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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 May 12. 2024

살까 말까 할 때 사는 사람

장인성, 마케터의 일


이 문장을 여러 번 곱씹다가, 국어사전에서 '자산'의 뜻을 찾아보았다. 자산이란 '개인이나 집단이 미래에 성공하거나 발전할 수 있는 바탕이 될 만한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최선을 다해 많이 경험합시다,라는 말로 끝나는 말에 나는 어떤 사람인가 생각해 보았다.


나는 살까 말까 할 때 사지 않는 사람이고, 할까 말까 할 때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동생과 갔던 유럽여행에서 있었던 일이다. 클림트 작품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오스트리아를 동선에 겨우 구겨 넣어서 갔다. 벨베데레 궁전 안에서 그의 작품을 본 순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반짝이는 화려함에 감탄만 절로 나왔다. 동생은 나와는 달리 클림트 작품에는 흥미가 없고 천장에 그려진 화려한 벽화로 고개를 쳐들고 연신 감탄했다. 화가들이 굉장히 고생하며 그렸겠다며, 분명 목 디스크가 걸렸을 거라고 말이다. 그렇게 궁전을 나오면서 나는 연신 클림트 작품을 직접 본 일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고, 동생은 무심하게 들었다. 오스트리아를 떠나는 날, 우연히 들어간 상점에 클림트 굿즈가 있었다. 클림트의 작품이 프린팅 된 손바닥만 한 반원의 파우치였다. 그 당시 유럽여행을 할 때 동생과 하루 용돈을 정해놨었다. 주어진 용돈 안에서 살 수는 있었지만, 혹시나 이동한 도시에서 다른 걸 사고 싶을까 봐 만지작 거리면서 고민을 계속했다.


"언니 그럴 거면 그냥 사. 여기(오스트리아)에서만 살 수 있는 거잖아."

"그래도... 비싼데."

"언니 오늘 돈 안 썼잖아. 그걸로 사면되지."

"그래도... 혹시나 딴 데에서 사고 싶은 거 생기면 어떡해."


한참을 망설이던 나는 결국 파우치를 내려놓고 애써 밝은 얼굴로 동생에게 이만 가자고 말했다. 동생은 자기는 좀 더 둘러보겠다고 했고, 나는 그 장소에 더 머물면 아쉬움에 또 만지작거릴 것 같아 밖에 벤치에 앉아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이 나왔고, 같이 기차역을 향해 걸어갔다. 기차에 앉아 수기로 역 이름을 작성하고, 동생도 제대로 썼는지 확인해 주는 동안 천천히 풍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니, 아까 안 사서 아쉽지 않아?"

"약간..? 살 걸 그랬나. 아니야, 괜찮아."

"으이구, 자!"


동생이 무심하게 종이 뭉치를 하나 건넸고, 풀어보니 내가 아까 고민하던 그 파우치가 안에 들어있었다. 순간 멍하니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때의 장면을 떠올리는 지금도 울컥, 코끝이 살짝 찡해진다. 단순히 고맙다는 마음이 아니라 뭐랄까, 그 순간에는 동생이 나보다 큰 어른이고 언니처럼 느껴졌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이걸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찌그러진 얼굴로 말처럼 히이잉 거리며 동생 이름만 연거푸 부르는 나를 향해 동생은 무심히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렇게 계속 만지작거릴 정도로 사고 싶었으면서 왜 안 사. 사고 싶을 땐 그냥 사, 언니."


그 뒤에 내가 뭐라고 반응했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이때의 풍경과 동생의 말, 내가 느꼈던 감정만큼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물론 클림트 작품이 요즘엔 투게더 아이스크림의 용기로 프린트될 만큼 굉장히 상업성 짙은 흔한 작품이 되었지만, 여전히 나에게 클림트 작품은 동생과의 소중한 추억, 그 이상이다.


그 이후로 나는 살까 말까 할 때 사는 인간이 되었다.라고 끝나면 굉장히 아름다운 결말이겠지만, 난 여전히 살까 말까 할 때 사지 못하고 서성이는 사람이다. 그때에 비해 조금 성장한 게 있다면, 사지 못하고 돌아섰다가 그런 내 모습을 이겨내려고 요즘엔 다시 사러 간다는 거다. 최근에(이 글을 썼을 때는 1월이다. 글을 4개월이나 묵혔다니..!) 시장에 갔다가 한라봉 6개에 9900원에 파는 걸 보고 걸음을 멈췄다. 만약 저 한라봉을 산다면 내가 집을 나설 때 세웠던 예산을 초과하는 상황이었다. 살까 말까 한라봉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다가 '한라봉 드릴까요?'라고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시장을 등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한라봉을 떠올렸다. 한라산처럼 봉긋한 꼭지에 달린 귀여운 이파리, 그 부분을 꺾었을 때 사방으로 팍 터지는 과즙과 새콤한 향, 단단한 껍질에 쌓인 탄탄한 과육, 한 입 베어 물면 입 안 가득 퍼지는 그 맛. 집에 다 와서야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 한라봉, 그거 하나 못 사 먹나 서글픈 마음에 결국 다시 시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야무지게 한라봉을 거머쥐었다. 쓰고 보니 그때의 나보다는 발전한 것 같다. 이 자산의 공은 모두 언니 같은 동생에게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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