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교육대 2편
일기를 다시 본다는 것 만큼 괴로운 일도 없다.
더군다나 군대 때 일기라면이야.
혹시 글을 읽으며 불편해 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가 먼저 불편해했다고, 그 정도 댓가는 받아야겠다고 .
그 댓가는 당신이 끝까지 이 글을 읽어주는 거.
어쨌든 고맙습니다 -
오늘 저녁 먹고서 행군하다 느낀 거지만 여긴 하나의 국가이다. 나는 국적이 바뀐 것이다. ‘밖’이, 혹은 ‘사회’가 있는 게 아니라, ‘국외’가 있다. 그걸 느끼고 나니 서글펐다.
1. AM 04:32. 15km 행군준비. 잠 온다. 어깨 결리고. * 군장 안한 사람들에게 괜히 화난다. 누구한테 분노해야 하는지 알면서도.
2. 꿈에 제주도로 갔다. 하와이도 갔다. 그리고 이제 행군을 곧 간다.
3. 3km를 지나 * 민통선을 넘어 휴식. 다시 한 번 느끼지만 이젠 민간인이 아닌 것이다.
4. 두 번째 휴식. 발에 땀이 제법나기 시작했다. 물집 잡히지 않게 조심해야겠다. 양말을 갈아 신는다.
5. 8km 쯤 휴식. 6km 행군 때보다 확실히 편하다. 신기하다. 윈도우 XP 배경화면 같은 풍경이 계속 눈앞에 있고, 햇살은 적당히 뜨겁다. 신발을 고쳐 신는다.
6. 다시 휴식. 영표 曰 - ‘얼굴 * 개짜다.’ 갑자기 힘들어짐.
7. 끝! 아, 어깨 아프다.
* 몸이 안 좋은 사람들은 군장을 안 메고, 단독군장이라고 해서 전투조끼에 총을 메고 행군을 했다. 이게 누구 탓도 아니란 걸 머리론 알지만 막상 내가 군장을 멘 상태에서 앞서가는 이가 산책하듯이 총만 메고 가는 걸 보고 있으면 은근히 부아가 나기도.
* 민통선 : 비무장지대 바깥 남방한계선을 경계로 남쪽 5~20㎞에 있는 민간인통제구역-두산백과사 참조.
* 땀 때문에 얼굴이 짜다는 뜻. 군생활 하면서 20대 초반 남자 아이들의 선명하고 자극적인 참신한 표현들 때문에 즐거웠다. ‘씨발 강원도.’ 같은 것도 얼마나 함축적으로 군생활의 모든 걸 설명하는가. (강원도민한테는 정말 미안하지만.)
대대장 취임식이 있었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나는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의 구절들이 떠올랐다. 3중대 푸른 깃발은 구령에 맞춰 위로 스윽 올라갔다 내려오고, 그 찌의 움직임에 맞추어 나도 불쑥 솟아올랐다. 훈련병들에게 내려지는 명령을 따라 각진 디자인으로 붙여지는 그 장식적인 동선動線에, 찌를 문 물고기처럼 걸려 든 것 같았다.
* ……(중략)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기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화장실에서 본 ‘정신은 상류, 경제생활은 중류를 지향하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하류인생」이라는 책을 읽고 싶었는데 꼭 한 번 봐야지. 중류의 돈을 벌고 싶다. 정신은 상류에, 최상류에 두고 싶다.
*「하류인생」, 우츠다 타츠루 저. 전역하고 나서 각종 아르바이트로 근근히 연명해 나갈 때 봤던 책. 하류에 살면서 이런 책을 읽자니, 기분이 좀 묘했달까.
방독면 휴대용 가방 줄을 제대로 안 맨 상태로 일단 강의실에서 나갔는데 조교님에게 ‘걸렸다. 한번더 교육을 받았는데도 못했다. ‘씨’까지 나온 화난 목소리. 내가 잘못했지만 어쩐지 나도 화가 났다. 선임한테 욕 들으면 딱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었다.
* 어릴 때부터 줄을 매는 걸 어려워했다. 지금도 고리를 만들고, 풀고 하는 걸 엄청 어려워한다.
기민이한테 수류탄 교육시간에 미처 숙지 못했던 ‘왼손검지로 안전핀 제거하는 법’을 배웠다. 신기할 정도로 기민이는 이런 재주가 너무 좋다. 부럽다. 공간감이나 손재주가 좋은 애들이 확실히 있는 것 같다.
1. 중대장님 정신교육시간에 중대장님이 잠깐 앞에 나와 보라고 하셔서 옆에 섰다. 우리 형이 생각났다. * 대위. 같은 계급. 형도 이렇게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겠지. 긴장 풀라고 하셔서 문득 내 어깨를 느껴보니 경직되어 있었다. 정치외교학과 출신이라고 하시는데 그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 똑똑한 인상의 중대장님이었다.
2. 안전학습시간 교육 영상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John Lennon의 「Imagine」이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온다. 이런 슬픈 개그를 누가 심어 두었나.
* 형은 육군 대위 전역자. 2차 중대장까지 하고 전역했다. 중대장 보직 당시 집에서 휴가를 보낼 때 군인 말투를 쓰고 있었다는 걸, 내가 군대에 입대하고 나서 알게 되었다.
* 군대에서 Imagine을 듣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and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 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one……’
-John Lennon, 「Imagine」
1. 수류탄 투척 시간이다. 수류탄을 던지기에 앞서 크레모아 폭파 장면을 보게 되었다. 크레모아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정말로 저 정도면 사람이 너무 쉽게 죽겠구나 싶었다. 검은 연기가 산 밑에서부터 피어올라왔다. 개인 화기 사격을 할 때는 미처 이것이 무기란 걸 못 느꼈는데, 크레모아는 확실히 무기였다.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 인간이 이런 걸 만들어냈다는 것이 괴이하게 느껴졌다.
2. 훈련병들의 방탄모에는 질병이 있는 경우 그 병명이 붙어 있다. ‘기흉’부터 ‘체력저하’까지. ‘여자친구와 위험’, ‘부모님 위독’ 뭐 이런 건 안 적혀 있지만. 눈으로 볼 수 없는 질병과도 같은 상황이나 불안한 심리 상태가 호그와트의 마법처럼 방탄모에 적힌다면 어떨까. 궁금하다. 지금 나 같은 경우에는 ‘화장실 급함.’ ‘편지 답장이 아직 안 와서 아쉬움.’ 아마 이렇게 적히겠지.
4. PM 05:14. 이제다시 생활관으로 가야한다. 수류탄 투척 불합격. 수류탄 터지는 소리에 너무 긴장했나 보다.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아이들이 도착했다. 용혁이가 바나나, 콜라, 햄버거, 편지지, 볼펜을 들고 왔다. 기민이에게 "예수님, 잘 믿으려고?" 하고 물으니 "온리 기독교."라 답한다.
아침·점심 식사 배식반을 했다. 저녁은 배식반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너무 좋은 것이다. 일하지 않고 편하게 저녁밥을 먹을 수 있다는 걸 깨달으니 마음이 푸근해졌다. 하늘의 축복이라도 받은 양. 그런데 지금 개인정비 시간(PM 03:21)에 다시 생각해 보니 일요일은 사실 노는 게 당연하다. 당연한 휴식을 당연하지 않게 여기며 이곳의 리듬에 익숙해져 간다.
처음엔 얄밉게 느껴지던 녀석이 어쩐지 예전처럼 밉게 느껴지진 않는다. 그 녀석은 지금 내 눈앞에서 울고 있다. *상점 15점으로 집에 통화를 하고 온 뒤, 강하고 자신만만한 사내아이가 운다. 어쩐지 그 울음이, 자연스럽고 또 당연해 보인다.
* 훈련을 잘하면 마일리지처럼 상점이 쌓이고 집에 전화를 할 수 있는 기회도 준다. 이게 머라고!
1.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와 정반대의 체제에 들어와 있다.
2. 군입대란 체제 자체가 다른 곳에 들어오는 것.
3. 북한의 공연은 제식을 닮아있다. 극도의 긴장감이 주는 미학. 그것은 마치 전족을 한 여인들과의 성애와도 같다. 그녀는 완전히 통제되어 있고, 나는 그것을 즐긴다.
4. 북한은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다. 그냥 큰 군대다. 여성 북한학자들이 눈에 띄지 않는 이유 중에 혹시 군복무, 즉 북한에 대한 간접경험이 없다는 사실이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5. 동자승이 있다면 동자군이 있을 것이다. 태어난 곳 자체가 병영인 북한의 아이들을 떠올리니 머리 한 구석이 멍해진다.
6. 위장용 콤팩트는 꼭 '콤팩트' 같이 생겼긴 하지만 기능은 정반대다.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기' 위한 것이다. 본질적인 기능은 같다. 생존확률을 높이기 위해 있다.
‘군대’라는 말에 누군가는 ‘피해’를, 누군가는 ‘새로운 경험’을, 또 누군가는 다른 것을 생각한다. 인간의 언어는, 특히 추상적이거나 규모가 큰 단어일수록 그것에 관하여 이야기 한다는 사실만 알려준다. 마치 엄청나게 큰 나무의 그늘 아래에 있는 아이들이 각자 자기가 보고 있는 나무의 부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듯이.
“115번 훈련병.”
행정반에서 나를 불렀다. 보이스 피싱이었다. 내가 탈영했는데 사고를 당해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다고 낚시꾼들이 말했다고 한다. 심지어 내 목소리도 들려줬다고 한다. 중대장님께서 전화기를 건네 주셨다. 수화기 너머 어머니의 불안하고 울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괜찮다고, 잘 있다고 이야기를 전하는데, 그 사이 코감기가 걸려서 목소리가 변한 아들의 목소리가 낯설었나 보다. 목소리가 왜 그러느냐고 몇 번 물으셨는데 또 보이스 피싱이 아닐까 의심하시는 듯 했다. 어머니나 나나 평소와는 다른 목소리로 근 한 달 만에 전화를 했다.
짧은 통화였다. 잘 있다고 했다. 잘 지내시란 말도 할 걸.
*숙영이다. 크린랲을 반합에 씌우고 밥을 먹는다. 진짜 전쟁이 나면 크린랲을, 락앤락을, 한경희스팀다리미 같은 상표들을 만날 수나 있을까. 우리 문명은 전쟁 같은 건 생각조차 않은 채 이미 발전 해 있다. 가벼운 소꿉놀이 같다, 생각하며 짬통 옆에 쌓여진 크린랲을 바라본다.
*숙영. 야외에서 텐트를 치고, 여기까진 머 나쁘지 않은데, 훈련한다.
여기서 나보다 7살 어린 동기들에게서 발견한 문화 코드 중 하나는 다름 아닌 「포켓몬스터」다. 숙영지 근처에 나타난 나방을 보고 아이들은 ‘버터플’이라 한다. 순간 나에게도 나방이 아주 친숙하고 귀여운 것처럼 보였다. 곤충이 주는 징그러운 느낌은 사라지고 ‘버터플’이라는 캐릭터만 눈앞에 남은 것이다. 캐릭터에는 거짓말 같은 효과가 있다.
무릎은 많이 좋아졌다. 군화를 신고 30km 행군을 가기로 한다.
숙영기간 동안 전우조 애들이랑 더 가까워진 것 같다. 또래에 비해 신뢰감 있고 진중했던 용혁이와 동주에게 고맙다. 이제 "1박 2일"을 보면 더 재밌게 볼 수 있겠지. 다른 분대라 말을 잘 못 섞어봤던 재호와, 정선이, 일영이하고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1박 2일이 썩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텐트 속에서 나누는 시시껄렁한 이야기가 참 즐겁다는 걸 알아 버렸으니 tv를 보며 멍하게 웃기도 하겠지. 흙이 잔뜩 깔려 있던 야상 깔개, 너부러져있던 옷가지들, 내 귀에다 대고 코를 골던 동주, 윗 스냅단추를 잠그지 않고 텐트를 완성해 버려서 입구가 닫히지 않아 당황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여태까지의 훈련소 시간 중에 4주차가 가장 즐거웠다. 너무 목마르고, 잠은 모자라고 각개 훈련 도중에 정말 진이 다 빠지는 느낌을 받으며 총구를 겨누다 졸려서 그만 눈을 감아버리기도 했지만. 아니, 그랬으니 즐거웠다. 목요일 오전 마지막 각개전투와 오후에 있을 30KM (정확히는 27KM) 행군이 남았다.
1. 오전 9시 41분. 저 너머 보이는 안개 속 뿌연 산이 보기 좋다.
2. PM 07:41. 군화를 신었다. 30km 행군 대기 중이다.
*군가.
동이 트는 새벽꿈에 고향을 본 후 외투 입고 투구쓰면 맘이 새로워
거뜬히 총을메고 나서는 아침, 눈들어 눈을 들어 앞을 보면서
물도 맑고 산도 고운 이강산 위에 서광을 비추고자 행군 이라네.
잠간 쉴때 담배피며 구름을 본 후 배낭 메고 구두끈을 굳이 매고서
힘있게 일어서면 열려진 앞길 주먹을 두주먹을 힘껏 쥐고서 맑은 하늘
정기도는 이강산 위에 오랑캐 내쫒고자 강행군이다.
장담한다. 당신의 남자친구가 아무리 멋있는 사람이건 간에 입대를 한 이상 이 노래를 불렀다. 오랑캐 내쫓고자 강행군이다, 이 가사를 입에 실었다.
신병교육대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아껴 뒀던 별사탕을 입에 넣었다. 102 보충대에서의 누군가 말처럼 피가 짜릿짜릿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달았다.
무릎이 아팠다.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이를 악 물기도 했다. 아픈 덕분에 졸리거나 하진 않았다.
30km 행군이 끝났다.
「애너미 앳 더 게이트」 와 「킬링필드」는 다 같이 전쟁을 다룬 영화지만, 「킬링필드」를 * 볼 때 아이들의 관심도는 떨어졌다. 두 영화는 근본적인 주제가 다른 영화다. 「킬링 필드」가 ‘전쟁을 벗어나 내가 산다’를 다룬 반면, '애너미 앳 더 게이트'는 ‘전쟁 속에서 너를 죽이고 누군가를 살린다’ 쪽이었다.
전쟁이란 큰 단어 속에는 여러 요소가 섞여있고, 그것 안에는 오락으로 즐길만한 것과 피하고 싶은 진실까지 다양하다. 「애너미 앳 더게이트」를 보며 전쟁을 참 잘 묘사했다고 생각했는데, 무언가를 잘 묘사하는 것이 곧 그것을 정확히 반영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애너미 앳 더 게이트」는 일종의 스포츠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그 즐거움을 부인할 수 없지만
*훈련 막바지에 영화감상 시간이 있었다.
전생이란 걸 생각해 보자면, 이전 생애들 동안 나 또한 전쟁에 참여 했을 터이고, 전쟁이란 스포츠에서 얻는 쾌감은 한 생애마다 증가했을 것이다. 인류의 집단 무의식 속에서, 전쟁을 즐거워하는 그 피는 계속하여 진해진 것 아닐까.
* 이 날 자대 배치를 받았다. 사단 본부로 가고 싶었는데 가지 못해 아쉬워했다.
1. 정신 교육 중에 3. 26 천안함 사건의 의미를 가르치는데 안중근 의사의 서거가 나란히 설명된다.
2. 적개심을 키우라고 한다. 천안함 사태에 대해서 내 가족, 내 친구가 죽었다고 생각해 보라며.
북한과 포르투갈의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축구대회 조별리그 G조 2차전. 0:7. 정신 교육 후 이 소식이 전해지자 환호하는 소리가 들린다. 정신교육의 효과란.
* 짬통 보관소 청소를 하다가 다수의 구더기를 보게 되었다. 뭐, 생각보단 귀엽네, 하면서 하얀 벌레를 보다가, '어떻게 이게 파리로 연결되지?'하며, 의문하고, 감탄했다.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구더기랑 파리랑 과연 하나의 생명이기는 할까 싶다. 생명이란 단어의 외연은 넓고, 동일한 '개체'라는 것도 명확하지 않은 듯하다. 파리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지도 모른 채 지금도 짬통 주변을 윙윙 거리겠지만.
* 짬통 : 잔반을 담아 둔 통
예전에 아침구보를 뛰며 생각한 것인데, 군대에는 군대 특유의 아름다움이 있다. 아주 간결한 아름다움인데, 극도의 형식미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곳에는 혼돈이 없다. 1+1은 분명히 2이고, 형용사와 부사가 없는 문장들에는, 세상, 아니 운명, 아니 ‘생’에 대해 두려움을 잊을 수 있도록 하는 힘이 있다. 생을 완전히 통제하고, 장악한다는 그 즐거움이 이 아름다움의 뒤편에 자리 잡고 있다. 형식이 실체를 완전히 장악해버린다. 형식에 몸을 맡겨버리면 그 뒤엔 형식이 스스로 기계처럼 작동해 버린다. 형식에는 중독성이 있다. 그러나 중독성이 있는 것들이 주는 아름다움의 뒤편에는 두려움이 있다. 키가 작아 굽이 높은 구두를 신었고, 한 국가의 최고 권력자였던 한 인간이 꿈꿨던 세계와 두려워했던 세계가 아주 어렴풋이나마 느껴진다. (그가 마지막으로 먹은 술은 양주였다. 군대의 아름다움을 좋아했을지 모르는 이와 어울리는 술이라고 생각된다.)
정말, 너무 바빠서, 죽고 싶을 정도로, 바빴다. 힘들었다. 하루가. * 오버로크 초치기 달기에, 긴장감에 손이 떨렸다. 너무너무 싫고, 또 싫었다. 모멸감과 긴장이 겹쳤다.
* 자대 배치 받기 전 부대 마크 바느질을 한다. 빨리 하라고, 쪼아대는 통에 무지 열 받아 했던 기억이 난다. 상병 쯤 돼서 느낀 거였지만, 어떤 일이든 웬만하면 다 시간이 있다. 엄청 급해 보여도.
(지금부터는 자대 배치 받기 전 연대에 머물면서 쓰는 글이다)
*‘연대대기’라는 제도 덕분에, 자대에 들어가기 전 그래도 샤워를 했다. *포병으로 *배치 받았다. 의무대에서 파스를 받아 무릎에 붙였다. 포병은 두렵다. 계속되는 육체 활동. 그런 것들 속에서 너무 힘들까봐 겁이 난다. 3소대 애들과 헤어지면서 어쩐지 울음이 났다.
어떻게 될까, 앞으로는. 군의관님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얘기하셨다. 나이 든 사람, 조심해야 된다고 했던가.
*훈련소에서 자대로 가기 전, '연대대기'라는 제도가 있었다. 예를 들면 K사 마포구 영업소로 가기 전 서울 본사에서 잠깐 머무르는 것, 그런 거.
* 이때의 나를 만나면 이야기해주고 싶다. 너 보병이야. 81mm 박격포는 포병이 아니란다. 포병이라고 해서 장갑차를 타고 다니는 걸 머릿속에서 그렸지만 전혀 그건 아니었다.
어제 환자 대기실에서 많은 책들이 꽂혀 있는 걸 봤다. 책들이 모여 있는 곳은 공기가 다르다. 차분한 가운데 세상을 망가뜨리지 않을 만한 유쾌하고 진지한 기운이 서려있는 곳. 1달 만에 느끼는 그 즐거움에 가슴이 설레었다.
오늘 새벽에 화장실에 갔을 때 변기 옆에 잡지「ARENA」가 있었다. 이 즐거운 자본주의의 책. 거품 같은 향락이 촘촘히 활자화 되어 있는 책. 질 좋은 고기를 씹을 때 느껴지는 기름기를 닮아있는 이 책.
화장실을 나왔다가, 다시 갔다. 배가 다시 아프잖아, 하면서. 잡지는 2년쯤 지난 것이었고, 읽어보니, 뭐, 대단한 내용은 없었다. 그런데, 뇌에 기름기가 끼게 하는 그 잡지가, 커버에 있던 제니퍼 로페즈의 멋 부린 듯하나, 어쩐지 폼이 안 나는 자세가 반가웠다.
깔끔하지만 냉정하지는 않은 옷차림을 하고서 외투 안주머니에 이야기를 적은 종이를 잔뜩 담아 둔 어떤 사람이 저 멀리 안개 속에서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발을 까딱거리며, 서 있다. 나는 익숙한 그의 실루엣이 반갑다.
무릎도 아프고, 혹시 책을 볼 수 있을까 싶기도 해서, 축구를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어쨌거나 연병장에 나오게 되었다. 값싸게 맛있는 불량식품 같은 이 축구는, 뜬금없이 잘하는 애들, 예상대로 못하는 애들, 그냥…… 뭐지? 싶은 애들까지 섞여서 경기를 한다. 음식물이 아직 덜 뒤섞인 “*짬” 같다. 나도 이젠 참여하게 되겠지.
* 군대스리가 : 독일 축구 리그 명칭인 분데스리가bundesliga에 빗대어 군대 축구를 표현하는 말.
* 짬 : 잔반의 줄임말. 야이 짬찌야, 짬 되냐고 깝치냐, 쟤는 짬 되잖아, 그냥 짬 시킵시다, 등 용례는 다양하다.
연대대기 기간 동안에 쓰는 생활관에 사람이 많은 터라 잠자리가 좁다. 옆에 자는 녀석이, 잠버릇이 안 좋았다. 자다가, 자려하다가, 몇 번씩 깬 뒤에 ‘야, 너 잠버릇 너무 안 좋다.’라고 불쑥 말했다. 신병 교육대 생활을 하면서 ‘야’라는 말은 안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예민한 기분에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 그 말을 해버렸다. 민종이는 군대 마치면 나도 욕할 거라고 그랬다.
입영대기기간 동안 만난 ‘인솔자’는 신병들의 반복되는 질문에 대해서 별 다른 짜증도 없이 답해 주었다. 행정병 일이라는 게 정말로 빡빡해 보이고, 다리도 좀 아파 보였는데, ‘나 같으면 샤우팅 했을 거야.’ 싶은 시점에도 그저 가볍게 질문 겹쳐하지 말라며 넘어갔다. 좋은 선임 덕분에 입영대기기 기간 3일이 편했다. 고맙고, 감사하다.
이제 몇 시간 되면 자대에 배치 받게 된다. 오늘은 ‘연대대기’의 마지막 날이다. 아직은 어느 곳이 나의 최종목적지가 될지도 확실 하지 않다. 그래도 몇일 정도 자대 생활을 곁눈질하고 이리저리 귀동냥한 덕분인지 마음이 조금은 편하다.
**연대로 가게 된다는 전달사항을 받고, ‘연대대기’라는 제도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심 기뻤다. 5주간의 신병교육훈련이 마치자마자 바로 자대로 배치 받는다는 것이 마치 노란 고무줄의 새총을 들고서 전차 앞에 서는 것만 같았다. 준비는 덜 되고 긴장만 가득한 채로 동기들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와 엄격한 상하위계질서와 대면한다는 것이 쉽지 않게 여겨졌다. 밖에 있을 때는 들어보지 못했던 연대대기란 제도가 그런 나에게, 친절한 조력자가 되었다. 뻑뻑한 총기부분에 떨어뜨리는 기름 한 방울 같다고나 할까.
한 생활관이 연대대기를 하게 된 동기들로 들어찼다. 신병교육대에서, 특히 숙영기간 동안 그리도 원했던 물도 쭉 들이켜 마시고, 어쩐지, 아니 확실히 냄새 나는 것만 같은 몸도 씻었다. 이왕이면 선임들에게 깨끗한 모습으로 다가서고 싶었는데 다행이었다. 집에 전화도 드렸다. 오랫동안 연락 못한 친구 녀석과도 통화했다. 보충대에서 보낸 편지를 이제야 받았다는 친구 녀석의 말에 조금 허탈해 하기도 했고, 여기 와 보니 휴가 때 술 먹자던 네 말 이해간다며 웃기도 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편안한 공기가 푸근하고 달콤했다.
이런저런 교육도 받았다. XX연대의 연혁이라던가 부대 마스코트에 대한 설명도 들었고, 휴가․외박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들었다. 모범병 이야기에 눈이 반짝거리던 동기들이 많았다. 월급도 많다는 얘기에 나도 귀가 솔깃했다.
그리고 아직 막 알에서 깨어 나온 병아리 같은 우리들과 3박 4일을 함께 해주신 ‘인솔자’ 상병님께서는 중요한 것 같은데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것만 같은 자대 생활의 노하우를 이것저것 전달해주셨다. 모포 혼자 잘 개는 법을 가르쳐주실 때는 생활관 안에서 ‘마법 같다.’는 소리가 나왔다. 나도 몇 번 따라 해봤는데 숙달된 채로 자대로 가면 사랑받을 수 있겠다, 싶었다. . 이 글을 쓰는 동안 자대배치 시간이 또 한 발 앞서있다. 미처 정리 하지 못한 * 더블백을 싸야겠다. 옆에 있는 대환이가 * 안경 청구서가 있는지 물어본다. 진작 챙겼다. 연대대기를 하면서 소지품 정리를 다시 한 번 할 수 있었다.
어쩐지, 이 기간 동안, 앞으로의 1년 8개월 남짓한 기간을 위한 달달한 예방주사를 맞은 기분이다. 뭔가 준비된 것 같다. * 자만일지 몰라도.
* 더블백 : 정식명칭은 duffle bag. 천으로 만들어 윗부분을 줄을 당겨 묶게 되어 있는 원통형 가방.
* 안경 청구서 : 안경 착용자들의 경우, 방독면용 안경이 따로 필요해서 시력검사를 하고 청구서를 가지고 있었다. 자대에 가니 다시 시력 측정을 했다.
* 물론, 자만이었다.
자대로 가기 몇 시간 안 남았다. 연대대기기간 동안, 자대 배치 첫날에 무얼 시킨다더라는 말이 많았는데, 입소 전부터 해오던 걱정이 지금까지 계속된다. 여기서 * ‘핫바’ 이야기도 들었지만, 1주일 전에 자대로 왔다는 신병 아저씨의 ‘별 거 없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냥 별 거 없으면 좋겠다.
* ‘핫바’이야기는 그야말로 음담패설이고, 우스갯소리다. 한 번 알아보시던지.
* 실제로 별 거 없었다. 괜한 걱정이었다. 장난치는 소대도 있었지만 우리 소대는 아니었다.
+이건 수첩에서 찢어진 종이에 적혀있던 글. 언제 적었는지 추측조차 할 수 없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죽음’은 군대를 기웃거리고 있다. 반드시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군종목사님의 말에는 그런 속뜻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죽음’과 가까운 곳에 신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