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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Jan 23. 2022

망각 능력자

feat.붕어싸만코>파트리크쥐스킨트>문학적건망증>논어>메타인지

<망각 능력자>

전에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때그때 재빨리 메모를 합니다. '저런 꼼꼼할세' '거참 피곤하군' 보는 사람에 따라 감탄 또는 타박을 돌려주지만, 언제부턴가 돌아서면 까먹는 붕어 기억력이 돼버린 후 살아남기 위해 적어두는 것뿐입니다. 관건은, 까먹기 전에 일초라도 빨리, 하나라도 더 적어뒀느냐죠.

그런데 최근에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적어놓는 것까진 좋은데 도대체 어따 적어놨는지 고걸 까먹는다는 겁니다. 이 노트였나, 저 수첩이었나? 서랍을 뒤적이다가 내 언젠가 날 잡아서 서류철 정리 한번 하리라 입술을 깨뭅니다.

원래부터 이런 건 아니었어요. 동네 소문나도록 총명했었죠. 수학경시대회 서울시 대표로 나간 적도 있었다고요. 다 세월 탓인 걸 어쩌겠습니까마는, 이젠 스마트폰이란 놈이 있어줘서 천만다행입니다. 액정 속 메모장에 타이핑해서 폴더별로 클라우드에 업로드해두면 적어도 어디에 두었는지 헤맬 일은 없을 테니 말이죠. 물론 그것도 텍스트가 꽤 많이 쌓이고 나니 그 안에서 또 위아래로 스크롤하며 헤매는 수고가 생기긴 했지만, 어쨌든 잃어버릴 걱정은 없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러다 또 잊고 지내던 다른 메모를 발견하는 뜻밖의 재미도 가끔 생기고요..


..라고 신나게 자판을 두드리던 중, 똑같은 제목의 메모 파일이 8개월 전 로그기록을 달고 백업 폴더에서 출토되었다. 오 경이롭도다 신묘막측한 망각력의 진화여. 나의 뇌는 메모를 해두었다는 팩트 자체를 까먹는 새로운 경지(어쩌다 이 지경)오른 지 이미 오래였던 것이다. 집 앞 편의점에서 붕어 싸만코 까먹다 떠오른 시상에 혹 잊을까 급 뛰쳐올라온 다리한테 미안했다. 세상에, 그리고 이어서 줄줄이 굴비처럼 엮여 나오는 비슷비슷한 내용의 텍스트들. 붕어로부터 잉어 싸만코로의 승격.





오오, 역시 세상은 공평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콘트라베이스>, <좀머 씨 이야기>, 그리고 다스 파흐품! 한번 맡은 냄새는 사람을 죽여가면서까지 절대 잊지 않는 후각 천재 그르누이를 창조한 <향수>의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 그런데 정작 본인의 기억력에는 그다지 자신이 없었나 보다. 다음은 쥐스킨트의 짧은 에세이 <... 그리고 하나의 고찰 (문학적 건망증)> 중 한 대목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책 제목이나 저자의 이름,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와 내가 같은 수준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니, 이런 개이득이? 문제 정도가 아니다. 아예 거의 똑같다고 할 글을 써놨다. 이어서 읽어보자.


... 그런데 이런! "아주 훌륭하다!"라고 긁적거리기 위해 연필을 들이대자 내가 쓰려는 말이 이미 거기에 적혀 있다. 그리고 기록해 두려고 생각한 요점 역시 앞서 글을 읽은 사람이 벌써 써놓았다. 그것은 내게 아주 친숙한 필체, 바로 내 자신의 필체였다. 앞서 책을 읽은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오래전에 그 책을 읽었던 것이다.

그 순간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비탄이 나를 사로잡는다. 문학의 건망증. 문학적으로 기억력이 완전히 감퇴하는 고질병이 다시 도진 것이다.

그러자 깨달으려는 모든 노력, 아니 모든 노력 그 자체가 헛되다는 데서 오는 체념의 파고가 휘몰아친다.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기억의 그림자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도대체 왜 글을 읽는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지금 들고 있는 것과 같은 책을 한 번 더 읽는단 말인가? 모든 것이 무로 와해되어 버린다면 대관절 무엇 때문에 무슨 일인가를 한단 말인가? 어쨌든 언젠가는 죽는다면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일까? ...


이쯤 되면 이건 뭐, 거의 표절이라고 해도 할 말 없는 수준이다. 맹세코 난 내 글 쓰기 전에 저 글을 읽은 적이 없으니 이건 필시 그가 나를 표절한 것이렷다!


<... and a reflection (amnesia in litteris)>, 1980s


하지만 역시 만만치 않은 작가다. 다 예상해놨다는 듯이 말미에 그럴 듯한 핑계를 달아놨다.


...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 있다. 의식 깊이 빨려들긴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문학의 건망증으로 고생하는 독자는 독서를 통해 변화하면서도, 독서하는 동안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두뇌의 비판 중추가 함께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직접 글을 쓰는 사람에게 이 병은 축복, 거의 필수적인 조건일 수 있다. 그것은 위대한 문학작품이 꼼짝 못 하게 불어넣는 경외심 앞에서 그를 지켜주고, 표절의 문제도 복잡하지 않게 해 준다. 그렇지 않다면 독창적인 것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Patrick Süskind (1949-)




세상은 역시 불공평했다. 저런 사색 대신 붕어 싸만코를 뜯어먹 나는 얼마나 인간적인가.


그래도 까먹는단 걸 알아챈 건 같았으니 아직 인지력만큼은 쓸 만하잖아? 자위하며, 일찍이 공자가 하신 말씀으로 마무리해본다.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아는 걸 안다 하고
모르는 걸 모른다 하는 게
바로 메타인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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