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뽕짝 음악들>을 듣고 허물며
뽕, 가장 촌스러운 미래
‘뽕’은 단순한 음악 장르인가, 아니면 설명하기 힘든 감각의 형태인가? 이 질문은 K팝의 정교한 표면 아래, 여전히 원초적인 에너지로 꿈틀대는 어떤 정서에 관한 것이다.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고, 때로는 과잉으로 치닫는 이 감각은 오랫동안 한국 대중음악의 중심에서 비껴나 있었다. 하지만 예술의 역할 중 하나가 혼돈스러운 감정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라면, ‘뽕’은 우리 내면의 가장 혼란스러운 부분을 닮은 소리의 원형질일지도 모른다.
이 기묘한 감각의 귀환을 알리는 신호탄은 가장 의외의 장소에서 터져 나왔다. 2025년 8월 21일, 래퍼 머쉬베놈의 앨범에 이박사가 등장한 것이다. 가장 현대적인 힙합의 음향 위로, 시대를 너무 일찍 찾아왔던 ‘테크노 뽕짝’의 기묘한 에너지가 겹쳐지는 순간, ‘뽕’이 더 이상 과거의 유물이 아님이 증명되었다. 이 예기치 못한 조합은 새로운 질문을 낳는다. 왜 지금의 아티스트들은 이 오래되고 위대한 소음을 다시 탐구하는가?
그 답은 우리가 사는 시대의 감정적 기류와 무관하지 않다. 감정 표현이 종종 위험이나 부담으로 여겨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터져 나오는 날것의 감정을 마주할 기회를 잃어가고 있다. SNS 속 매끄럽게 연출된 행복과 긍정의 압박 속에서, ‘뽕’이 가진 솔직하고 격렬한 희로애락은 오히려 희소한 가치를 지닌다. ‘뽕’의 귀환은 정제된 감각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필터링되지 않은 소리의 충격으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문화적 사건이다.
이 글은 ‘뽕’이라는 감각이 어떻게 시대를 앞서갔으며, 어떻게 가장 동시대적인 사운드로 재탄생했는지를 추적한다. 이 여정은 두 명의 독창적인 아티스트를 길잡이 삼아 진행된다. 한 명은 ‘뽕’의 에너지를 미래로 쏘아 올린 선구자, 이박사다. 다른 한 명은 그 에너지의 근원을 파헤쳐 새로운 형태로 빚어낸 탐구자, 프로듀서 250이다. 이것은 두 아티스트의 이야기는 물론, 하나의 감정이 시대를 관통하며 스스로를 증명해내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이박사 : 청각을 겨냥하지 않는 소리
이박사의 ‘테크노 뽕짝’은 음악을 귀로만 듣는다는 통념에 도전한다. 그의 음악은 안정적인 멜로디를 따라가는 감상이 아니라, 몸 전체로 부딪혀오는 물리적 경험에 가깝다. 반복되는 기계적인 리듬은 심장을 직접 두드리는 진동으로 느껴지고, 날카롭게 파고드는 신시사이저 사운드는 피부에 와 닿는 마찰력처럼 감각된다. 그의 음악은 청각을 우회하여 신체를 직접 겨냥하는 소리의 전략을 보여준다. 이는 귀로만 듣는 청각적 경험이 아니라, 다른 감각과 결합하고 확장될 수 있는 유연한 개념으로서의 '듣기'를 실천한 것이었다.
당시 그의 시도는 주류 음악의 문법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90년대 가요계가 세련된 발라드와 정교한 댄스 팝의 질서를 구축하고 있을 때, 이박사는 그 모든 규칙을 조롱하듯 자신만의 B급 감성과 키치 미학을 밀어붙였다. 이는 단순히 독특함을 넘어서, 정제된 예술이 풍기는 고유의 분위기나 맥락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급진적인 태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관점에서 그는 감각의 새로운 통로를 열어젖힌 개척자였다. 그는 ‘뽕’이 가진 희열과 비애의 양극단을 극한까지 증폭시켜, 이성적 판단이 끼어들 틈 없이 몸이 먼저 반응하게 만들었다. 그의 음악은 질문과도 같았다. 음악은 반드시 아름답고 정돈되어야 하는가? 통제되지 않는 감정의 분출 그 자체는 예술이 될 수 없는가? 당시에는 이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된 이가 거의 없었지만, 그가 던진 소리의 파문은 다른 시공간에 가 닿고 있었다.
감각의 포화, 그리고 이박사의 정신
이박사의 시대를 앞선 감각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잠시 하이퍼팝이라는 독특한 음악 양태를 경유해야 한다. 하이퍼팝의 본질은 특정 사운드 스타일에 있지 않다. 그것의 핵심은 청각을 통해 의도적으로 감각의 포화 상태를 만들어내려는 예술적 기획에 가깝다. 우리의 감각이 받아들이는 방대한 정보량과 뇌가 실제로 처리하는 정보량 사이에는 본질적인 간극이 존재하는데, 하이퍼팝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청자를 의도적으로 정보의 홍수 속에 위치시켜 감각적 한계에 부딪히는 듯한 아찔한 체험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처럼 감각을 압도하려는 전략들은 놀랍게도 이박사가 90년대에 이미 직관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의 ‘테크노 뽕짝’은 쉴 새 없는 전자음으로 청각을 포화시켰고, 의미를 알 수 없는 그의 추임새는 언어적 해석을 차단했다. 곡의 흐름은 안정적인 서사 대신 예측 불가능한 에너지의 분출과 단절로 가득했다. 그는 동시대 누구보다 먼저, 감각의 포화를 유발하는 음악적 방법론을 체화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박사는 하이퍼팝이라는 이름이 없던 시절의 하이퍼팝이었다.
중요한 것은 사운드의 유사성을 넘어, 음악의 관습적인 문법을 해체하고 소리의 물리적 한계를 탐구하려는 전위적인 ‘태도’ 그 자체다. 그리고 이 태도는 30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전혀 다른 장르인 힙합의 최전선에서 다시 발견된다. 바로 최근 한국 힙합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며 등장한 신예, 에피(Effie)의 음악 속에서다.
에피는 힙합이라는 틀 안에서 소리를 극한까지 밀어붙여 파편화하고, 예측 불가능한 질감과 구조로 재조합한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하는 것을 넘어, 이박사가 던졌던 감각의 포화 상태라는 화두에 동시대 힙합씬이 내놓은 가장 첨예한 응답처럼 들린다. ‘테크노 뽕짝’과 에피의 힙합은 장르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청자의 예측을 배반하고, 안정적인 감상을 거부하며, 소리의 물리적 쾌감을 극한으로 끌어올린다는 점에서 둘은 동일한 정신적 계보 위에 있다. 에피의 등장은 이박사의 ‘뽕’이 품고 있던 급진적인 실험 정신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것이었으며, 그것이 어떻게 장르를 넘어 가장 현대적인 형태로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250 : 감정이 머무는 공간의 설계자
20여 년이 흐른 뒤, 프로듀서 250은 이박사가 남긴 유산을 새로운 방식으로 탐구한다. 그의 앨범 《뽕》과 그 제작 과정은, 가장 깊은 개인적 탐구가 어떻게 가장 창의적인 예술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다. 자신의 음악적 정체성을 찾으려는 그의 여정은, 역설적으로 ‘뽕’이라는 문화 현상 전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의 작업 방식은 마치 고고학자가 유물을 다루는 과정과 같다. 과거의 유산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는 ‘뽕’이 탄생했던 특정 시대와 공간(카바레, 무도회장 등)의 맥락에서 그것을 떼어낸다. 그리고 단순히 먼지를 털어내는 것을 넘어, 디지털 기술과 현대적 음향 설계라는 새로운 좌대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오늘날의 청중이 그 본질적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게 한다.
그는 ‘뽕’의 핵심 요소를 분해하고 재조립한다. 예를 들어, 촌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멜로디나 리듬 패턴은 그대로 유지하되, 전체적인 사운드의 질감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섬세하게 다듬는다. 또한, 소리들 사이의 빈 공간을 음향적으로 설계하여 감정이 머물고 스며들 여백을 만든다. 그는 단순히 ‘뽕’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이 온전히 경험될 수 있는 하나의 정교한 음향적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다. 앨범에 이박사가 직접 참여한 것은 이 모든 탐구의 정점이다. 시대를 앞서갔던 에너지의 원천과 그 에너지를 새로운 형태로 빚어낸 탐구자의 만남. 이박사의 가공되지 않은 목소리가 250이 설계한 현대적인 공간 속을 유영할 때, ‘뽕’은 과거의 유물이 아닌 살아있는 예술로서의 현재성을 획득한다.
시대가 마침내 그 소음을 이해하다
이박사가 본능적으로 감각의 미래를 열어젖힌 천재였다면, 250은 그 감각을 동시대의 언어로 섬세하게 번역해낸 증명자다. 이박사의 음악이 통제 불가능한 에너지의 ‘분출’이었다면, 250의 음악은 그 에너지가 담길 수 있는 ‘공간’의 설계였다. 이 두 아티스트의 작업은 ‘뽕’이 고정된 장르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 형태를 바꾸며 살아남는 강력한 감정의 흐름임을 보여준다. 장르를 고유의 소리적 특질로 정의하려는 시도는 종종 한계에 부딪히지만, '뽕'은 듣는 방식과 태도에 따라 재정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결국 ‘뽕’의 귀환은, 모든 것이 데이터로 변환되고 감정마저 예측 가능해지는 시대에 대한 필연적인 반작용이다. 우리는 정제된 감각의 틀을 깨뜨리는 날것의 무언가를, 이성적 판단 이전에 몸으로 먼저 느낄 수 있는 정직한 소리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시대에, ‘뽕’의 솔직한 과잉은 오히려 억눌렸던 감정의 숨통을 틔워주는 해방구가 된다.
‘뽕’은 더 이상 촌스러운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 대중음악의 정돈된 외면 아래 숨겨져 있던 무의식이자, 가장 뜨겁게 들끓는 감정의 원형이다. 이는 어쩌면 한국 대중음악이 세계적인 세련됨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잠시 잊었던, 자기만의 고유한 심장 박동일지도 모른다. 시대가 너무 늦게 이박사를 이해한 것이 아니다. 시대가 마침내, 이 위대한 소음을 이해할 준비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