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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제르 Aug 28. 2023

빈 집에서 보글보글 끓는 자유

방학이 끝났다는 이야기 입니다.

  4주 만의 혼자타임을 보냈다. 아이들을 보내고 텅 빈 집에서 책을 보고 공부도 하다 슬슬 배가 고파지던 차에 부엌 서랍에서 안성탕면을 발견했다. "앗싸. 오늘 점심은 라면 먹어야지!" 


  어릴 적 엄마는 라면을 싫어했다. 당신이 싫어했다기보다는 나에게 라면 주기를 싫어했다. 어쩌다 한번 우리에게 라면을 끓여줄 때면 사골 누렸던 물을 왕창 넣고 라면 스프 한 꼬집을 뿌려 가짜 라면을 만들었다. 맛도 없고 감동도 없던 조리법을 무시한 채 탄생되곤 했던 엄마의 라면. "라면이 얼마나 안 좋은지 실험을 했는데 글쎄, 라면만 먹었던 쥐가 그렇지 않은 쥐에 비해서 금방 병들어 죽어 버렸대."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실험을 했는지의 진실 여부도 알 수 없는 엄마의 이야기가 퍽 무섭게 들렸다. 과장 좀 보태서 우리 집에서 라면은 금기의 음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캠핑장에서 아빠가 엄마와는 다른 방식으로 '조리법을 초월해 요리'한 라면은 환상이었다. 이른바 군대 라면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몸에 좋진 않지만 어느 특별한 장면에서는 환상의 맛을 낼 수 있게 허락된 모순의 음식 라면. 커갈수록 엄마, 아빠는 나를 집에 두고 여행하는 일이 잦아졌고 그때마다 혼자된 나는 라면을 끓여 먹었다. 조리법대로 조리된 라면은 맛있구나. 적막한 빈집에서 홀로 먹으면 더 맛있는 음식이구나.    


  고등학교 졸업 후 집밥보다 식당밥을 더 많이 먹으며 지낸 20대에는 라면을 밥상에서 만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3년 전 여름, 두 돌이 지난 첫 아이를 어린이집에 처음 보내고 먹은 첫 음식은 다름 아닌 라면이었다. 적응기간이라 2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도 있었지만 며칠간은 라면만 먹었다. 오랜 시간 방치되었던 텔레비전을 틀어 놓고는 그 앞에 아이의 공부상을 두고 앉아 짜고 뜨거운 라면을 먹었다. 깨울까 신경 쓸 이 없는 적막한 집에서 시끄럽게 후룹대며 먹었다. 둘째가 태어나고 그 아이의 두 돌이 지나 어린이집에 처음 보낸 날에도 라면을 먹었다. 이쯤 되면 나에게 있어 라면은 '자유 의식'이 아닐까.


  왜 라면이었을까. 다른 육아인들이 그렇듯 평소 아이들의 식사를 챙길 때마다 내 끼니를 챙길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어린아이들의 슴슴하고 멀건 음식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더 맛있는 걸 먹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내 한 입 덜면 다음 차례에 돌아올 끼니에 한 번 더 데워주고 구워줄 수 있을 터였다. 당장 만족하지 못할 식사를 할 바에야 다음 끼니 걱정을 덜고 싶었다. 입맛은 없지만 생리적으로는 배고픈 상태로 아이들의 식사를 준비하며 부엌 장을 이곳저곳 열고 닫을 때마다 빼꼼 눈에 띄는 것은 라면이었다. 아 이 라면 끓여 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얼마나 맵고 자극적일까. 


  그러나 아이들에게 라면 먹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몸에 좋은 친환경, 유기농 음식만 먹여야 한다는 주의는 아니지만 고지식한 내가 은근하게 고집하는 '좀 그런 게' 몇 가지 있다. 텔레비전 보여주기가 그렇고 잠자리 아닌 곳에서 자게 두는 것이 그렇다. 라면 먹는 모습은 뭐랄까. 라면은 몸에 안 좋은 음식이라는 말을 들으며 살아온 내가 저들 앞에서 후루룩후루룩 라면 먹방을 보이는 것은 좀 모순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렇게나 맛있는 라면을 맛없는 척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나에게 라면은 잔소리할 누군가, 옆에서 이 '나쁜 음식'에 군침 흘리며 바라볼 누군가가 없는 자유함을 누릴 때만 끓일 수 있는 음식이다. 아이 없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면서 아이의 방해 없이(라면 국물에 손가락을 푹 하고 담그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눈 뜬 아이는 무언가 끊임없이 요구하므로) 즐길 수 있는 자유의 시간이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빈 집에서 라면을 끓였다. 보글보글. 아이들의 여름방학이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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