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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관매니저 Oct 09. 2024

[팬텀 스레드] 이 가학적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작품은 언제나 매혹적입니다. 대중적이진 않지만, 그만의 감성과 색채 가득한 이야기로 보는 사람을 빠져들게 만들죠. 제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모든 작품을 보는 것인데요, 지금까지 [마스터], [데어 윌 비 블러드], [팬텀 스레드], [인히어런트 바이스], [매그놀리아]를 봤는데, 아직 10편이나 더 볼 게 남았다니 정말 행복하네요.(워후!)


그중에서도 오늘은 제 최고의 인생영화 [팬텀 스레드]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 팬텀 스레드의 의미?


영화 제목인 '팬텀 스레드(Phantom Thread)'는 보이지 않는 실, 환영 같은 실이라는 뜻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Opera) 덕분에 팬텀을 '유령'으로 번역하기 쉬운데요. 팬텀은 이미 죽어서 현세를 떠도는 유령(Ghost)과는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포켓몬스터의 팬텀이 유령타입의 포켓몬이지 유령 자체가 아니고, JTBC의 팬텀싱어가 유령 가수가 아닌 것처럼, 팬텀은 '실존하지만 보이지 않는 환영' 정도의, 유령보다는 조금 더 신비롭고 미스테리한 느낌으로 생각하면 좋을 듯합니다.


그렇다면 스레드는 어떨까요? 스레드는 옷을 만드는 실, 이야기의 줄기, 가닥 등을 뜻합니다. 실은 가느다랗고, 무언가를 이어주고, 엉키면 풀기 어려운 특성을 가지고 있죠. 이에 팬텀 스레드는 상류층 여성들의 맞춤옷을 만드는 디자이너인 레이놀즈 우드콕의 환영과도 같은 디자인 실력(실을 이용한)을 내포할 수도 있고, 어머니의 잔상과 연결된 보이지 않는 연, 또는 영화 전반에 걸친 알마와 우드콕 사이의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관계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Alchemic Linguist님의 '팬텀 스레드(2018) : 주술적 가피학 관계의 일상성'이라는 리뷰를 보면 우드콕에게 있어 드레스를 만드는 일은 어머니를 불러내는 일종의 초혼 의식이며, 드레스를 엮어 만드는 데 사용하는 실이 곧 유령을 불러내는 '팬텀 스레드'라고 말합니다. 


독자님들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셨나요?



2. 우드콕의 여성관: 어머니의 재현과 관계의 주도성


영화에서 우드콕과 여성과의 관계는 어머니의 일부를 재현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어머니의 분신인 누이 시릴은 우드콕이 유일하게 순응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누이에게서는 그가 원하는 대로의 어머니의 모습을 재현할 수 없기 때문에 매번 새로운 여자를 찾아 어머니의 팬텀을 만들어 냅니다. 그 외의 여자들은 우드콕에게는 관심 밖일 뿐입니다.


우드콕에게 어머니는 삶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머니에게 배운 드레스 짓는 일을 하고, 옷 캔버스 천 속에 어머니의 머리칼을 넣어두고, 만족스러운 드레스가 만들어지면 어머니가 보셨으면 좋겠다 생각하죠. 심지어는 어머니의 유령을 보기까지 합니다.


그런 우드콕의 상태로 볼 때, 우드콕의 성향, 취향 등은 어머니가 상당 부분 투영됐을 겁니다. 그가 찾는 여자는 어머니를 닮은 여자일 겁니다. 알마를 처음 본 시릴은, 알마에게 이상적인 몸매라며 쟤(우드콕)는 약간 뱃살이 있는 것을 좋아한다 말하죠. 하지만 알마의 외모는 알마에 따르면 일반적인 미의 기준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어깨는 넓고, 목은 새처럼 가늘고, 가슴은 납작하고, 엉덩이는 필요 이상으로 크고, 팔뚝은 굵으니까요. 그런 알마를 완벽하고 당당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우드콕의 드레스입니다. 우드콕은, 어머니의 두 번째 결혼식 드레스를 만들어주던 16살의 소년에서 더 자라지 않고, 어머니와 비슷한 외모를 가진 여자를 찾아 드레스를 입혀 그녀를 완성시켜 주는 것으로 어머니의 팬텀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죠.


이때 혼동해서는 안 되는 것은, '우드콕의 옷을 입는 여성=어머니의 팬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팬텀은 우드콕이 자신의 취향에 맞게 스스로 선택한 여자만이 가능합니다. 우드콕을 찾아오는 고객은 그들의 필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우드콕을 찾아오죠. 즉, 우드콕이 컨트롤하는 것이 아닌,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드콕에게 있어 고객의 드레스를 짓는 것은, 어머니가 좋아할 만큼 예쁜 드레스를 만드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드레스를 입어 완성된 고객의 모습이 아닙니다. 드레스를 만드는 과정까지는 그의 주도 아래 이루어지지만, 그 드레스가 완성되어 고객이 소유하게 되는 순간 그는 모든 주도권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는 그에게 상실감을 안겨주고, 어머니의 손길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가 가끔 일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약해지는 순간이 바로 이 순간이죠. 즉, 우드콕에게는 관계의 주도권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 주도권이 상실된 순간에 자신을 회복시켜 줄 어머니의 팬텀이 늘 필요합니다. 


바바라 로즈와의 시퀀스는 이런 우드콕의 주도권에 대한 성향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바바라 로즈는 자기 비하적이고, 품위 없고, 철없는, 아이 같이 늙은 상류층 여성입니다. 어머니의 또 다른 분신인 누이 시릴을 제외하고 우드콕은 처음으로 수동적인 상태에 놓이게 되어(결혼식에 반강제 참석하는) 굉장한 불쾌감을 느낍니다. 게다가 로즈는 그 예쁜 드레스로 입을 닦고, 술에 취해 쓰러지고, 그대로 곯아떨어지는 추행을 벌입니다. 아마도 이때가 우드콕에게는 자신이 만든 드레스가 천대받는 모습을 처음 목격한 순간일 겁니다. 그런 그에게 알마는 충동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곯아떨어진 로즈에게서 드레스(주도권)를 강제로 벗겨 옵니다. 만족한 우드콕은 알마에게 진한 키스를 하고, 다음 날 아침식사에서 처음으로 오트밀을 먹겠냐며 알마의 의사를 물어봅니다. 그에게는 가장 신선한 자극이었을 겁니다. 상실의 순간에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나서서 주도권을 찾아줬기 때문이죠. 


왜 이토록 우드콕은 관계의 주도성을 놓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일까요? 단순히 우드콕이 어렸을 적 어머니의 성향이 그랬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만, 저는 그가 원하는 대로의 어머니를 재현하기 위해서 대상의 주체성을 배제시켜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여성들이 인형이 아닌 스스로의 생각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 관계엔 끝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의 뮤즈들은 처음엔 우드콕의 카리스마에 매혹당해 그를 따르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가 자기를 온전히 바라봐주기를(주체성의 회복을) 바라게 되고, 결국 집에서 쫓겨나게 되죠. 그렇게 우드콕의 일평생은 어머니를 기리고, 재현하는 순간을 반복하며 보내지만, 알마의 등장으로 새로운 장에 들어서게 됩니다.




3. "저는 그냥 그를 제 방식대로 사랑하고 놀래키고 싶은 거예요"


알마는 우드콕의 이전 뮤즈들과는 달랐습니다. 이전 뮤즈들이 자신의 방식대로 사랑'받기'를 바랐다면, 알마는 자신의 방식대로 사랑'하기'를 원했습니다. 서프라이즈를 준비하는 알마를 시릴이 말리자 알마는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저는 그냥 그를 제 방식대로 사랑하고 놀래키고 싶은 거예요
I'm trying to surprise him and love him the way i want to



개인적으로 이 대사는 알마가 어떤 인물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대사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알마는 우드콕이 버터에 조리는 조리법을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방식대로' 아스파라거스를 버터에 조려버리죠. 그렇게 시릴의 조언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들뜬 마음으로 준비한 서프라이즈는 정말 하나도 놀랍지 않게 완벽한 실패로 막을 내립니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우드콕의 모습입니다. 정말 연기를 못하긴 했지만, 버터에 졸인 아스파라거스를 맛있다고 얘기하는 나름의 노력이라도 보였고, 이 사건으로 알마를 내보내지도 않았죠. 평소의 그를 생각한다면 대단한 변화입니다. 아마도 알마가 그의 드레스를 되찾아줬던 일로 알마를 이전의 여자들과는 다르게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참혹한 실패에 좌절한 알마는 다른 여자들처럼 떠나는 대신 심통을 부리기로 작정합니다. 독버섯을 물에 넣어 우드콕을 중독시킨 것이죠. 덕분에 우드콕은 공주의 웨딩드레스(우드콕의 주도권으로 상징되는)를 훼손하고, 나을 수 있을까 두려워하며 어머니의 손길을 찾는 아이가 되어버립니다. 생각보다 더 성공적인 독버섯의 효과에 우드콕을 챙기는 알마는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마저 보입니다. 의사의 진찰을 강력히 거부한 우드콕은 그날 밤 어머니의 유령을 봅니다. 이 시퀀스는 어머니의 유령을 쫓던 우드콕이 알마에게로 전환되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시릴이 부른 의사를 알마에게 물리쳐달라 말하고, 어머니의 유령은 알마의 등장 이후 사라지는 연출로 말이죠. 아침이 되어 회복한 우드콕은 알마에게 청혼을 합니다.




4. 나는 저주받지 않았어(Never Cursed)


영화 초반부에 우드콕은 시릴에게 어머니의 유령이 보인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죽은 사람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왠지 편안해,
전혀 무섭지가 않고 말이야
It's comforting the thing that dead are watching over the living.
I don't find that's spooky at all


그에게 어머니의 유령을 쫓던 시간은 불안할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정돈되어 있던 안정적인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삶은 과거에 얽매인 채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는 죽은 삶이기도 했습니다. 우드콕이 쓰러진 날, 알마는 공주의 드레스 속에 넣어둔 '나는 저주받지 않았어(Never Cursed)'라고 적힌 종이를 발견합니다. 우드콕은 어떤 이유에서건, 그의 안정적인 삶이 저주받은 삶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혼 후 우드콕의 삶은 놀라울 정도로 변화합니다. 집과 일터, 그리고 아주 가끔 시골집에 내려가던 것이 전부였던 그가 스키장을 가고, 조용한 아침을 보내지 않으면 하루를 망치는 그가 알마의 시끄러운 식습관을 참아내게 됩니다. 시릴과의 대화씬에서 우드콕은 시크(Chic)라는 단어가 어떤 뜻인지도 모르겠다며 기분 상해하고, 알마로 인해 일에 집중할 수 없고 자신감마저 떨어졌다 토로합니다. 그는 저주받은 삶을 벗어났지만, 알마를 선택한 현재는 변덕스럽고, 불안합니다.


Day-Lewis on set in Lythe, near Whitby CREDIT: GLENN KILPATRICK/WHITBY PHOTOGRAPHY



5. 이 가학적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


부부싸움으로 기분이 상한 알마는 또다시 독버섯을 집어듭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다르게 대놓고 무자비한 양의 버터에 버섯을 조리고, 시끄럽게 물을 따르면서 우드콕의 신경을 건듭니다. 그러고는 한 입을 집어먹은 우드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난 당신이 아파 쓰러졌으면 좋겠어요. 힘없고, 약하고, 무방비하게 내 도움만을 기다리게 말이죠. 그리고 다시 강해지길 원해요. 죽진 않을 거예요. 당신이 죽고 싶어도 안 죽을 거예요. 당신은 좀 쉬어야 돼요.
I want you flat on your back. Helpless, tender, opened, there's only me to help. And then I want you strong again. You are not going to die. You might wish you going to die, but not going to. You need to settle down a little.



알마의 이런 무시무시한 말에, 우드콕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키스해 줘. 쓰러지기 전에.
Kiss me my girl before I'm sick.


알마는 우드콕의 다른 여자들처럼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파괴하는 것으로 그를 저주받은 삶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줬습니다. 비록 그 방식이 가학적이고 소름 끼칠지라도, 자신의 방식으로 그를 사랑하는 여자와 그것을 필요로 하고 받아들인 남자의 이야기는 그 어떤 사랑 이야기보다도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결혼은 무덤이라며 되도록 늦게 결혼하라는 말이 우스갯소리로 회자되는 시대입니다. 서로의 짝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행복만을 가져다주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화내고, 싸우고, 짜증 내고, 불안해하며 같이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우리의 삶이기에,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고, 변덕스러움과 불안함, 추악함마저 함께하기로 하는 그 마음이 참 아름답다 생각합니다.






P.S 이 리뷰는 2020.03.10에 필자의 블로그에 올렸던 것을 그대로 가져왔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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