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할머니의 육아일기
'나도 저렇게 멋진 할머니가 될 거야.' 대학 졸업 여행으로 동생과 방문했던 오스트리아 길거리에서 오가는 수많은 노년의 시민들을 보며 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젊어 보이려고 애써 까맣게 염색하지 않은 백발의 머리, 자신의 취향이 느껴지는 패션 아이템, 또래와 어울려 클래식 음악이 나오는 카페에 앉아 수다를 떠는 장면이 여전히 내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일상을 여유롭게 누리며 행복을 향유하는 아름다운 노년 라이프. 이전까지 내게 노년의 삶은 다소 고요하고 무기력하고, 혼자 쓸쓸히 앉아있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날의 장면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멋진 할머니', '나이 듦'에 대한 동경을 갖게 했다.
오스트리아 시민들에 이어 나에게 또 새로운 '할머니' 상이 생겼다. 오늘 문장의 주인공인 박정희 할머니. <일기 쓰는 법> 책을 읽다가 '박정희 할머니의 육아일기를 읽으면 분명히 일상 기록을 하고 싶어질 것'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생겨 동네 도서관 어플을 켜고 도서를 검색해 봤다. 동네 8개의 도서관 중에 단 한 곳에서만 1권을 소장하고 있었다. 심지어 보존서고에 보관 중이었다. 궁금한 마음이 더욱 커져서 바로 상호대차 신청을 했다. 책을 받던 날, 백과사전 같은 크기와 두께에 당황했다. 내용을 살짝 살펴보니 4녀 1남의 육아 일기 원본을 사진으로 수록하고 글을 담은 거라 크기가 커지고 두께감이 상당한 것이었다. 책 날개에 박정희 할머니의 사진이 있었는데, 온화하고 자애로운 분위기에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작가 소개를 읽으며 더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이 분은 정말 '멋진 할머니'일 거라고.
연세대학교 사학과 백영서 교수는 "역사를 통해 현재 우리의 정체성(identity)을 확인하고 바람직한 미래의 우리를 세울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라고 말하며 박정희 할머니가 쓰신 육아일기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박정희 할머니가 자식들이 '자기의 존재가 퍽 고맙고 귀하다고 생각하고 기쁘겠기에’, '너희 일생을 통해 큰 힘'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육아일기를 썼기 때문이다. 꾹꾹 눌러쓴 손글씨와 그림이 담겨 있는 할머니의 육아 일기를 느릿하게 따라가며 글을 쓰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글은 독자가 있다는 전제하에 쓴다. 육아일기를 쓰는 목적이 무엇인가, 이 기록을 누가 읽게 될 것인가, 박정희 할머니는 이를 먼저 생각했다. 이 일기는 자식들이 훗날에 읽을 것이기에, 그들이 스스로가 귀중하고 소중한 존재임을 느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유년 시절 중 찬란하게 빛나고 따스한 순간들을 수집했다는 게 인상 깊다. 나였으면 육아일기라고 말은 하지만 결국은 '나'를 중심에 두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고난기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쓴 육아일기를 이후에 아이가 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하다. 이 책을 아이 낳기 전에 만나서 정말 다행이다. 육아일기를 아이의 역사이자 정체성의 장이라고 생각하니 미래 독자인 아이를 위해 기록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주변 이웃들과 가족이 너라는 존재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너를 돌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정성이 필요했다는 걸 기록해 둔다면, 후에 자연히 내 자식도 받은 사랑을 기억하며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나도 저렇게 멋진 할머니가 될 거야.' 속에 그동안은 멋지게 늙어 나의 일상을 자유롭게, 행복을 향유하는 이미지였다면,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하게 되었다. 바로 '나눔'. 박정희 할머니는 가지각색의 꽃과 나무, 풀, 언덕 등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동시에 주변 사람들에게 그림 그리기를 가르쳐주고 있다고 한다. 재능뿐만 아니라 그림 그리기로 얻은 소득을 시각장애인 단체에 기부하며 다양한 나눔을 실천하고 계신다. 정말 '멋진 할머니'라고 다시 한번 더 감탄할 수밖에 없다. 멋진 할머니로 아름답게 늙는다는 건 어쩌면 나뿐만이 아니라 주변과 함께 기쁨과 감사를 나누는 삶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과연 노년의 나는 무엇이 나에게 더 없는 행복이었다, 고백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