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글주의
안녕하세요, 여러분. 이지입니다.
2023년이었죠? 네이버 블로그 20주년이.. 네이버 블로그는 나름대로 나의 삶과 오랜동안 같이 한 플랫폼이라 내적 축하를 하고 지나갔어요. 그런데 문득, 올해 저의 나이가 0으로 리셋 되는 이 시점에 내가 만든 이 블로그는 대체 얼마나 나이가 되었는가 궁금해졌어요. 검색해 보니 네이버 블로그 PC버전 프로필에 들어가면 블로그 히스토리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블로그 히스토리를 보니…
…?! 네?!
나 되게 고여이었네?
네이버의 블로그 서비스가 2003년 10월 시작인데, 제가 블로그 개설을 2004년 5월에 했어요. 내 블로그는 한 10여년 되었겠거니 생각을 했는데…20년… 물론 개설한다고 바로 글을 쓰고 그랬던 것은 아니긴했는데, 그래도 생각보다 더 오래되어서 놀랬어요. 그래서 이김에 블로그와 함께한 간헐적 크리에이터의 삶을 회고해보고자 합니다.
자작 만화 공유하려고 개설
사실 저는 학창시절 만화가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대학시절 동아리도 만화, 휴학하고 알바하면서 저녁에는 일러스트 문하생 생활도 했었어요. 당시 필명이었던 유나기로 블로그 개설 후 휴학과 취업, 2006년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오고 나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요즘은 웹투니스트나 작가라는 말로 통칭되고 그안에서 원화가와 스토리작가가 구분되는 것 같은데, 출판만화시절에는 만화가와 일러스트레이터등의 명칭이 일반적이었죠.
원래 펜화로 그리는 것을 선호했는데, 당시 네이버가 생기던 시점 야후 등의 포털이 생기면서 웹에 만화를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1세대 : 침착맨(이말년), 조석, 강풀, 낢 등) 원래는 판타지 만화가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었는데, 저도 그 조류에 타볼까 하면서 와콤 타블렛을 사서 생활만화를 조금씩 올렸습니다. 당시 주머니툰이라는 만화카페(현재 없음)에 백수의 생활을 그린 백수의 왕 사자를 올리고 인기도 나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편 그리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5편까지만 그리고 중도 포기 했습니다. 여러분 모든 것은 끈기가 중요해요. (갑자기?)
2008년 정도 되었을때가 방송송출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던 시점이었어요. 창작에 대한 욕구를 버리지 못했던 나는 국비로 영상을 배우고 온라인 디지털 디자인전공으로 일을 하면서 졸업합니다. 영상회사를 다니면서 영상을 하나 만들어서 올렸는데, 갑자기 블로그에 방문자가 급등합니다.
네이버 메인에 제가 만들었던 영상이 픽된것이죠! 당시에 어머니가 길에서 새끼 고양이를 하나 주워오셔서 초유를 사다가 먹이며 키우셨는데요, 그걸로 우리 고양이의 입장에서 만든 일기를 영상으로 만들어 보았었어요. 당시 비디오로 만든 블로그 포스트도 많이 없었던 시절인데 재생 17만이란 나름 뿌듯한 결과를 보았었죠. 동물 일상공유 비디오의 원조라고 혼자 생각하고 있습니다. ㅋㅋㅋㅋ 쨌든 이 당시 두가지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의 관심이 좋으면서도, 40개가 넘는 선플중 하나의 악플이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았어요. 물론 그 악플에 신경쓰지 말라는 좋은 분들이 많이 계셨지만, 많은 대중의 관심이 좋은 것만은 아닐라는 것을 깨닫게 된 시점이었어요. 그것을 감안하고 활동하시는 크리에이터 분들, 응원합니다!
이 당시 네이버 카페를 지원해주는 이벤트도 했었는데, 당시 만화가 고 고우영 선생님의 전시회 티켓에 당첨되어 후기를 그렸네요. 만화가 지망생 카페에서 당첨이 되었던거라 후기를 만화로 그렸는데... 만화가가 되고싶은 욕망과 열정이 가득했었나 봅니다. 얼마 후 방문자가 늘어 보니 후기가 카페지원센터 페이지에 노출이 되었습니다. 지금보면 허접한 그림이지만, 당시에는 열정만 있어도 주목받는 시기였던 것 같아요.
인터넷 마케팅회사에 들어가 볼까 하고 면접보고 팬케잌 프라이팬을 홍보하는 영상을 만들어보라는 미션을 부여받았었어요. 자캐를 기반으로 2D애니메이션화하고, 거기에 당시 유행이던 빵상 아줌마의 목소리를 넣어서 만들었어요. 지금 봐도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는 영상인데, 저희 어머니는 웃겨서 주저 앉아서 우셨습니다. ㅋㅋㅋㅋㅋ 재생수를 보니 생각보다 높네요. 댓글이 많지는 않았는데 두어분정도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재밌어서 저장한다고 하셨던 분들도 존재했어요. 요즘 안드로메다로 간 콘텐츠들 많이 뜨던데 차라리 요즘 나왔으면 나으려나... 참, 빵상아주머니가 요 몇년전 유투브에 뜨는 것 같던데 반갑네요. 역시 클래식…(?) 아, 물론 회사는 떨어졌습니다. -_-.
네이버 다이어리에서 추억을 함께한 블로거들 사연을 공모하는 이벤트를 했었어요. 당시 한번 응모해보았는데, 함께 쓰는 다이어리에 당선되었습니다. 약간의 편집을 거쳐 사연이 게재되고 상품으로 네이버 날개 모자, 티셔츠, 다이얼, 탁상캘린더… 등등을 탔습니다. 당시는 나름대로 힘들고 정신 사나웠던 시절이라 자랑은 못하고 그렇게 넘어가게 되었네요. 지금도 가지고 있었으면 진짜 고인물 템이었을 텐데.
리뷰, 창작, 플랫폼의 춘추전국 시작
KT에서 GPS 위치기반으로 발도장을 찍으며 리뷰를 남기고 대화를 할 수 있는 아임인이라는 서비스가 있었어요. 지금의 페북, 인스타 등과 비슷한 서비스인데 안에서 커뮤니티를 만들 수 있는 구조였던 것으로 기억해요.(기억이 너무 흐릿…) 꽤나 열심히 활동했었고 여기서 주는 냉장고 자석 비슷한것을 받기도 했었지만, 중간에 서비스 종료되었어요.
이때 이미 파워블거지들이 생기던 시점이었습니다. 내 경우는 보통 내돈 내산으로 조용히 리뷰 블로그를 하던 시점이라 내 글이 어느정도 파급력이 있는지 잘 모르는데, 도움이 된다는객관적인 평가를 받게 된 계기가 이 리뷰를 통해서 였어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동네 카페로 당시 동네에 이런 개인카페가 많던 시절은 아니라 아기자기한 분위기에 심취해 적었던 포스트였어요. 포스트를 올리고 나서 찾아가니 주인언니가 무료로 음료수를 수줍게 말아주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파워블로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었어요. 이때 서울시에서 주는 아름다운 간판 상도 받고 하셨더라구요. 지금은 다른 동네에 살아서 가지 않고 주인언니도 바뀐것으로 알지만, 아직도 콩당은 수유역 뒤편에 위치해 있어요.
원래 여행작가가 꿈이었던 나는 2006년에 다녀온 호주워킹홀리데이 여행기를 카테고리만 만들어 놓은채로 5년이 지났어요. 여기저기 기자를 구하는 것에 지원을 해서 글을 쓰곤 했는데 그때 남한강 여주 팸투어에 당첨되었어요.
https://blog.naver.com/ezstorie/100139656079
여주 팸투어. 여행업이 정치랑 무슨 상관이 있을 까 룰루 랄라 했는데 제일 관련이 많았어요. 여주투어인척 하면서 여주보를 은근슬쩍 들러 홍보하는 그런… 심지어 안내받은 여행코스에는 표시되어 있지도 않았어요. 엄청 충격을 받었어요.
이 당시 영상작업(촬영+편집)을 한다고 완전히 틀어진 허리를 위해 마사지샵을 한두번씩 돌아다니던 때였어요. 여러군데중에 이태원에 있던 이 업체를 찾아서 갔었는데(내돈 내산) 웬걸, 정말 실력있는 마사지사였어요. 당시 일얘기 하다가 뭐하냐고 물어서 영상이랑 블로그 한다고 말했는데.. 블로그 보여달라고 하더니 리뷰 써달라고 하시고는 적립금을 넉넉히 넣어주셨던 기억이..?! 왜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정말 마사지후에 컨디션이 좋아서 리뷰는 좋게 써 드리고 적립금을 쓰러 가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부끄러워서 줘도 못먹는 바보였어요 ㅋㅋ
서울스토리텔링단 1기가 되었어요.
https://blog.naver.com/ezstorie/100138396501
당시 서울시 박시장님 산하에서 서울스토리라는 웹페이지를 만들었는데, 그때 스토리를 올릴 에디터들이 필요하다고 해서 1기에 지원을 했었어요. 활동기간은 1년이었는데 잠시 활동하고 두었었습니다. 이유인 즉, 에디터의 자유도가 낮았습니다. 이때 미션으로 주었던 것이 종로 세종마을에 대한 취재였어요. 나는 이미 2년전에 나름대로 포스팅이 끝난 것을 다시 만드는 것이 별 매력이 없었던 데다, 모든 사람에게 미션을 주어 같은 주제로 만들고 리워드 하겠다는 방식이 경쟁적이어서 선호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본인들이 만든것을 띄울려고 하는 의도가 너무 다분히 보여서 매력이 없었어요. 지금은 서촌이라고 더 많이 불리우는 세종마을의 흔적은 음식문화거리로 남아있고, 내 기억엔 이도 시장이 바뀌면서 치적을 남기려고 이뤄진 촌극이었어요. 이때 기점으로 거의 정부 관련해서 뭘 하는 것은 별로 안했던 것 같아요.
이때 우후죽순 승마장들이 생겼는데, 일주일에 한번씩 무려 왕복 4시간 거리를 인천으로 왕복했습니다. 배우면서 꽤 괜찮아서 적은 승마장 리뷰인데, 승마장 대표님이 댓글로 오셔서 찾아주시면 소정의 사례를 드리겠다고 말씀해주시더라구요. 용기내서 말했는데 양말이나 가져가라는 식이셨고 실제로 주지도 않아서 난감했었죠. 중간에 뉴스에서 나와서 취재도 했었는데, 이것도 당시 대통령의 취향과 정치에 얽혀있었다는…스펙타클하네요.
정치 공작에 질린 이지는 당시 처음 한국에 들어왔던 디스커버리 익스페디션의 디스커버리 원정대 공모전 1기로 눈돌립니다. 그러나 쟁쟁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3위로 셔츠를 받았습니다. 세상은 넓네요. 지금와서 드는 생각은 이때 내가 크루가 있었다면, 좀 더 사람과 교류할 수 있던 사람이었다면 하는 생각이랑, 내가 조금 다른 사람들보다 템포가 빠른가 싶은 생각이 처음 들었어요. 이때 내가 가고싶었던 곳은 아이슬란드였고, 애석하게도 다음해의 당첨지역이 아이슬란드였어요.
요 몇년 사이 문화재 굿즈들이 하나씩 생겨나고 있죠? 경복궁에 서있는 수문군들 캐릭터도 나름 인기상품인걸로 알고 있어요. 경복궁에 있는 수문군안내소에서 일했는데, 신년이 되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카드를 제작해서 하나씩 돌렸죠. 수문군 캐릭터화의 거의 오리지널이라고 해야할까나...사실 캐릭터화하기 전에 한번 제안이 왔긴 했었지만...제안한 분은 의견을 조율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거절했었어요. 당시에는 수문군 복식 체험도 가능했는데, 같은 것 백만번 물어보는 관광객들에게 안내하기 위한 안내판도 제작했었어요. 이것외에도 수문군 동선확보와 관람 편의를 위한 차단봉 설치 등 제안하기 위해서 굉장히 여러번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수문군 복식체험은 사라졌지만, 수문군 동선확보를 위한 차단봉은 지금도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어 흐믓합니다.
브런치가 새로 생겼고 아이디를 만들려면 그간 쓴 글이 심사에 통과해야하며, 통과한 사람은 작가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두근 두근 하면서 이 블로그를 넘겼고 생각보다 가뿐하게 통과되어 놀랐죠. 이때 계약이 끝나고 여행작가로 돋움하기 위해 2주가 넘는 기간 동안 125cc의 스쿠터로 전국일주를 기획해서 여행했어요. 욕심은 여행 에세이 + 소소한 팁이었는데, 잡지같은 구성으로 만들어 시리즈로 연재하고 싶었어요. 내게 블로그는 일기장, 리뷰의 공간이라는 인식이 더 커서 새술을 새 부대에 남아보자 하는 심정으로 이 콘텐츠는 브런치에서 연재를 시작했어요. 지금은 캡쳐한 이미지가 사라져서 증거를 남기기는 힘든데, 1편인가 2편인가가 카카오 스토리 메인에 떴었어요. 당시 스쿠터로 여행하는 사람도 드문데 더군다나 여자여서 그랬던 것 같아요. 이 여행기는 12편까지 쓰고 사정상 종료되었는데, 이때 당시 여행을 다니면서 했던 생각들이 관광업계에 있으면서 다른 시각을 가지게 했던 것 같아요.
김리뷰의 리뷰리퍼블릭 에디터
지금은 이묵돌로 활동하고 있죠. 당시 페이스북에서 김리뷰라는 사람의 글이 키치한 느낌이 있어 쭉 팔로우 하다가 그가 리뷰리퍼블릭이라는 플랫폼을 만든다고 하여 에디팅을 했었습니다. 김리뷰의 의지는 리뷰어가 광고가 아닌 진실된 리뷰로 사이트내의 머니(닷)을 모아 필요품을 살 수 있는 형식이었어요. 리뷰리퍼블릭의 에디터들 중 어떤 사람들은 본인들이 사업을 운영하는 사람이라 후기를 선정해서 상품을 보내주는 형식도 많이 했었어요. 그런데 저는 김리뷰를 리뷰했었습니다. (응?) 내 경우는 일과 리뷰를 따로 하는 형태로 원하는 대로 쓰는 객관적 리뷰를 쓰면 돈벌이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내 블로그의 독자님들도 그런것을 보고 오는 거였어요 그때는. 사람이 수익이 되지 않는 일을 유지하면서 사는 것은 매우 힘든데, 거기다 이것을 사업화 한다는 것은 더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응원한다는 글을 썼었고, 그게 리뷰리퍼블릭의 메인에 올랐었죠. 그 글을 보고 김리뷰도 이런 글을 올리는 것을 보니 갔다는 댓글도 올라왔었던 기억이 있네요. 결국은 오래 가지 못하고 무너졌고 김리뷰의 행방은 아시는 대로입니다. 참고로 이때 글 잘쓰는 리뷰어들이 참 많구나 생각도 했었어요 :)
손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여 아로마 테라피 제품을 만드는 자격증을 하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플리마켓이 유행하기 전에 만든 비누를 가지고 야외 시장에서 내다 팔아보는 것도 해보곤 했어요. 당시 언론에서 합성 계면활성제에 대한 보도가 여러차례 이뤄졌고 기성 샴푸를 쓰면 머리가 가렵다는 지인들도 있었어요. 그래서 찾아보니 천연 계면활성제를 가지고 샴푸를 만드는 방법들이 나와서 편백샴푸를 만들어봤었어요. 마침 지인중에 행사를 기획하는 사람이 있어서 이런 천연제품 제작자들이 모여 천연제품을 만들어보는 원데이클래스를 진행했습니다. 머리감으면 나름 개운하다는 후기도 있었고, 패키지도 알아서 개발했던 터라 보람도 있어서 이후 한번 더 진행을 했었는데, 구비해야하는 것들이 너무 많고 규제도 너무 심해져서 포기....!
크래용이라는 재료에 매력을 느껴서 그림에 다시 재미를 붙여본 시기이도 했어요.
네이버가 인스타를 견제해 폴라라는 기능을 만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도시문화컨텐츠 전문 어반플레이와 협업을 했었고, 저는 당시 네이버 폴라를 위한 로컬 큐레이터 활동을 했습니다.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눈에 뜨는 곳이 있으면 들어가서 이야기를 들어보고 하는 작업들이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이때도 네이버에서 테마를 가지고 한편씩 픽을 해서 메인에 띄우곤 했는데, 커피읻따가 소개됐었어요. 커피읻따는 지금 없지만, 이때 있었던 또만나 레코드가 아직도 있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습니다.
2016년부터 관광통역 안내사가 되어 미디어랑 결합할까 하여 한팁이라는 팀을 만들어 활동을 해봤는데 품이 너무 많이 들어 포기. 이때 사실 동아리처럼 약간의 지원금을 받기는 했는데, 이것을 사업으로 발전시길 생각은 하지 못했었어요. 머리속에 너무 큰 그림을 그려서 시간+품이 너무 많이 들어 콘텐츠를 주기적으로 뽑아내는 게 힘들 것 같았고, 그에 비하면 투입된 인력에 비해 성공은 보장되기 힘들어 밥벌어 먹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들었습니다. 그래도 재미있는 시도 중 하나였어요
영어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을 발급받아 처음 활동하던 해입니다. 이전부터 협동조합으로 활동하던 사람이 주변에 많았고 개인적으로 성북신나라는 성북구 지역활동 협동조합원이었던지라, 관광업계는 협동조합이 없을까 하고 구경하던 중 하나를 발견했어요. 가지고 있던 콘텐츠 제작 능력으로 여러가지 활동을 했는데, 명함이나 홍보물 제작, 여행 기획, 가이드 직업 설명회, 관광공사 트래블힐러 퍼실리테이터 등등.... 참 여러가지를 했었네요. 창작자+가이드라는 포지션으로 쭐래쭐래 다니다보니 협동조합 사내이사가 되었었죠....아련....
서울공익활동 지원센터(NPO)라는 곳을 하시나요? “함께하는공익활동, 더 큰 상상 가능성“이라는 슬로건으로 있는 서울시 산하 기관이예요. 운좋게 소개로 잠시 공익 아카이브를 위한 활동 지원을 했었습니다. 당시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을 따려고 공부하던 때라 공익 아카이브도 여행관련으로 진행을 했었죠. 아카이브이지만 나름대로 테마를 가지고 진행을 했는데, 지금보니 조회수도 생각보다 높네요. 사실은 아직도 진행되는 문제라 해결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어떤 아카이브인지 궁금하셨던 분들은 아래에서 확인하실 수 있어요.
https://seoulpa.kr/bbs/board.php?bo_table=npo_aca
당시 서울시에서 지역아카이브 활동이 유행했습니다. 서울에 사는 나와 인천에 사는 차차의 어린 시절 비슷한 추억을 공유하면서도 서로 추억을 가진 공간의 차이는 엄청났어요. 어린시절의 기억을 재구성하여 사진과 영상을 만드는 기획을 했고, 무중력지대 성북 '개인의 발견'지원을 받아 비슷한 사진으로 서울과 인천에서 각각 진행했습니다. 추억을 정리할 수 있는 나름대로 재미있는 시간이었어요. 차차는 연말에 프로젝트의 연장선으로 길에서 사진을 전시했었어요.
아이패드의 프로크리에이트를 접한뒤 한국의 멋 시리즈를 기획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
2017년, 지인 예술가중에 을지로를 기반으로 활동을 하시던 분들이 있었어요. 그분들에게 부탁해서 을지로 공업사 사장님들을 소개 받고 세운상가~을지로를 연결시키는 투어를 만들었어요. 협동조합에서 만든 투어자체가 코리아 헤럴드에 올라가기도 하고 당시 AirBNB 체험이 생겨서 그쪽에도 런칭했었고, 내셔널 지오그래피 한국어판에 을지로가 소개되며 가이드로 살짝 등장을 했어요. 그것과는 별개로, 말레이시아 할랄투어 여행사의 VIP 가이드가 되기도 했었죠.
성북구에서 활동했던 협동조합에서 여러가지 활동을 해서 참여하면서 만난 인연들이 있는데요, 그중에 성북구에서 탈북청소년을 위한 그룹홈을 운영하는 우리들의 성장이야기가 있었어요. 탈북 청소년들을 위한 봉사활동자들과 함께 하는 교육여행을 기획하고 있었는데, 관광통역안내사라는 직업에 대한 소개와 여행기획 강사로 초청이 되어서 강의를 했습니다. 재미있고 소중한 기억이네요.
차차가 인천에서 사사대추 활동을 이어할 수 있도록 지원금을 받아 조금 더 큰 형태의 전시가 진행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아예 인천에서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곳을 촬영하여 콘텐츠를 만들었어요. 당시에 가이드일을 하면서 많이 정신이 없어서 많은 부분을 차차가 진행하게 되었는데, 전시가 아름답게 나왔었네요. 2년의 활동으로 예술인 복지재단에 작가등록하여 예술인으로 인정되었어요.
차마 올리지 못했던 한국의 사방신 시리즈 중 한분인 현무 이국종 선생님입니다. 이것은 곧 이어갈 계획입니다.
2020년 하늘길이 닫히며 외국인 대상 관광통역안내사는 일이 일순 사라졌어요. 그냥 몇달이면 풀리려니 하면서 그동안 배우고 싶은 것을 하자 생각했어요. 그동안 아리랑 스쿨에서 판소리와 마스터황의 옛법택견을 배웠어요. 유투브 채널을 운영하고 계셔서 새로 기획한 콘텐츠를 같이 해보자고 해서 몇달 진행을 해보는데, 그동안 영상 촬영실력은 진보를 안했는데 편집실력만 늘었더라는....ㅋㅋㅋㅋ 스케줄이 잘 맞지 않아서 아쉽게도 이후는 불발..! ㅜㅠ 발목과 허리를 다친 이후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데, 옛법택견 많이 사랑해주세요!
https://www.youtube.com/@masterhwangytk
https://www.youtube.com/@masterhwangytk
생각보다 코로나 기간이 오래되면서, 취업을 하고나서 움직이질 못해서 답답해 하던 찰나에 여행 기획강의를 했던 그룹홈에서 성북구 청년들을 대상으로 구술생애사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해서 참여해보았어요. 성북구에서 여러가지 사연이 있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듣고 정리해서 책을 내는 프로젝트였어요. 당시 저는 탈북청년에 관심이 있어서 그를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진행했었어요. 한권의 책으로 나오는 것이 꽤 뿌듯한 일이었어요. 해당 프로젝트는 지금도 계속 진행중이니, 참여를 원하시는 분들은 아래 링크로 들어가 보시면 됩니다.
https://youthfamily.modoo.at/?link=1tn4u9zf
회사생활이 본격시작되면서 뭔가를 하고 싶은 성격은 사찰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했어요. 가만히 있으면서 우울감이 심해져서 상담을 다니다가 현실적으로 관광업계에 복귀하면서 가능한 일을 찾은 거였습니다. 이때 필름 카메라가 인기를 끌어 필카도 장만해서 찍고 다니기 시작했어요. 나름대로 돈도 많이 들고(?!) 재미있는 작업이었네요. IT회사에 정직원이 되면서 가이드 협동조합 사내이사자리는 포기했습니다.
회사다니기 전부터 타자기형 키보드를 가지고 싶었는데, 스트레스가 맥스에 오른 시점에 하나 질렀었어요. 너무 뿌듯한 마음에 어떤 기능이 있는지 간단히 영상을 찍어 릴스로 올렸는데, 의외로 뷰수가 터졌네요..(!?) 왠지 모르겠지만 일단 크리에이티브 계정으로 전환하니 브랜디드 콘텐츠나 파트너쉽광고를 붙일 수 있게 되었어요. 다른 사람이랑 비교를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브랜디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일정 조건이 되어야 하는 거라 일단 뭔가는 인정을 받은 듯 해요.
회사다니면서 번 돈으로 본격 사찰 콘텐츠에 투입했어요. 사찰이 그냥 선택된 것은 아니고, 외국인이 오면 관광지중에 사찰이나 템플스테이가 하나씩은 들어가 있고, 한국문화는 불교가 아니면 설명이 안되기에 체험기 정리겸 블로깅을 했어요. 2022년 슬슬 사회적 거리두리가 풀리면서 사찰에서도 여러 이벤트들을 진행했었고, 그중 하나가 부모님과 템플스테이를 할 수 있는 라떼는 템플스테이 였어요. 백양사에서 템플스테이 했던 기억이 좋아서 어머니를 모시고 갔었는데, 핫토픽에 선정이 되었네요.
사찰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이것저것 올렸던 블로그의 콘텐츠가 한방향으로 통일 되었어요. 중간에 몽골에도 다녀오고, 잼버리 시기 사찰에 봉사활동도 다녀오면서 2023년의 마이 블로그 리포트는 트래블 컨설턴트로 지칭되었습니다! 짝짝짝!!!
인지도가 있는 성진스님이나 정관스님을 실제 만나뵈었던 블로깅의 경우는 그 분들이 지속적으로 방송을 타시면서 기존의 콘텐츠의 뷰수가 역주행하는 경우도 생겼어요.
여행객들이 한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퇴사하고 관광통역안내사로 잠시 복귀했어요. 예전과는 다른 분위기에 새로운 사람들이 많더군요. 많은 생각이 들었네요.
브런치 공모로 사찰을 돌아다니고 책을 읽은 사찰프로젝트의 첫번째 책 '한국 안 붓다의 세계'는 아쉽게도 공모전에서 떨어졌지만, 원래 영문출판이 목적이라 영어로 번역해 아마존으로 바로 출판준비를 했습니다. 지금은 성공적(?!)으로 발매하여 판매중입니다. 이 썰은 사찰프로젝트 두번째 책까지 내고 종합해서 풀어보려고 해요. :)
20주년 기념 고찰
1. 검색 상위 노출도가 상대적으로 높다.
수년전부터 블로그에 광고나 협업제안이 꽤 많이 들어오는 편이라 왜인지 궁금했는데, 어떤 홍보 업체 댓글을 보고 깨달았어요. 10년 이상 된 블로그는 검색 노출이 상대적으로 많이 되요. 키워드만 잘 맞는다면 대게 10위권 정도 안에는 노출되는 듯 합니다. 게다가 저처럼 좀 마이너한 것들을 발굴하거나 혼자 해보고 싶은 것 하면서 사는 사람의 경우 키워드 역주행시에 더 유리하겠죠?
2. 글쓰는게 는다.
그래도 여러가지 창작을 해본 결과 글쓰는게 제일 적성에 맞았던 것 같아요. 물론 매일 글을 쓰는 사람보다 나을 까 싶고, 사실 글 쓰는게 늘고 있다는 것이 스스로 느껴지진 않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었던 창작물의 피드백중에 글쓰기에 대한 것이 가장 많았는데 요지는 읽기 쉽다는 것이었어요. 하루에 하나씩 훈련처럼 쓰는게 아니라도 오랜 기간 쓰면 늘기합니다.
3. 확장성이 생긴다.
블로그를 하다보니 다른 매체의 에디터가 되거나 체험단 지원등도 가능했어요. 또한 협동조합에서도 사진 등 2차 창작이 가능했었죠. 여러 다른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들도 생겼어요. 블로그라는 폼에 들어갈 수 있는게 글 뿐이 아니라 사진, 비디오들도 가능하니 컨텐츠를 만드는 기본 포맷만 가지고 있다면 브런치, 유투브등 여러 SNS로 이동도 수월한 편이예요.
1. 생활을 위한 N잡러
이건 어느 분야의 창작자든 마찬가지 인 것 같습니다. 저는 창작물로 먹고 산다는 것은 일종의 복권이랑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의 때가 오기 전까지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그 때는 언제 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부유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돈을 벌어야 하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창작을 포기해요. 개인적으로 프리랜서의 삶이 맞다고 결론 냈기에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을 땄을 때 생활비를 가이드를 하면서 벌고 비수기에 창작을 했었어요. 회사를 퇴사한 지금은 또 다른 모멘텀을 만드려고 하고 있어요.
2. 위치
블로거라는 이름이 사회에서 인식되는 위치는 뭘까요? 파워블로거라는 것이 생겼고 인지도가 높아져 갔을 때 저는 그다지 그 이름을 받고 싶지 않았어요. 얼마뒤에 요즘 말로 뒷광고와 갑질파문때문에 파워블로거란 말은 사라지고 세계적으로 쓰이는 인플루언서가 대세가 되었네요. 최근은 내가 정말로 좋아해서 써주고 싶은 가게나 전시 등의 리뷰나 내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쓰고 있어요. 간혹, 좋은 마음에 써주었는데 본인 사업 연계된 곳에 끌고가며 좋게 써달라고 한다면 저는 그런건 쓰지 않습니다.
3. 쉽게 소비된다.
사람을 교육할 때 그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교육을 잘 하는 것이듯, 창작이나 리뷰 역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편하게 쓰는 것도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쉽게 읽히는 글이나 콘텐츠라고 사람들이 만드는 것도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더군요. 조언을 얻으려고 접근하시는 분들은 요즘에 일단 본인이 하고싶은 컨텐츠 포맷에 맞춰서 스스로 쉽게 할 수 있는 앱을 알려드립니다. 우리나라는 워낙 좋은 콘텐츠 들이 싼 가격으로 제작되는 나라이지만, 본인이 만들어 보시면 쉬운일이 아닌 것을 알거든요. 그런 분들은 대게 저한테 돈을 줄테니 만들어 달라 하시는데, 보통은 태도가 그리 좋지 못하신 분들이 많아요.
이지씨의 삶은 생동감이 있어요
그냥 설렁설렁 활동을 했던 것에 비하면 네이버는 내 블로그에 나름대로 따뜻한 애정을 보냈던 것 같네요. 이렇게 정리하니 사회생활의 20년을 대부분 네이버 블로그와 했네요. 아마도 꾸준히 컨텐츠 블로깅을 했더라면 좀 나았을 까 싶기는 한데, 홍보나 마케팅분야로 빠지지 않는 이상은 리뷰를 창작으로 삼아 살아가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다는 결론이 나온지는 오래였어요.
창작을 하고싶은 사람은 대부분 그렇듯 에너지를 쏟아낼 곳이 필요하죠. 타인의 콘텐츠를 빌어 엮어 나가는 것은 창작에 대한 불을 더 지피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올해 처음 아마존에 책을 내었다고 포스팅을 했었는데요, 올 한해는 셀프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추이를 보는 한해가 될 것 같아요. 이게 이제 시작입니다.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애초에 직장인이 꿈이 아니었던 지라 직장에 오래 다닌 적이 많이 없었어요. 근데 특이하게도, 발자취를 남겼던 곳들에서 같이 일했던 친구들이 근 몇년동안 연락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직장생활을 영위하거나 결혼생활을 하거나해서 연락이 오래 끊겼던 터라 몇명은 반가운 마음에 만나 보았는데요, 고된 생활에 몸이나 마음이 지친 친구들이 많았어요. 솔직히 그 친구들이 나한테만 연락을 했던건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도 연락을 했는데 흔쾌히 만나자고 했던 사람이 나였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언니가 해줬던 말들이 생각난다 하면서 오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기억도 나지 않는데 무슨 말을 했었길래 이 친구들이 나에게 연락을 했을 까 많이 생각하고 부담스럽기도 했어요. 그런데 최근 스마트폰 메세지를 보다가 한 사회운동가 선생님이 저에게 보냈던 메세지를 봤어요. 제가 사찰 프로젝트를 진행할 초반쯤 함께 해보고 싶다고 했는데, 그 때 그분이 저에게 이지씨의 삶은 생동감이 있다고 하셨어요. 솔직히 저도 제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고, 이 삶이 소위 말하는 제대로 된 삶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저의 삶을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원동력이 된다면, 가끔 고되지만 실패해도 가치있는 삶이 아닐까 해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좋아하는 것을 하시면서 생동감 있는 삶을 사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