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 노동자라면 나날이 챙겨야 할 그것
마카롱 가게가 새로 오픈한다는 현수막이 걸린 것을 본 날부터 디데이를 세기 시작했어요. 집 근처에 새로운 가게가 오픈한다는 것은, 그리 놀라울 일도 특별할 일도 아니었을 거예요. 하지만 저에게는 마카롱 가게를 오픈하는 사장님의 마음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운전을 할 줄 몰랐던 제가 작은 아기를 태운 유아차를 끌고 갈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현수막이 걸리고 몇 주 뒤 기다리고 기다리던 가게가 오픈했어요. 홀로 간다면 캡 모자 푹 눌러쓰고 술렁 살랑 휘리릭 다녀왔을 곳인데 작은 아기를 데리고 외출하는 일은 왜 그리 어렵던지요. 그때는, 아기는 언제든 울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아기의 수유 시간을 피해서, 낮잠 시간을 피해서, 씻기는 시간을 피하다 보니 갈 수 있는 시간이 제한적이었어요. 이런저런 이유들로 제외하고 남은 몇 안 되는 시간 중 아기가 기분 좋을 타이밍에, 울지 않고 마카롱 가게에 다녀올 수 있는 시간을 헤아리느라 온 신경을 다 쏟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럴 일도 아닌데요, 둘째 아이는 신생아 딱지를 뗄 무렵부터 누나의 등원길에, 놀이터 산책에 데려 다니곤 했는데요! 누구에게나 첫 아이는 이렇게 노심초사하는 대상인 경우가 많은 것 같지요.
이렇게 '도달'하기 어려웠던 마카롱 가게는 일주일 중 절반을 열고 절반은 문을 닫았습니다. 그러잖아도 한번 가려면 엄청난 용기를 내고 아이와 침묵의 협상을 하느라 골똘한 시간을 보냈어야 했는데, 갈 수 있는 날마저 며칠 되지 않다 보니 '맛'과 상관없이 꼭 가야 하는 곳이 되어 버렸어요. 오기로 다닌 것은 아니었어요. 인절미 맛, 피스타치오 맛, 황치즈 맛, 민트 초코 맛, 초콜릿 맛, 레드벨벳 크림치즈 맛, 바닐라 맛, 크림브륄레 맛....... 등등. 꽤 특별하고 다양한 옵션들 중에서 어떤 맛을 고를지 고민하고, 선택하는 과정을 통해 다름 아닌 '통제감'을 경험했습니다. 쾌적한 쇼케이스 안에서 희고 멀건 아기의 것들과는 다른 형형색색을 뽐내는 마카롱들을 구경하고 결정하는 일은요, 아기와 샴쌍둥이처럼 밤낮으로 붙어 있는 시간 동안 오롯이 '내가' 하는 선택으로 결정되는 일이었습니다. 24시간 중에서 오직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라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비로소 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맛보다는 기분내기용으로(물론 그곳은 아주 유명하진 않았지만, 맛집이었어요.) 사모았던 마카롱들이 냉장고 속에서 방치되는 날이 길어지면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나는 지금 힘들구나,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달달한 오후의 디저트가 아닌 통제감이었구나. 저는 쇼케이스 속의 마카롱이라는 작품들을 손수 고르는 데서 자기 통제감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는 그 작은 것에 몇 천 원씩 지불하는 것에서부터 기껏 사 온 것조차 썩혀 버리는 과정이 퍽 사치스럽게 느껴졌을 거예요. 결국 먹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도 저의 선택들 중 하나였을 테니까요. 누가 봐도 합리적인 선택 같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이렇게 비합리적으로 느껴지는 선택의 반복은 제가 작은 아기만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자기 통제감이라는 것은 한 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절할 수 있다고 느끼는 감정을 의미합니다. 학자에 따라 조금씩 견해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개인이 자기 통제감을 상실한다면 '내 힘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부정적인 상황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은 무기력감으로 이어질 수 있겠지요. 무기력한 날들이 길어지면 우리가 흔히 아는 우울증이 될 수도 있고요.
"안 먹고 썩힐 거면서 왜 자꾸 사 오는 거야? 그만 사." 어느 날 남편이 무심하게 던진 한 마디에 눈물을 왈칵 쏟았던 기억이 나요. "왜 나는 그것도 못하게 해? 그것도 못 사게 해?" 억울하고 서러웠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역시 힘든 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이내 마카롱과 자기 통제감이라는 나만의 심리 모형을 만들고서는 선언 내지 혹시나 닥칠 상황에 대해 미리 도움을 요청하는 말을 했었더랬지요. "오빠, 내가 어느 날 마카롱을 사는 일을 멈추잖아? 그럼 내 마음을 좀 돌아봐 줘. 나 많이 힘든 상태일 수도 있을 거야."라고요. 어떤 선택도 나를 위로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는, 어떤 선택도 할 힘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 이르렀을 때는, 그리고 제법 꾸준히 반복해 오던 리추얼을 그만 두기로 한 때에는, 보다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한 때일지도 모르겠다고요.
합리적인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나 자신을 돕는 모든 방법이 합리적일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소박한 방법으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선택들을 통해 통제감을 경험하는 일을, 일상으로 끌어와 반복하면요. 도화지에 사인펜으로 툭 하고 찍은 점이 점점 번져 나가며 제 색깔(존재)을 드러내듯, 아기로 가득 차 있던 일상 속에서 새삼스럽게 나의 존재를 마주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지요.
오늘 제가 돌봄 노동자 가이드에 처음으로 소개하고 싶었던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어요. 합리성이나 당위성을 확인하기 위한 많은 질문은 필요 없지요. 나를 위한 것이니까요. '그럴' 여유가 없다고 느껴질수록, 벅찰수록, 나를 위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선택을 만들어 봅시다. 아이의 두 번째 낮잠 직전에 유아차를 끌고 나가 내가 좋아하는 산책로를 걷기를 선택해요. 아이가 유아차에서 낮잠에 들면 내가 좋아하는 라테 맛집에 들러요. 평소 분위기가 좋아 드나들던 곳도 있을 것이고 커피 맛이 좋아 찾던 곳도 있을 거예요. 그들 중 한 곳에 들르기로 선택해요. 나를 위해 내어 진 고소한 카페 라테를 마시기로 선택해요. 아이가 없었을 때는 멈출 필요가 없던 지금에 머무르며, 아이와 함께하지 않았더라면 제대로 바라본 적 없던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기로 선택해요. 이 시간을 나만의 리추얼로 삼기로 선택해요. 어느덧 육아 퇴근 시간만큼이나 기다려지는 시간이 생겨요. 언젠가를 기다리고 기대하며 선택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무기력감과 우울감이 좀처럼 깃들지 않게 됩니다.
당신은 오늘 어떤 선택을 하기로 마음먹었나요? 어느 때를 기대하기로 했나요? 소박한 당신의 계획이 들려오기를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