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선,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언니네 집에 초대를 받게 되었다. 아이를 데리고 외출하기에는 한파가 너무 극심했기 때문이다. 예상은 했지만 인생 4개월 차인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은 꽤나 쉽지 않았다. 언니와 같이 식탁에 앉아 샐러드와 후토마키를 다 먹는 데 체감상 1시간은 더 걸린 것 같다. 대화를 나누면 우우에에, 한 입 먹으면 으앙, 한 젓가락 먹으면 우앵. 강력하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생명체 덕에 언니와 나는 먹는 속도가 엄청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긴 식사를 하다 보니 중간에 배가 찼고, 그 적은 양을 둘이서 다 먹지도 못했다.
언니가 식탁을 치우고 디저트를 준비하는 동안만 아이를 잠깐 봐달라고 했고,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 아이를 건네받았다. 7kg의 무게가 상당히 묵직했다. 언니가 아이를 안고 있던 모습대로 나름 복사해서 붙여 넣기를 했는데, 어설픈 초보의 손길을 느꼈는지 아이가 노여워하기 시작했다. 칭얼대면서 제대로 좀 안으라고 경고를 여러 번 했으나 무경력 초보는 그 기회를 날려버렸고, 결국 돌고래 소리를 이끌어내고야 말았다. 그때 알았다. 아기가 정말로 노엽고 성질이 나면 숨을 참으면서 얼굴이 시뻘게지다가 복식으로 사이렌 소리를 낸다는 걸.
"제발 뭐가 그렇게 불편한 지 얘기를 해줄래."
나도 모르게 아이한테 사정을 하고 있었나 보다. 주방에서 언니가 내 모습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렇게 자주 말해. 도대체 왜 우는 거냐고."
울음이 잦아들지 않자 언니는 디저트 세팅 마무리를 나에게 부탁하고 아이를 품에 안았다. 울고 있는 아이 얼굴에 거즈 수건 같은 걸 덮고 아기 엉덩이인지 등인지 애매한 경계를 경쾌하게 때리기 시작했다. 때린다는 표현이 다소 과격하게 들리긴 하는데, 진짜 언니가 드러머고 아기가 드럼이었다. 내가 예상한 부드러운 토닥토닥, 다독임은 아니었다. 과연 저게 통할까 싶었는데 아이가 점점 진정되더니 잠에 이르렀다. 세상에? 신기했다.
아이가 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다. 언니와 눈을 마주치며 여유롭게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집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이의 용품이나 생활용품이 누가 봐도 '언니'의 색을 담뿍 담고 있었다. 아이를 키우는 집은 인테리어를 포기한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언니네 집은 그 말을 비껴간 듯했다. 앤틱 한 걸 좋아하는 언니의 취향이 느껴지는 책장에, 그 위에 조그마한 핸드메이드 우드입간판, 책을 읽고 있는 귀여운 동물 피규어들. 집 곳곳에서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귀여움과 차분함이 언니의 취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언니가 디저트와 함께 마실 차를 내올 때에도, 앤틱한 티팟과 잔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어쩌면 내가 극단적으로 사고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엄마가 된다는 건 무조건 포기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나의 색깔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선택해 나간다면 나를 지키면서도 삶이 좀 더 풍요로워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아이를 갖기 전에 충분한 시간을 들여 '나다움'에 대해 사유하고, '나다운' 선택을 쌓아가야겠다. 언니에게서 느껴졌던 여유로움과 아름다움은 어쩌면 그 힘에서 나오는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장소, 내가 좋아하는 물건, 내가 좋아하는 시간, 내가 좋아하는 음악, 내가 좋아하는 책.. 나의 삶을 풍요롭고 만족스럽게 하는 핵심 키는 결국 '나'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