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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Jun 11. 2022

안달루시아의 플라멩꼬

집시의 접신


지금도,
처음 플라멩꼬를 눈앞에 목도했던,
그때 그 충격이 눈에 선하다. 




몇 년 전 스페인 남쪽 안달루시아 지방대도시 세비야를 여행할 때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지만 그때 나는 플라멩꼬가 뭔지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머리에 빨간 꽃 꽂은 여인네가 치맛자락 부여잡고 나뭇 바닥을 구르면서 뜻 모를 올레! 를 외쳐대는 스페인 전통 탭댄스? 빠리에 가면 에펠탑을 보듯 스페인 오면 의례히 한 번쯤 봐줘야 할 문화상품? 


알음알음 현지인의 추천을 받아 <엘 아레날 (El Arenal)>이라는 이름의 따블라오를 찾았다. 방송 프로그램에서 유명세를 타기 훨씬 전 일이다. 당시만 해도 동양인이 많지 않았다.

따블라오(tablao)란, 플라멩꼬를 추기 위해 깔았던 옛날 널판(tabla)에서 비롯된 말로, 식사를 하며 공연도 볼 수 있는 일종의 극장식 식당을 말한다. 세비야에 따블라오는 여러 곳이 있는데 <엘 아레날>이 그중 이름난 곳이었다.


싼 가격은 아니었다. 풀코스 식사는 말할 것도 없고 음료 한 잔이 포함된 입장료만 해도 1인당 36유로(15년 전 가격)였으니, 당시엔 돈도 없고 해서 와인 한 잔으로 허기만 달래기로 했다.


그런데 선착순인 걸 모르고 시간 넉넉히 갔다가 입장 순서에서 밀려 버렸다. 어차피 공연을 보기 좋은 무대 정면 좌석은 풀코스 손님들에게 배정이 되어 있어서 이래저래 왼쪽 귀퉁이 90도로 꺾인 사각지대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측면에 앉은 데다가 마루높이가 내 명치께까지 올라와서 고개를 쳐들어야 겨우 옆얼굴이라도 볼 수 있는 자리. 공간도 비좁아 손을 뻗으면 바로 무대 밑단이 만져지는 자리. 하지만 그게 내게 축복이 되었단 걸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로 눈높이에서,
채 50cm도 안 되는 거리에서,
나무 바닥을 짓이기고 튀어 오르는
새빨간 힐.


지난 세월과도 같이,
짙게 주름 잡힌 치마가,
안면을 강타하며 나선을 긋
돌개바람.


거칠게 몰아쉰 숨과 튠,

쏟아지는 타현의 점묘에 실려,

송두리째 흩어지성난 폭포수

 땀방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손과 발바닥까지

마룻바닥 밑단에 갖다 붙인다.



쿵. 쿵. 쿵


심장을 폭행하는 집시의 손뼉과 울음,
목전을 달음박질치는 무희의 빨강구두.

미소가 폈다가 주름이 졌다가,
박수를 쳤다가 탄성을 뱉다가.

의 주파수는 이미 집시의 것,
저 깊숙한 곳에서 한탄처럼 쏟아지

격정의 물.

누가 알랴


온몸을 밀착시켜
말단부터 감염된 태고의 희열을.


무희의 현란한 굽은 바닥을 때리다 못해 아주 짓이겨놨다. 공중으로 튀어 오른 나뭇조각이 내 바로 앞에 날아와 떨어졌다. 옛날 교과서에서 배웠던 공감각이란 게 뭘 하는피부로 와닿았다. 시각과 청각과 후각과 미각과 온몸의 촉각들이 곤두서는, 그야말로 共.感.覺.





플라멩꼬는 원래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유래된 집시의 음악이다. 플라멩꼬 밴드의 구성은 그때그때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노래하는 깐떼(cante), 기타 치는 기타라(guitarra), 손뼉 치는 빨마스(palmas) 그리고 춤을 추는 바일레(baile)로 이루어진다. 어찌 보면 국악의 어떤 요소들이 떠오른다. 창을 하는 소리꾼과 가락을 까는 태평소, 추임새 넣는 고수, 그리고 춤꾼. 여기에 무대에 따라서 기타라가 추가되거나 상자갑 같은 타악기를 치는 또께(toque) 멤버가 들어오기도 한다.




플라멩꼬는 엄밀히 말해서 스페인의 것이라기보다 이곳에 살았던 집시들의 것이다. 이베리아 반도의 남쪽 지금의 안달루시아 지방은 옛날에 무어인의 이슬람 왕국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15세기 기독교도들의 레콩키스타(Reconquista, 국토회복운동)에 의해 산으로 밀려난 집시들이 동굴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부른 한풀이 노래다. 이슬람 왕국의 마지막 수도 그라나다에 가면 지금도 쿠에바(cueva)라는 동굴 형태를 그대로 간직한 플라멩꼬 공연을 볼 수 있다.

동굴에 숨어 사는 가난한 집시들이 가진 게 뭐가 있었으랴. 모닥불 피워놓고 빙 둘러앉아 가슴 깊이 응어리진 한을 춤과 노래로 풀 수밖에 없었을 것을. 변변한 악기 하나 없으니 낼 수 있는 소리라고는 손뼉 아니면 발구름뿐이었다. 지금의 화려한 기타 연주는 플라멩꼬가 세상 밖으로 나와 대중화가 된 나중의 일이다.



하지만 손뼉이 그냥 손뼉이 아니다. 자세히 보면 칠 때가 있고 비빌 때가 있으며 공기를 넣거나 튀길 때도 있다. 각각의 소리는 모두 다르다. 내겐 빨마스라고 하는 이 손뼉 치기가 매번 흥미로워 늘 가까이 관찰하곤 한다. 노래나 기타는 원대로 따라 할 수가 없지만 손뼉은 따라 치면서 리듬에 함께 몸을 실을 수가 있다. 손뿐만 아니라 무릎도 치고 엉덩이도 치고 몸으로 낼 수 있는 소리란 소리죄다 내는 거다.


춤도 어디 변변한 공연 무대가 따로 있었겠는가. 그냥 흙바닥에서 구르던 걸 조금이라도 소리가 더 나라고 나무 널판을 깔아놓고 굴렀던 거다. 제대로 흙수저 음악이다. 노랫말도 뭐 대단한 얘기일 것 같지만 태반이 엄마 배고파, 얘들아 울지 마라, 저기 밥 벌러 떠났던 그이가 돌아오네, 뭐 이런 넋두리다. 허파를 긁으며 노래를 하는 깐떼의 음색은 피를 열 번은 토했을 것 같은데, 휴식 시간에 밖에 나가보면 십중팔구 줄담배를 피고 있다. 우리말 표현은 아니지만 딱 적합한 감상은, "간지 난다!"




플라멩꼬에 관심 없는 분도 '올레!' 하는 추임새는 많이 들으셨을 거다. 그들이 줄곧 올레만 외치는 건 아니다. 으르르르르(rr) 가자! 지화자, 얼쑤! 우리도 그러듯 추임새는 정한 바다.


'올레(¡olé! )'란 감탄사는 원래 어디에서 왔을까? "신이시여!" 하는 탄식 즉, 이슬람의 알라신을 부르는 '왈라히(Wallahi, والله)'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비야에 가면 마음껏 외쳐 보자. ¡Olé!


세비야 스페인 광장에서 버스킹. ¡Ol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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