겨담는 계기가 되어준다.
건강한 다이어트는 집에도 필요하다.
디톡스할 꺼리들이 이리도 많았던가?
홀가분한 마음과 함께 몸도 한결 가볍다.
개중 멀쩡한 건 굿윌스토어에 기증하고 간다. 이웃도 돕고 재활용도 되고 기부금 공제도 되니 일석삼조다. 이사할 때마다 이용하는데 저번에 한참 덜고도 이번에 또 이백여 점이 나왔다. 모셔만 뒀던 것들이 그리 많은 게다. 쓰지 않는 명품은 명품이 아니다. 물건도 사람도.
짐이 모두 빠진 공간을 보니 퍽이나 넓다 싶다. 공간은 비어있을 때가 의미이다. 뭐든 채울 가능성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상상 속에서 온갖 배치와 조합을 그려보며 재미있다. 여행은 계획할 때가 행복하고 상상은 이루어지기 직전이 제일 짜릿하다.
젊음이란 것도 그렇다. 기왕에 뭐가 꽉 들어차 있으면 새로운 걸 상상할 수 없고, 상상력을 상실한 존재는 더 이상 젊지 않다. 빌 空자를 쓰는 공간(空間)이라고 그냥 빈 것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으로 차있음을 생각한다. 그렇게 겸사겸사 마음의 집도 덩달아 포장이사에 나선다.
<이사 2>
하하하하아아아앜
웃자!
뉴스를 봐도 주변을 봐도 웃을 일이 귀한 시대.
그래 올해는 할 수 있는 한 많이 웃기로 했다.
이번 세기 들어 다닌 이사만 대충 아홉 차례 된다. (해외는 제외했다.) 그간 보증금도 떼여봤고 경매도 넘어가봤고 바퀴벌레 소굴도 들어가봤다. 그렇게 이골은 늘어났건만 늘 곤란한 것이 하나 있으니, 몸은 하나요 손은 어김없이 둘 뿐이라는 사실이다.
유비쿼터스의 신이 아닌 이상, 이삿날 한나절에 이삿짐 건사하면서 동시에 양쪽 임대인, 양쪽 부동산, 금융기관, 행정기관, 관리사무소, 도시가스, 청소, 대형폐기물, 인터넷설비, 각종 하자보수업체들을 혼자 상대해내는 건 좀처럼 쉽지 않다. 마치 도처에서 속출하는 모든 민원을 죄 커버해야하는 연출자의 고독한 촬영현장 같다.
이럴 때 긴요한 것이 업체를 잘 만나는 것이다. 말 통하고 일솜씨 깔끔한 중개인이나 업자를 만나면 손을 크게 덜 수 있다. 문제는, 현장에 나오는 분들은 백프로 복불복이라는 점. 기우제를 지내는 심정으로 추운 새벽부터 따뜻한 캔커피와 꿀물을 사다놓고 이사팀을 기다렸다.
결론부터 말해 역대급 팀이었다.
반장님은 귀가 어두우셨고
이모님은 손이 게으르셨고
막내님은 술냄새가 진동하셨다.
안방에 짐을 두고 오셨고
욕실에 용변을 흘리고 다니셨고
가구에 구멍을 내시고 가전을 부수고 가셨다.
일일이 다 거론할 수도 없이
손을 더는 게 아니라
손이 더 가는 이사.
퍼포먼스는 최악인데
그런데 왠지 이분들께 굳이 큰소리를 치고 싶지 않았다.
뭐였을까. 맥락없이 발동한 정 같은 것이었을까.
술 취한 막내는 내가 바빠보였는지 자꾸 엘리베이터를 잡아주었고
주방기구를 세탁실에 처박은 이모님은 있지도 않은 처자식 걱정을 해주었고
구멍 난 책장을 책으로 귀엽게 가려놓은 반장님은 액자를 걸어야한다며 자꾸만 벽에 또 구멍을 내려 하였다. (액자는 결국 수평이 안 맞아 삐딱하게 걸렸다.)
날이 저물어서야 팀원들을 급히 철수시킨 반장님은 잔금에서 배상액을 제할까봐 내 눈치를 살살 보았다. 잔근육 뭉친 그의 굽은 등을 토닥이며 귀에 대고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수고 많으셨어요. 계좌 주세요." 희한하게도 내내 말귀 못 알아듣던 가는 귀가 한번에 뚫린 듯 했다. 주름 깊던 그의 얼굴이 곧바로 펴졌다. "고맙습니다!"
일은 일이고 정은 정인데 너무 물렀나, 약간의 한숨과 함께 내 집에서 내 살림살이를 발굴하던 중 샤워부스를 들여다보고 그만 빵 터지고 말았다. 샴푸와 바디워시가 간데없는 자리에 락스와 뚫어뻥이 보란듯이 각잡고 있었다. 끝까지 유니크한 수납감각을 뽐내고 떠난 이모님 캐릭터에 한숨이 폭소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올해는 되도록이면 많이 웃기로 한다. 최선을 다해,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