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무엇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 우리는 위험을 느낀다. 위험엔 두 가지 층위가 있다. 자극 자체가 자극적이기에 느끼는 위험은 벌에 쏘인 것 같아 알아채기 쉽다. 그러나 자극이 남발되어 더 이상 자극으로 느껴지지 않는 '익숙해진 극단'은 혈관에 번지는 마취제 같아 자각하기 쉽지 않다. 인간의 뇌는 자주 접하는 것들을 '으레 그러려니' 퉁치는 경향이 있어서 어떤 극단적 자극도 일상이 되면 더 이상 자극되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 위험의 정도로 따지면 표면으로 도드라진 전자보다 은밀히 내재되는 후자가 훨씬 더 위험하다. 너무 많이 먹은 마라탕은 미뢰를 마비시키고 너무 자주 분비된 도파민은 기능 자체를 상실한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전에는 탄핵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했고 그렇기에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 녹록지 않았다. 영화의 소재로 쓰이기 전까지 계엄이란 단어는 실제 그 시절을 겪었던 사람에게 지독한 PTSD를 안기는 공포의 단어였다. 그렇다. 이젠 단어'였'다 라고 과거형을 써야 할 것 같다. 탄핵도, 계엄도, 뭐만 묻으면 휙휙 뽑아 쓰는 크리넥스 휴지처럼, 엄정함과 두려움의 무게를 잃어버리고일상용어로 변해버렸다. 진영과 이념을 떠나서, 인스턴트화된 개념은 중대할수록 위험하다.
강강강을 추구하는 우리 사회는 이미 익숙해진 극단으로 뒤덮여버렸다. 빈도와 정도의 다층적 단계를 표현하는 다양한 부사들은 킹, 개, 존나 같은 극단적 단순어들로 극렬히 치환 돼버렸다. 흑과 백의 명쾌한 이분법이 대중의 열광을 받을 때 그 사이 중첩된 수많은 현실의 회색 그래데이션은 부정되고 있다. 효율과 속도를 볼모 삼아 말과 사고를 획일화한 세상은 전쟁과 살상과 절멸과 같은 상상조차 꺼려지는 극단적 개념들까지 무뎌진 일상의 영역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2024년에 어찌 이런 일이, 싶지만 그렇게 역사는 도돌이표를 그린다. 이번 사태의 숨은 위험성은 여기에 있다. 우리는 극단을 디톡스해야 한다.
그저 쇼잉용 계엄이었다 한들 국민에 끼친 패악이 익스큐즈 될 것도 아니지만, 정말 그런 인식을 가졌다면 모두에게 매우 불행한 일이다. 계엄이 게임이 될 순 없지 않은가? 그 얕음과 가벼움과 안일함이 실로 더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