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으로 던전을 탐험하는 법 : 로그라이크형 청취

<None of This Is Real>을 듣고

by 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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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Rozwell의 《None of This Is Real》은 단순한 음악 앨범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탐험이며 던전 속을 헤매는 모험과 같다. 일반적인 앨범 감상 방식이 정해진 트랙 리스트를 따라가는 것이라면 이 앨범은 그 틀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첫 번째 트랙 「Instructions」에서부터 이 작품은 기존의 음악 감상 방식에 반기를 든다. 청취자는 셔플과 5~6초 크로스페이드를 설정해야 한다는 '마법사의 지침'을 받는다. 만약 이를 따르지 않으면 불길한 일이 닥칠 것이라며 위협하는 이 경고는 단순한 장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 앨범이 가진 가장 중요한 개념을 설명하는 장치다. 무작위 재생을 강제함으로써 《None of This Is Real》은 매번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고 이는 마치 로그라이크 게임과 같다. 매번 바뀌는 던전을 탐험하는 플레이어처럼 청취자는 매번 새로운 트랙 리스트를 경험하게 된다.


로그라이크(Roguelike)라는 게임 장르는 본질적으로 무작위성과 운명 사이의 긴장을 다룬다. 플레이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에서 길을 찾지만 그 세계의 법칙과 구조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움직인다. 《None of This Is Real》 역시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우리는 이 앨범을 들을 때마다 다른 경로를 따라가지만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있다. 청취자가 셔플 기능을 활성화하는 순간 앨범은 스스로 재구성된다. 듣기 전까지는 수많은 조합이 가능하지만 듣는 순간 단 하나의 경로가 결정된다. 그리고 그 경험은 되돌릴 수 없다. 이는 마치 로그라이크 게임에서 랜덤하게 생성된 던전에 들어선 플레이어가 한 번의 결정으로 미래를 바꾸는 것과 유사하다. 가능성은 무한하지만 선택은 유일하다.


이 과정은 철학적으로도 흥미로운 논점을 제시한다. 우리가 음악을 듣기 전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감상하는 순간 하나의 경험으로 구체화된다. 이는 우리의 삶과도 연결된다. 청취자는 단순한 감상자가 아니라 가능성 속에서 의미를 찾는 탐색자로 변모한다. 그리고 반복적인 감상을 통해 이전에 없던 의미가 점진적으로 축적되는 과정을 경험한다. 로그라이크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시행착오를 거치며 점차 숙련되는 것처럼 《None of This Is Real》은 청취자가 반복적인 감상을 통해 점차 패턴을 익히고 의미를 만들어 가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 앨범의 무작위성은 단순한 감상 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청취자에게 탐색자의 역할을 부여하는 적극적인 개입 구조를 만든다. 던전 신스 특유의 신비롭고 불길한 신디사이저 멜로디가 배경을 이루고 거친 로우파이 힙합 비트가 중첩되며 사이사이 기괴한 샘플링과 방송 음성이 등장한다. 하지만 단순한 장르적 특성을 넘어 사운드 디자인은 이 앨범의 핵심적 요소다. 크로스페이드 효과는 각 트랙을 매끄럽게 연결하는 대신 곡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하나의 거대한 사운드스케이프를 형성한다. 이는 전통적인 앨범의 트랙 구성과 달리 하나의 거대한 던전 속을 탐험하는 듯한 감각을 제공한다.


《None of This Is Real》은 플런더포닉스적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과거의 사운드 조각을 샘플링하고 이를 변형함으로써 원래의 맥락을 지우고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방식이다. 이는 우리가 과거의 기억을 조각조각 떠올릴 때 실제와 다르게 재구성되는 현상과 유사하다. 같은 샘플이라도 배치와 문맥이 달라지면 전혀 다른 감각을 만들어내며 결국 청취자는 ‘원래’라는 개념 자체를 신뢰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기법은 기존의 음악을 해체하고 새로운 문맥 속에서 전혀 다른 경험을 만들어내는 플런더포닉스의 핵심적인 특징과 맞닿아 있다.


플런더포닉스는 단순한 샘플링이 아니라 기존 음악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한 장르다. 《None of This Is Real》에서 DJ Rozwell은 특정한 멜로디나 사운드를 원곡의 의미에서 완전히 분리한 후 그것을 무작위적인 조합 속에 배치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감각을 형성한다. 이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소리를 듣는 동시에 그것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특히 샘플링된 음향이 원곡의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도록 변형되는 방식은 사운드의 본질을 해체하는 과정과 맞닿아 있다. 청취자는 원래의 문맥과 관계없는 형태로 변형된 소리를 듣게 되며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이 앨범은 단순한 샘플링이 아니라 사운드 콜라주를 통해 정체성이 모호한 공간감을 형성한다. 이는 The Avalanches, Oneohtrix Point Never, The Caretaker 같은 아티스트들이 활용하는 기법과도 연결된다. The Avalanches는 대중음악 샘플을 재조합하여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형성하고 Oneohtrix Point Never는 디지털 왜곡을 가미하여 원본의 흔적을 흐린다. 한편 The Caretaker는 기억의 퇴색과 왜곡을 중심으로 한 플런더포닉스를 통해 시간의 흐름과 망각을 다룬다. 《None of This Is Real》은 이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음악적 요소를 조작하지만 이를 무작위성과 결합하여 더욱 능동적인 청취 경험을 유도한다. 플런더포닉스의 실험적 가능성을 확장하는 동시에 감상의 구조마저 해체하는 시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실험적 접근은 현대 음악 감상의 패러다임 변화와도 맞닿아 있다. 과거의 앨범 감상이 작가 중심적이었다면 오늘날 스트리밍 환경에서는 청취자가 감상의 방식 자체를 조정하는 능동적 역할을 수행한다. 이 앨범은 기존의 청취 경험을 해체하면서도 동시에 청취자의 선택에 따라 음악적 흐름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현대적 감상 방식과 충돌하면서도 조화를 이룬다. 이는 우리가 단순한 소비자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직접 음악을 경험하고 재구성하는 주체가 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None of This Is Real》은 단순한 음반이 아니다. 이것은 감각의 탐험이고 매번 새로운 던전에 뛰어드는 경험이며 청취자가 의미를 창출하는 시스템이다. 듣는 순간 우리는 던전 속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경험을 단순히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창조해 나간다는 점이다. 사운드 디자인을 통해 공간적 경험을 제공하고 인터넷 문화의 변화를 반영하며 청취자에게 능동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이 앨범은 단순한 감상의 대상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음악을 어떻게 경험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자 새로운 형태의 인터랙티브 아트워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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