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교육대 01편
매우 늦은 나이에 군대를 가게 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먼가 써서 나오고 싶다.'
그래서 썼습니다.
스스로 종군기자라 생각하면서요^^
2010년 5월 18일 ~ 2012년 3월 1일. + 전역 후 1달
그동안의
기록입니다.
축구 이야기로 시작해서 축구 이야기로 끝내는 그런 이야기는 아닙니다 -
*일기에서 언급되는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부대에 관련된 구체적인 정보는 제외했습니다
1. 나는 가끔 아버지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었다. 혹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되던 때도 있었
다. 나는 그렇게 좋은 감정을, 혹은 나쁜 감정을 품기도 했고, 아버지를 객관화해서 탐구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붉게 된 눈으로 내 귓가에 ‘믿는다.’고 속삭이며 울먹였다. 여태까지 내가 했던 일들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2. 여기 와서 처음 군 생활에 대해 느낀 건 발음이 어눌한 선임이 무언가 지시할 때 무척 명령이 약해 보인다는 것이다. 발음과 목소리가 참 중요한 문제임을 느낀다.
3. 나는 입소를 했고 영식이는 퇴사를 했다. 어쩐지 우리는 비슷한 순간에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고, 생의 전환점이 나타난 것 같다.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둘 때 영식이는 아홉 살에서 스무 살이 된 것 같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했었다. 영식이는 자기의 시스템을 벗어났고 나는 그토록 싫어하고 겁내 하던 그 시스템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에겐 어떤 미래가 있을까. * 장정소포 속 군인은 마냥 웃고 있다. 그래, 좀 더 많이 웃어줘. 우리도 이렇게 웃게 되기를
* 장정소포 : 보충대에 들어가면 장정소포라고 해서 사회에서 입던 옷이며 물품들을 다시 돌려보낼 박스를 하나 준다.
* 보충대 주변에 비가 많이 오던 것이 기억난다.
1. * 그러고 보니 왜 군인은 사인 autograph이 없지?
2. 전투복을 배급받는 시간이 왔다. 유니클로 매장처럼 각 사이즈별로 전투복이 깔려 있고 우리는 이리저리 옷을 입어보며 군인 코스프레를 시작한다. 입고 있던 옷이 변하니 신분 변화를 절실히 느낀다. 나이키, 아디다스, 반스, 폴로 같은 각자가 선택한 마지막 자신의 상징물들이 여전히 발을 감싸고 있긴 해도.
3. 예전에 어떤 웹사이트 게시물에서 병장으로 갈수록 옷차림과 태도가 긴장을 잃는 것을 재치 있게 표현한 걸 본 적이 있다. 우리가 치열하게 긴장하며 획득하려는 위치는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신분이다.
* 자대 생활하면서 나름 결론을 낸 건, 사인 autograph처럼 개인의 고유한 특징이 개인만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되는 건 군 행정상 상당히 귀찮은 일이다. 그냥 서명하는 게 확실히 알아볼 수 있고 처리하게 편한 면이 있다.
1. 첫 번째 불침번이다. 이승환 5집 중 *「아이에서 어른으로 3」가 생각난다. 다 큰 장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잠을 잔다. 코끼리처럼 코를 골고 새우잠을 자고 이불을 팽개치고―.
2. 군대에서의 공동체 의식이란 하기 싫은 일을 다 같이 하고 있다는, 그 희생자의 유대감 일는지도 모른다. 집에 무릎보호대를 보내 달라고 해야겠다.
3. 예전에 「스펀지」에서 유치원 아이들은 지역과 관계없이 서울말을 쓴다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군인들의 서울말이란 것도 이런 것 아닐까. 아이가 되는 것이다, 하나의 언어를 쓰는.
* ‘힘없이 드리워진 어른들의 꿈속에서 웅크린 채 엄마의 품속으로 얼굴을 파묻는 다 커버린 아이들이 잘 자요 행복한 꿈나라로 가야 해요’ - 이승환 5집, 「아이에서 어른으로 3」
너무 잘 해도, 너무 못 해도 안 된다고 하는 이 중간의 세계는 그 전까지 100점을 목표로 삼았거나, 혹은 100점이 있다고 믿으며 살아왔던 아이들에게는 혼란스러운 세계다. 이곳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일임을 아는 노동자와 자발적인 노동의사가 없음을 알고 있는 사업자와의 고용계약으로 구성되어 있고, 전쟁이란 게 월드컵이나 올림픽처럼 주기적으로 일어나지는 않기 때문에, 하는 일들 중 일정 부분은 남아도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을 메우는 데 써야 한다. 그러다 보니 생산성이 최대 목표가 아닌 사회다. 합리적인 세계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대체 이게 뭘까 하는 혼란을 가져다 줄 것이다.
천안함 사건은 이제 북한의 소행으로 거의 확정된 것 같다. 문득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중에 리바이어던이 내 목 뒷덜미를 잡는 느낌이 든다. TV에서는 남과 북의 갈등을 이야기하고,
“저 새끼들을 어떻게 이기냐?”
하는 누군가의 말에 우리들은 웃는다. 불안과 걱정, 또 설마, 하는 마음과 함께.
* 그리고 6개월 뒤, 2010년 10월 23일, 연평도 포격 사건이 터진다.
김영하의 소설 「빛의 제국」에서 간지러움에 대한 감각을 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곳은 흡연이 금지되는데, 그 덕분에 몇몇은 금단증상을 호소한다. 그리고 금단 증상으로 가려움증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욕망이 금지될 때 간지러움이 나타난다.’
일단 문장 하나 써놓고 곰곰이 되짚어 본다.
* 보통 보충대에서는 삼일 정도 있게 마련인데 석가탄신일이 (2010년 5월 21일) 금요일인 덕분에 총 6일을 보충대에서 있게 되었다. 이 날은 보충대에서 지내는 마지막 날이다. 그 다음은 신병훈련소로 간다. 우리를 관리하던 분대장은 이 이등병이라 하기도 뭐한 장정 (壯丁 : 부역이나 군역에 소집된 남자들) 에게 ‘아프지 마.’ 란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지나고 나서 보니 대단히 폼 나면서도 어쩐지 좀 오그라드는 말이었던 것 같다.
여기는 흡연이 금지된다. 그런데 ‘담배를 끊어라’가 아니라 ‘자대 배치 전까지 참아라.’라는 오묘한 명령이기 때문에 흡연욕구는 마음속에 그대로 둔 채 흡연행위만 하지 못하는 상태로 흡연 장정들은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욕구를 실현해 보고자 하는 장정들이 등장하게 마련이고, 치열한 연구 끝에 사각지대를 발견해 낸다. 그 은밀한 곳을 이용해서 7명이 담배를 피워댄다.
* 담배는 한 개비고 입은 일곱 개이니 빨아봤자, 뭐, 얼마나 빨겠나. 그래도 한 모금 들이마신 장정들의 얼굴엔 ‘옳다, 이게 옳다’ 하는 표정이 가득 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에서 종종 나오는 건기에 겨우겨우 물을 찾은 기린들이 그 긴 다리를 쭉 벌리고 목을 축이는 모습, 그것과 흡사하다. 주도해서 담배를 피우자고 하던 녀석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새벽녘 빈 종이에 글씨를 쓰고 있으면, 내가 무언가를 쓰는 게 아니라 흰 종이에서 글씨가 번져 나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흰 종이에 글이 써지자, 전체가 하나로 완성되는 기분이다. 닭이, 달걀이 먼저가 아니라 달걀과 닭을 함께 넣고 만든 요리가 먼저 있는 것 같다. 전체가 먼저인 것 같다.
전쟁이 싫다고, 군사문화가 싫다고 이야기하던 나에게도 총은 주어지고, 보급품으로 받은 노트에는 *SIMPLE LIFE라고 적혀있다. 패리스 힐튼은 이 노트를 보고 뭐라고 생각할까? 인생은 간단하다. 젠장.
* 심플 라이프 : 패리스 힐튼이 출연한 미국 폭스 사의 리얼리티쇼. ‘초특급 부자의 서민체험’이라는 장르다.
어쩌면 당신은 당신이 한때 비주류라 여겨졌던 순간을 극복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군대에 오면 다시 그 게임이 시작된다. 수많은 질문들은 당신이 정상 범위 내인지 아닌지를 묻는다.
1. 같은 * 전우조 병우의 바늘통이 내 * 세면백에 들어와 있는 걸 발견했다. 건망증이나 정리하지 않는 버릇을 걱정하시던 부모님이 떠오른다. 신병교육대에서의 생활은 보충대 때와는 달라서, 세부적인 사건들이 촘촘히 더 많다. 글감은 점점 잘잘한 게 나오겠지.
2. 어제저녁밥 * 식기분대조였던 터라 취사장 청소를 하다 * 카페에서 일할 때의 즐거운 기분이 생각났다. 내 일을 하고 돈을 번다는 그 즐거움. 그리고 어젯밤 꿈에는 사회에 있을 때 「Bang!」 때문에 혼이 나갈 뻔했던 ‘애프터 스쿨’ 멤버들을 대면했는데 멤버들 중 하나가 뜬금없이 <브로콜리 너마저> 「보편적인 노래」를 자기가 부른 거라고 나에게 말했다. 카페에서 일할 때 알게 되었던 노래가 입대 9일 차까지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이 글도 보편적인 글이 될까? 다들 멋대로의 꿈을 꾸고, 귓가에 맴돌던 좋아하던 노래가 꿈에서도 들릴까? 아마도 그렇겠지.
3. 오후 19:55쯤 되자 다시 우울해졌다. 전우조 시스템이, 상대방에 대한 책임이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 전우조 : 신병교육대에 들어가면 전우조라고 해서 주로 3인 1조로 하나의 단위가 편성된다. 이 세 명은 심지어 화장실도 같이 가야 되는데 “나 큰 거 좀.” 하고 대변 커밍 아웃해야 하는 순간도 생긴다.
* 세면백 : 검은색 합성수지로 만들어진 가방이 있다. 여기다 비누 같은 세면도구들을 넣고 쓴다. 처음 받을 때, 이게 2년 갈까 생각했었는데, 2년 잘만 갔다.
* 입대하기 전 한 카페에서 일했었다. 참 다들 잘해주셔서 너무 고마웠다
* 식기분대 : 취사장은 밥을 먹는 곳이지만 당연히 그 밥을 먹은 흔적을 치워야 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 덕분에 식기분대라는 게 있어서 돌아가면 그 역할을 맡는다. 노동량이 워낙 많기 때문에 참 싫다.
신병교육대 입소 후 꿈을 꾸며 키득키득 웃을 때가 많아졌다. 내가 우울해하고 있으니 하늘에서 꿈에서라도 웃으라 하고 DVD 한 편 상영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DVD를 꺼낸 이는 바로 나일지도 모르겠다 싶다. 우울해하는 척 하면서 이런 낯선 경험들 덕분에 부족한 능력치를 채워 나가는 기쁨을 마음 한 구석에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
1. 거친 남자 아이들의 세계는 여전히 따라가기가 힘든 느낌이다. 특히나 내가 A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때 누군가가 편하게 A를 까는 이야기를 하면 참 신기하다. 그리고 주류/비주류 게임은 계속되고 있다. 주류는 주로 힘이 세고, 약간 거칠고, 그러니까 말 그대로 남자다운 아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그 주류 주변에서 나도 주류지 하면서 착각하는 아이들, 애초에 주류에 속할 수 없지만 비주류에서 자기들끼리 알콩달콩 잘 살아가는 아이들, 그리고 나처럼 이게 뭘까 궁금해하면서 왜 내가 주류가 아니지, 하고 궁금해하는 녀석이 있다.
2. 오늘 친구 얼굴을 닮은 조교가 이런 내용의 말을 했다.
“잘 대해주는 것보다는 강압이 낫다.”
이런 방식의 곳에서는 이런 방식이 답인 걸까. 정말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로 가는 걸까.
K2 소총을 개인화기 CBT(사격 이론 수업) 시간에 만지작거리다가 이거 어디서 느껴본 감각인데 하는 기분이 들었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 아주 고전적인 기계. ‘착착’ 하고 돌아가는 소리가 주는 경쾌한 이질감……. 수동 카메라였다.
호흡을 하고, 조준을 하고, 대상을 향해, ‘쏜다.’ 찰칵찰칵 하는 소리들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진 애호가들이 자기의 풍경을 사격하고 있을지 상상해 보니 기분 좋은 지적인 즐거움이 피어올랐다. 광고회사에서는 사격과 사진 촬영을 겹쳐 표현하는 광고를 내도 괜찮겠다.
* K2 : K2는 에베레스트 산에 이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 (8,613M)이기도 하지만, 대한민국 국군의 군용 소총 모델명을 이야기한다. 기아자동차 차종이 'K+숫자'로 표시되는 것을 보면서 왜 대한민국 남성들이라면 총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름을 차에다 붙인 걸까, 궁금해했었다.
우리 소대는 48명으로 구성되어 잇고 4분대로 나뉘었다. 하나의 분대원은 12명. 재밌는 건 각 분대마다 특유의 개성이 생기고 다양한 권력관계를 보인다는 점이다. 1분대는 2극 체제. 2분대는 과두정치. 3분대는 권력 공복 상태이고 4분대는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다. 현재까지 가장 안정되어 보이는 분대는 1분대이다. 2분대는 2중의 독재자가 출현하는 모습이 가끔 보이는 듯하고 3분대는 인상에 남을 만한 인물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걱정스럽다. 4분대는 권력이 집중된 그 한 명이 별로 안정감을 주지 못한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 훈육 조교님이 1인당 상대하는 소대원들은 적은 수 같지만, 막상 개개인을 알려고 하면 많은 인원이고, 게다가 계급이 높지 않은 훈육 조교들 같은 경우에는 자기 앞가림하기에도 바빠서 훈련병 하나하나에게 신경 쓰기는 쉽지 않은 듯하다. 학부모나 학생들에게 선생님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일이 있다면 이런 문제가 숨어있는 것 아닐까. 학생들은 은연중에 ‘선생님에게 보이기에 적합한 정보 상태’로 존재한다. 선생님들이 그 정보를 흡수하고 거기에 그치면 공식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된다. 싸움이 일어나고, 불안한 아이들이 존재하지만, 반듯한 열과 똑같은 복장 속에서 그런 문제들은 드러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생활고까지 동반해가며 일하는 선생님들에게 그 이면을 봐 달라고, 그게 당연한 것 아니냐고 요구하기도 어렵다. 학생들 또한 그 안정된 정보를 뚫고 자신의 위태로움을 이야기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납득할 만한 정당한 이유를 넘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나선다면 숨겨진 이야기들이 밖으로 나올 것이다. 일견 안정되어 보이는 정보들, 그 밖으로.
* 훈육조교 : 신병교육대에는 조교들 종 훈련병들의 생활을 관리하는 조교들.
1. 지금은 영점사격 직전이다. 개인화기교육을 잘 듣지 않은 것 같아 찜찜하긴 하지만 마음을 차분히만 한다면 괜찮을 것 같다. 어느새 6월의 시작이다. 언젠가부터 가장 좋아하는 색깔이 된 네이버 검색창 색깔의 나뭇잎들 속에서 좌로 경계총자세를 취하고서 내 차례를 기다린다. 다리가 저리다.
2. 1차 영점사격을 통해 쏜 * 9발 중 5발이 옆사로에 맞았다. 정신 차리고, 탄알집을 땅바닥에 잘 고정시키고, 호흡은 길게, 시간은 넉넉히 있다는 마음으로 해야겠다. 생각보다 어깨반동은 심하지 않았다. 은근히 재밌기 까지 하다.
* 영점사격 : 개인에게 지급된 병기를 본인의 신체에 맞추기 위해 실시하는 사격. 이 사격을 통해 소총의 상, 하, 좌, 우 클릭크를 맞추게 되는데 이 때 얻어지는 것이 전투가늠자고, 이것을 기억하고 있으면 유사시 다른 병기를 지급받아도 즉시 본인에 맞게 세팅을 할 수 있게 됨. [해병대 공식 블로그 “날아라 마린보이”에서 인용]
* 쉽게 비유하자면 내 볼링공을 옆 레인에 투척했다는 뜻. 이 바보 녀석 하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정말이다.
1. 신병교육을 받는 동안 딱히 할 일이 없을 때 각자 놀이 방법을 발견하게 되는데, 운동, * 대화에서부터 오목, 초성으로 영화 제목 맞추기, 그림 그리기 등 그 종류가 다양하다. 나처럼 글을 끄적거리며 시간을 채워나가는 녀석도 있고. 그 사람의 개성 중 많은 부분은 이렇게 의무가 없을 때, 그리고 쉽사리 시간을 채울 수 있는 도구들이 없을 때 드러난다. 그중에서 내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건 내가 먼저 나서서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사람들이랑 이야기하기. 내가 제일 잘 하고 있는 건 이렇게 써내려 가는 것. 부모님께 볼펜을 하나 넣어달라고 했는데, 어서 그 편지가 왔으면 좋겠다.
2. 울산에서 왔다는 스물넷의 현우와 부산에서 온 스물 하나의 태정이가 할 일 없는 오후 2시 53분에 오목을 둔다. 나는 그 옆에서 두 사람이 오목을 하는 장면을 이렇게 기록해 두고 있다. 밖에서라면 이런 일 잘 없었겠지. 이 시간에, 이곳에서 오목을 두는 인연은 어떻게 해서 생긴 걸까. 한적한 오후에 기분 좋은 느낌으로 이 광경을 바라본다.
* 일기장에는 대화라고 적어놓았지만, 사실 이건 노가리라고 적어야 진짜 그 의미가 확실히 와 닿는다. 이 노가리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지는 위병소 경계근무, 불침번 근무처럼 시간을 채우는 방법이 입 밖에 없을 때 드러난다.
너무 즐거웠다. 총알은 효과음으로 대체되고 폭탄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가스 같은 걸로 대체되었지만, 이것이 실제 생황이라 생각하니 긴장된 눈으로 전방을 살피게 되었다. 우리 제대의 맨 앞에 위치하여 의식적으로 좀 더 앞을 살피면서 갔고 초록색 풀잎 사이에서 옅은 암녹색의 풀잎들이 좌우로 움직이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 순간, 이것이 사람을 죽이고 죽을 수도 있는 전쟁과 관련된 일이라는 꺼림칙한 마음도, 사실은 가상의 훈련일 뿐이라는 조소 섞인 자각도 사라지고 그저 ‘감각’의 세계만이 남아 그 감각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즐거웠다. 지금도 암녹색의 풀잎이 주변과 달리 보이던, 긴장된 순간에 날을 세운 감각이 바라보던 화면이 눈가에 남아있다. 적의 움직임으로 대입해서 바라본 그 풀잎의 움직임이.
1소대에서 한 녀석이 불침번 근무를 서는 도중 어머니에게 몰래 전화를 하다가 발각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불침번 근무라는 것이 발생할지도 모르는 사건에 대비한 행동이기 때문에 몸도 마음도 느슨해진다. 게다가, 자다 깨어서 비몽사몽 하는 상태이니 안전이고 재산보호고 간에 잠을 자고 싶어 지고, 별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데 자다 깨서 가만히 서 있으라고 하니 은근히 짜증이 난다. 그리고 상관이 와서 혼내는 것은 예정된 사실이 아니라 희박한 가능성에 그치는 일이니 딴 짓을 하고 싶어 진다. 이유야 이렇게 많지만, 글쎄, 불침번 시간에 전화를 하러 간 건 썩 좋지 못한 행동이었던 것 같다. ① 자리를 비웠고 ② 훈련병들이 가장 하고 싶으나 하지 못하는 행동을 했다.
영점사격 시간에 벌레 한 마리가 총에 앉은 모습을 보았다. 이름 모를 벌레였는데 검고 금빛이 나는 몸체가 총과 어울렸다. 곤충들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기계와 유기체의 중간 같다. 「트랜스포머」처럼 사람이 기계 옷을 입고 있구나, 하는 느낌과는 다르게 말이다. 이 알 수 없는 존재들은 시간 감각도, 공간을 느끼는 감각도 인간의 그것과는 다른 것 같다.
다시 총을 본다. 총기를 해부해 보면 사람의 장기라고 할 수 있을만한 것들이 튀어나오는데 이놈은 외골격이자 내골격의 존재이다. 밖도 안도 부러지지 않는 단단한 개체. 골격으로만 만들어진 이 사물에서 인간의 숨은 욕망을 본다. 외골격의 곤충들을 부러워한, 말랑말랑한 장기들을 부끄러워 한 내골격 종족들의 욕망을.
1. 오늘은 금요일. 아무런 불안감 없이 영점사격을 만발하기에 좋은 날이다. 사격을 하고 나면 ‘백발백중’이라 외치면서 내가 총알을 쏟아놓은 과녁을 향해 가는데, 저번에 5발을 116번 훈련병 기민이의 과녁에 맞춘 나로서는, 그렇게 팔을 각 잡아 저으면서 씩씩하게 내 과녁 쪽으로 간다는 것 자체가 무척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번엔 어떻게 될까?
2. 쏘고 왔다. 처음엔 괜찮았는데 한 발씩 쏘고 나면 * 시야가 흐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조금 안정되고 난 뒤에 쏠 걸 그랬는데 괜한 시간 압박에 좀 급하게 쏘았다.
합격이다!
탄알집을 이용해 지면에 총을 고정시킨 것이 가장 큰 합격 요인이었다. 합격이라는 사실 자체가 즐겁다
* 군생활 동안 사격을 하면 늘 16발 정도는 맞추는 나름 괜찮은 사격수였는데, 몇 발쯤 쏘고 나면 눈앞이 침침해지는 현상을 자주 겪었고, 후유증이라 할 만한 상황까지 왔음에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무섭고 답답한 일인 건, 나만 그런 게 아닐 거라는 거.
민수는 군대에 오기 전까지는 여자 친구에게 단 한 번도 편지를 써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 그가 9장의 편지를 여자 친구에게 썼다. 이유는, 절실해서. 정말 절실한 이유네.
용혁이가 총검술 훈련 도중 군화에 * ‘씨발’ ‘더워’라고 적고 있다. 불쾌지수가 높은 날이다. 싸움 나기 좋은 날이다. * ‘씨발 강원도’ 등의 대사가 교육 중 쉬는 시간에 들린다.
* 확실하지는 않은 기억인데, 연병장에서 교육을 받다 보면 군화가 흙먼지를 뒤집어써서, 손이나 나무 막대기로 글자를 적으면 모래사장에 글씨 쓰듯 적혔는데, 용혁이도 그렇게 적었던 것 같다.
* 강원도는 ‘초봄-여름-초가을-겨울’이라는 4계절로 구성되어 있어서, 강원도에서 사는 분들을 존경하게 될 정도였다. 물론 군 생활 자체가 힘들다 보니 어디 가나 덥고 또 추운 날씨를 과장되게 부풀려서 욕할 거리로 만드는 것도 많았다.
총검술 훈련 시간이 끝나고 조교님들이 훈련병들 앞에서 ‘연무형’을 보여줬다. 이 조교님이, ‘권상우가 그런 말을 했지, 연무형이 조교의 꽃이라고.’라고 말하셨는데, 권상우가 적절한 말했다 싶었다. 개머리판이 오른쪽 팔에 닿을 때 나는 ‘탁탁’ 하는 경쾌한 파찰음과 함께 ‘군무’-성조교님은 이를 19단 콤보라 칭했다-가 펼쳐졌는데 ‘오-.’ 하면서 즐거이 보았다.
군대에서 본 최초의 군인들의 공연이다. 마치 공연장에서 B-boy들의 딱딱 맞춘 몸동작을 볼 때의 느낌 같아서 군대 안이라는 생각도 잊은 채 한 명의 관객이 되어 연무형을 ‘관람’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순간 행복했다. 건강한 남자 네 명이 보여주는 움직임이 즐거웠던 게지.
* 총검술 연무형, 실제로 보면 이 느낌이 아닌데....
https://www.youtube.com/watch?v=x4FIiiWMh5A
오전 11시경, 기록사격 전 파상풍 주사를 두 줄로 나뉘어서 맞았다, 한 줄은 대위가 한 줄은 그냥 사병이 주사를 놓고 있었다. 난 그래도 대위가 낫겠지 하면서 사병 줄에서 대위 줄로 슬쩍 이동했다. 나만 그런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흐흐.
1. “시간은 잘 가고 날짜는 안 간다.” 어떤 녀석이 이런 말을 하는데, 맞는 말이지 싶다.
2. 군화 갈아 신다 들었던 무서운 말.
* “나 선임되면, 후임 자살시킬 거야.” 오, 무섭다.
* 확실히는 아니지만 이랬던 거 같다. “아 씨발, 아, 내가 진짜 군대 가서 선임되면 착하게 굴라고 했거든, 우와, 씨발, 아냐, 안 되겠어. 나는 선임되면 한 명 자살시켜야겠어. 우와씨.” 이런 대사를 날린 녀석은 진짜 한 명 자살시켰을까. 그러고 보니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