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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권 Aug 27. 2019

즉흥연주를 배우다.


     

재즈를 좋아하기 시작한건 서른을 넘긴 나이가 되고 나서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우여곡절 끝에 대학교 교직원이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는데, 당시만 해도 이례적으로 높은 경쟁율을 뚫고 입사한 그 직장이 나는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 단조로운 삶 안에서 나는 뭔가 의미있고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었고, 다시 음악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꽤 열심히 활동했던 헤비메탈 밴드를 그만 둔지 근 10년이 넘었는데다가 이미 헤비메탈의 시대는 예전에 지나가버렸기에, 우연히 발견한 당시 피씨 통신 천리안의 재즈동아리에서 재즈연주 소모임을 발견하고는 당시 앨범을 하나씩 모으며 듣던 재즈를 직접 연주하겠다는 용기를 내고 가입을 했다.        

사실은 아무나 뽑는 통과의례였던, 간단한 오디션을 거치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초보자 밴드를 구성하게 됐다. 처음에는 보컬을 지망했지만, 곧 재즈연주에서 보컬은 가장 인기없는 파트라는걸 알게 됐고, 뭔가 악기를 연주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그나마 만만해 보였던 드럼을 시작했는데, 혼자서 책을 보며 끙끙거리며 연습해온 8비트 리듬을 듣던 나이어린 친구가 참다못해 말했다.    

 “형 뭐 다른 악기 배운거 없어요? 도저히 못 들어주겠네.”     

 할줄 아는 거라곤 초등학교 때 배운 바이올린 밖에 없었으므로 나는 십수년을 묵혀온 악기를 다시 꺼내어 연주를 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바이올린으로 재즈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유진박 밖에 없었으므로 친구들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우리나라 재즈바이올린 2인자라는 별명을 붙여줬는데, 물론 바이올린 하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내 등수는 점점 내려갔다. 스즈키 교본조차 다 떼지 못하고 접은지 15년이 넘은 사람이었으니 아마 정확히 바이올린을 들고 재즈연주를 하는 사람의 숫자와 내 등수는 일치했을 것이다.         

 그때 가장 부러웠던 사람들은 즉흥연주가 가능한 사람들이었다, 음악이론에 대한 이해 바탕으로 주어진 코드 안에서 자유롭게 음을 변주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나도 피아노나 기타 같은 화성악기를 했다면 화성에 대한 이해가 빨랐을 텐데, 선율악기인 바이올린 말고는 연주한 경험이 없는데다가 화성에 대한 지식이 없던 나는 바이올린으로 악보에 그려져 있거나 내가 기억하는 음정을 그대로 복기하는게 고작이었다.     

 재즈의 핵심인 즉흥 연주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정해진 파트를 서로 다른 악기를 애드립으로 연주하며 주거니 받거니 하는 부분인데, 듣다보면, 특히 연주자들이 서로 눈빛과 음악으로 교감하며 음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다보면, 음악이 하나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저절로 실감하게 된다. 그 사람의 악기에 대한 숙련도와 음악의 이해가 따라 준다면 그의 감성이 충만 할때는 연주자들은 정말 멋진 순간을 만나게 된다. 마치 밤하늘에 펼쳐지는 불꽃놀이처럼 누군가가 기록하지 않았다면 단 한순간 존재했다가 사라져버리는, 지속될 수도 없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멋진 순간이다.                  

 홍대 옆 상수동에서 재즈카페를 하는 선배네 가게에서 한달에 한번 씩 열리는 연주날를 앞두고, 그날도 잠실 신천에 있는 지하 연습실에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존 콜트레인이 자신의 앨범에서 정말 멋진 애드립을 들려줬던,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삽입곡인 마이 페이보릿 씽을 연습하던 때로 기억한다. 서로 돌아가며 솔로파트를 연습하던 중 예의 그 주고받는 연주가 시작되었다. 친구들이 음악에 몰입해 음악으로만 할 수 있는 대화를 하는 동안 나는 그저 내 악기를 붙잡고 베이스가, 피아노가, 색소폰과 드럼이 즉흥연주로 서로 주고받는 대화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 초보자 밴드에서 색소폰을 불던 형이 말을 걸어왔다. 낮에는 경비회사 일을 하고 저녁에는 악기연주를 하던 그 노총각 형의 검은 얼굴은 아직도 생생하다.         

“희권아, 그냥 시작해봐. 잘하려고 할 필요 없어. 네 느낌대로 해  다른 사람들은 신경쓰지 말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지만, 그 형의 독려와 친절한 다른 구성원들의 응원덕에  나는 조금 용기를 내어 활을 들고, 조금씩 연주를 시작했다. 내가 연주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헤드라 불리는 주요 멜로디 뿐이었지만, 이미 처음에 연주했던 헤드가 다시 나온다는 것은 곡을 마무리 할 때 뿐이었으니 그걸 다시 연주할 수는 없었다. 나는 끊임없이 다른 악기들이 서로를 독려하며 앞으로 이끌어 나가는 흐름 속에 있었고, 그 흐름이 나로 인해 끊어지는 일은 없어야만 했다.         

 나는 그 곡의 코드도 알지 못했지만(지금도 모른다), 내가 어떤 음을 연주하면 어울리고 어떤 음은 맞지 않을 것이라는 곧 몸으로 깨닫기 시작했다. 이건 사실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음의 높이가 수학적으로 특정 비율을 유지하는 음들에 대해 인간은(아마도 동물은?) 본능적으로 통일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몸으로 아는 것은 오로지 직접 연주행위에 참여 하는 것. 전체를 구성하는 베이스와 드럼, 그리고 다른 악기와의 조화속에 존재하는 시간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렇게 통일감을 느끼는 능력은 우리가 미추를 판단하는 본능적인 기준이 된다.     

 가끔은 호기롭게 내지른 음이 묘한 불협화음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곧 박자를 쪼개어 주위의 음으로 옮겨타며 내가 낸 소리가 존재해야 하는 공간으로 은근슬쩍 옮겨가는 요령도 배우게 되었다. 심박수가 높아졌지만 긴장이 되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이전에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영역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때 나를 독려했던, 모조품 셀마 색소폰을 연주하고 우스갯소리를 잘하던 그 형은 군대 관악대에서 나팔을 불기 시작했고 제대로된 음악 교육과정을 통과한 바 없이 음악을 들으며, 몸으로 그런 연주를 배웠다고 말해줬다. 과거 재즈라는 음악의 토대를 형성한 재즈의 거인들, 우리암스트롱, 찰리파커 같은 사람들은 이렇게 음악을 배운 사람들이었다. 악보를 읽지 못하니 음을 통째로 외웠고,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을 때는 롤모델의 연주를 그대로 복기하다보면 어느 순간엔가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고, 그런 스타일들이 서로 교류하고 경쟁하며 서로가 서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재즈라는 음악이 발전해 왔다.         

 음악이론에 기초한 계산 없이 자기 흥과 느낌으로만 진행하는 이런 즉흥연주를 음악하는 사람들은 약간 얕보는 느낌으로 “오부리”라고 불렀다. 아마 이말은 자유롭게 음을 변주하는 방식을 의미하는 오블리가토(obligato)에서 온 말일 것이다. 즉흥 연주를 음악이론의 토대 없이, 느낌과 감각으로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날 그 형 덕에 몸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그날의 강렬한 체험은 내가 자신감을 갖고 제대로 된 밴드를 결성해서 시작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돌로만든 무덤에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주던 대학의 석조건물에서 벗어나면, 나는 퀴퀴한 냄새가 나는 연습실로 향했고 연습실에 온 사람들끼리 재즈 스탠다드를 연주하거나 다른 악기 연주자들이 연습하는 스케일을 연습할 때도 있었다. 화성악을 알지 못하지만, 초보적인 수준일망정 재즈연주를 하고 다녔던 그 당시난 30대 초반이었고 그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나는 결혼하기 이전 삶의 정점에 있었던 것 같다. 나이를 먹고, 연습을 할 절대 시간이 모자라는 직장인의 신분으로 음악을 시작한 나는 결코 어떤 경지에 오르지는 못했다. 사실은 그 경지를 살짝은 엿보았으나, 그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지나쳐야할 험로를 보고 멈췄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강렬한 체험은 내 삶에 비가역적인 깨달음을 주었다.        

 그때 내가 지하연습실에서 배운 것은 사실 음악만이 아니라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는 생각이 든다. 자유로움을 그런식으로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내가 자유라는 개념을 이해하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 자유로움은 허공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방향성 (아름다운 원곡이라는 시작점, 그리고 아름다운 연주를 하겠다는 동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연주자 즉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내가 자유로움에 대해 배운것 한가지는  자유로움을 내것으로 하는데는 수련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자유로움을 내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용기를 통해서만, 한번도 발걸음을 디딘적 없는 어디가 땅이고 어디가 허공인지 모를 백척간두에서 한발자국 나가는 용기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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