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을 넘어서기

<여러 노이즈 음악들>을 듣고 진동하며

by 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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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즈도 음악일까?“


이 질문은 단순한 미학적 논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음악’이라는 이름 아래 어떤 감각을 허용하고, 어떤 감각을 배제해왔는가를 되묻는 질문이다. 전통적으로 음악은 청각의 영역에 국한된다. 리듬과 멜로디, 하모니는 조율된 시간을 조직하고, 우리는 그 구조 속에서 감정의 고저를 유영해왔다. 그러나 때로 음악은 조직되지 않은 감각의 파편으로, 정돈되지 않은 진동으로, 우리를 강타한다. 그 파편은 흔히 ‘노이즈’라 불리며 음악의 바깥에 놓여 있었지만, 바로 그 바깥에서 새로운 청취의 가능성이 솟아오른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예술을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감각의 생성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예술은 혼돈 속에서 감각을 끌어올리고, 그 감각을 조직함으로써 기존 인식의 틀을 무력화하며, 그 자리에 새로운 지각을 창조하는 힘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노이즈 음악은 들뢰즈가 말한 감각의 예술과 가장 깊이 닿아 있다.

Autechre, Ryoji Ikeda, Alva Noto & Ryuichi Sakamoto, Merzbow. 이 네 명의 작업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음악은 청각만으로 구성되는가? 그리고 청취는 정말 ‘듣는 행위’에 국한되는가?


이 질문은 곧 감각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음악은 촉각적일 수 있는가? 시각적일 수 있는가? 공간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가?


이 글은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감각적 지도다.

그리고 그 지도는, 음악의 표면을 통과하며 감각의 지형을 더듬어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제 그 지도를 따라, 네 명의 아티스트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펼쳐놓은 감각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끝에서 우리는 다시, 출발점에 있던 질문 곁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Autechre – Confield (2001)

촉각적 음악, 해체된 리듬


영국 출신의 전자음악 듀오 Autechre는 인텔리전트 댄스 뮤직(IDM)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리듬 해체와 알고리즘 기반의 실험으로 독자적인 사운드 언어를 구축해왔다.


《Confield》는 음악이라는 구조물 자체가 어떻게 해체되고 재구성되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작업이다. 여기에는 멜로디가 없다. 박자는 있지만 안정된 템포는 없다. 「VI Scose Poise」를 재생하는 순간, 우리는 비트를 '듣는다'기보다, 신체 깊숙이 미끄러져 들어오는 운동감을 느낀다. 그 리듬은 뇌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무언가다. 비트는 일정하게 쌓이지 않고, 미끄러지며 툭 끊긴다. 규칙을 따르지 않고, 촉각의 곡선을 따라 진행된다.


이 앨범의 소리는 물성을 가진다. 무광의 금속처럼 거칠고, 차가우며, 닿는 순간 따끔하다. 청취자는 리듬을 따라가지 않는다. 대신 사운드의 표면을 더듬고, 누르고, 밀린다. Autechre는 리듬을 무너뜨림으로써 기존의 감상 경로를 봉쇄하고, 새로운 감각의 통로를 연다. 그것은 촉각 기반 청취, 즉 사운드의 표면을 손끝으로 읽는 감상의 방식이다.


음악은 더 이상 시간 위에 놓인 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감각의 표면이며, 운동하는 질감 그 자체다.




Ryoji Ikeda – Dataplex (2005), Test Pattern (2008)

청각에서 시각으로의 전환


Ryoji Ikeda는 일본의 사운드 아티스트이자 미디어 설치 작가로, 사운드를 데이터로 환원하여 정보의 구조를 감각화하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Ikeda는 Autechre가 파편화한 감각을 데이터 단위로 재정렬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음악적 구성과는 무관하다. 그는 사운드를 정보화하고, 고속의 수치적 패턴으로 재구성하며, 그 안에서 청취는 청각적 사건을 넘어서 시각적 체험으로 이행한다.


《Dataplex》의 음들은 일종의 클릭, 마찰음, 연산의 파열음들이다. 그 각각은 물리적 무게를 거의 가지지 않지만, 초당 수십 개의 점으로 발화될 때 청취자는 귀가 아닌 피부로 소리를 받아낸다.


《Test Pattern》에서는 앨범 전체적으로 점 → 선 → 패턴 → 격자 구조로 소리의 시각화가 급격히 일어난다. 마치 정지된 TV의 수직 싱크처럼, 고속 깜박임과 규칙적인 음압의 반복이 하나의 비주얼 리듬을 형성한다. 소리는 고속 스캐너처럼 몸 위를 지나가고, 우리는 그것을 '듣는' 것이 아니라 ‘스캔당하는’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Ikeda의 음악은 소리가 아니라 정보의 파장이다. 그는 감각의 분해와 재배열을 통해, 우리가 소리에서 ‘느끼는 것’의 실체를 보여준다. 음악은 이제 청각의 장면이 아니라, 시각과 압각의 사건이다.




Alva Noto & Ryuichi Sakamoto – Vrioon (2002)

정서의 여백, 공간의 음악


독일의 미니멀리즘 아티스트 Alva Noto와 세계적인 작곡가 사카모토 류이치는 디지털 노이즈와 피아노를 병치시키며, 정제된 감각과 여백의 미학을 탐색해왔다.


Autechre와 Ikeda가 감각을 해체하고 재조립했다면, Alva Noto와 사카모토는 그 틈에 정서의 잔향을 흘려넣는다. 이들의 협업은 미세하게 정제된 전자음과 불안정하게 울리는 피아노 사이의 감정 없는 감각, 감각 위에 놓인 정서, 그 불균형에서 태어난다.


「Uoon I」는 단순한 피아노 앰비언트가 아니다. Alva Noto의 글리치는 마치 유리 입자처럼 바닥을 굴러가며 극도로 정제된 디지털 텍스처를 남긴다. 그 위를 사카모토의 피아노가 미세한 진동처럼 스쳐간다. 이 감각은 애도도 아니고, 평온도 아니다. 감정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여백에 머무르는 상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소리 사이의 ‘침묵’ 역시 적극적인 질감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정적은 피아노와 전자음 사이의 틈을 연결하며, 감정의 여운이 머무를 수 있는 온도 없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청취자는 그 여백 안에 머무르게 된다. 촉각과 청각의 경계는 흐려지고, 소리는 정서적 입자로 변환된다. 이 음악은 감정을 전달하지 않는다. 대신 감정이 발생하기 직전의 공간을 체험하게 한다.




Merzbow – Pulse Demon (1996)

감각의 극한, 청취의 거부


Merzbow는 일본의 노이즈 음악가로, 1990년대부터 전 세계 하드코어 사운드의 전위에서 청취의 한계를 극한으로 밀어붙여왔다.


그의 대표작 《Pulse Demon》은 청취의 모든 전제를 붕괴시킨다. 이 앨범에는 구조가 없다. 흐름도 없다. 서사도 없다. 오직 압도적인 음압의 밀도, 그리고 전 대역에 걸쳐 분산된 고주파 스펙트럼이 존재할 뿐이다. 100dB 이상의 연속적인 고주파는 특정 음고나 리듬을 식별 불가능하게 만들며, 약 15kHz 이상의 고역대에서는 청각의 한계를 넘는 공기 진동으로 작동한다. 이 사운드는 귀로 '감상'할 수 있는 지점을 의도적으로 넘어서며, 몸의 물리적 반응만을 유도한다.


청취자는 이 소리를 해석하거나 도피할 수 없다. 어떤 이는 귀를 막고, 어떤 이는 무음을 재생하며 상상 속에서만 이 소리를 '듣는다'. 심지어 일정 시간 이상 청취가 불가능한 ‘물리적 한계’가 명확히 존재하는 작품이다.


《Pulse Demon》은 듣는 경험이 아니라, 감각의 극한을 관통하는 물리적 사건이다. 그것은 진동의 포화 상태로, 청각뿐 아니라 피부, 내장, 신경계 전반에 작동하는 음압의 압력이다. 그러나 바로 그 극단에서, 감각은 역설적으로 되살아난다. 소리는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대신 청자는 고통, 압력, 밀도를 통해 자신 안의 감각 경계와 마주하게 된다. 청취는 해체되었지만, 해체된 자리에서 몸은 다시 반응한다.


Merzbow는 듣는 행위를 무력화시키는 동시에, 감각의 생존 본능을 깨운다. 그는 음악이라는 형식을 해체한 것이 아니라, 감각이라는 존재조건을 시험하는 것이다.




감각의 음악, 혹은 음악의 재정의


이 네 개의 앨범은 모두 음악의 경계에 있다. 그들은 기존의 미학적 정의로는 측정되지 않지만, 청취자의 감각을 구성하고 해체하며 다시 조립한다. 그 감각은 리듬이나 멜로디보다 훨씬 깊은 곳, 신체 내부의 진동과 지각의 문턱 위에서 일어난다.


Autechre는 음악의 표면을 해체했고, Ikeda는 그 파편을 정렬했다. Noto & Sakamoto는 그 틈에 감정의 여운을 흘려 넣었고, Merzbow는 그것마저 무너뜨렸다. 그러나 이 정리는 단순한 역할 분담이 아니다. 이 네 작업은 마치 하나의 지각적 지형도처럼 맞물려 있다. 이들은 각각 촉각, 시각, 정서, 압각의 층위에서 음악을 재구성하고, 감각의 작동방식을 다시 짜 맞춘다.


노이즈는 더 이상 소음이 아니다. 그것은 음악의 정의를 재구성하는 감각의 언어이며, 청취의 경계를 확장하는 지각의 실험이다. 이 음악들은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것’으로 작동하며, 감각 그 자체를 미학의 중심으로 소환한다.


"노이즈도 음악일까?"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듣는 자’가 아니다.

음악을 지나고, 음악 속을 통과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의 감각은 재구성된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확장된 의미에서의 음악이다. 음악의 정의는 이제, 이 감각의 지도 위에서 다시 쓰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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