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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보 Aug 24. 2022

06. 육아와 육묘는 닮아있다

아이와 반려동물 사이, 엄마의 선택은?

  


 아이를 낳고 세 마리의 반려묘와 생활을 시작하며 나의 책임감은 막중해졌다. 내 발 아래 놓인 작은 생명들의 엄마.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 먹을 것을 주고 끊임없이 깨끗이 닦아주고 환경을 유지하는 사람. 그리고 무한히 애정을 줘야 하는 존재.

 

 육묘는 육아와 비슷한 점이 많다. 육묘는 반려견을 키우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들은 나를 주인으로 받들지 않고 명령을 기다리지도 않는다. 고양이의 행동은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관심을 받길 원하고 피부를 다정히 맡대길 요구한다. 나는 그들의 건강에 끊임없이 유의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나의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육묘는 육아처럼 '나'의 희생을 기반으로 유지된다.



 그러니 엄마는 힘에 부칠 수밖에.


 고양이를 입양하려면 먼저 고양이의 15 정도의 수명을 생각해 나의 인생을 설계해 봐야 한다. (임신을 계획하는 것과 비슷하다)

 15년은 아주  세월이므로  사이 결혼과 임신, 출산이 있을  있는 적령기의 나이라면 아이와 고양이를 같이 키울  있을 것인지 또한 고민해 봐야 한다. 나는 그렇게 고민하지 못했던 결과, 양쪽에서 전전긍긍하는 엄마가 되었던  같다.


 아이가 많이 어린 아기였을 때 위생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청소에 집착했던 기억이 난다. 한 손에는 돌돌이 테이프, 한 손에는 물티슈를 장착한 엄마는 정작 청소하느라 아기의 울음에는 매번 늦게 반응했던 것 같아 후회스럽다. 고양이 털 땔 시간에 아기 눈을 한 번 더 맞춰 줄걸. 털, 그게 뭐라고. 고양이는 고양이대로 요구를 하지 아기는 울지 양쪽에서 나를 정신없이 후두려패는 생지옥이 따로 없다. 그럴 때면 항상 아기에게 먼저 달려가는 엄마였기에 고양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도 엄마의 짐이 된다. 아니 그냥 이 모든 것들이 엄마의 마음을 패배자처럼 힘들게 한다. 그렇지만 이제 되돌릴 수 없다. 그러니 해내야 한다.

 

 고양이는 토한다. 아기도 토한다. 빨래는 또 돌아간다. 아기는 먹어야 하고 고양이도 먹어야 한다. 설거지가 쌓인다. 먹었으면 씻어야 하고 배변도 잊지 않아야 한다. 치울게 많다. 아직 지쳐선 안된다. 이제 사랑으로 보듬어 주어야 한다. 엄마의 애정의 총량은 정해져 있는데 어디 보자 누굴 안아 올릴까. 아기가 잔다. 나도 좀 아기옆에 잠들까 싶다. 그럴때면 이제 나는 사랑을 다 쏟아 더 줄게 없는데 고양이들이 자신들에게도 관심을 달라고 야옹거리며 운다. 나도 울고 싶은데 엄마는 울 시간이 없네.




 나는 토하고 먹고 싸는 아기와 고양이들을 케어하며 생각했다. 인간은 왜 어떠한 보상도 없이 희생을 하면서 까지 아이를 낳고 고양이를 기르는 것일까?





 아기가 처음으로 엄마라는 단어를 스스로 깨우쳐 뱉었을 때의 희열은 인간을 거부하며 위협을 하는 고양이가 처음으로 쓰다듬을 허락했을 때의 기분과 비슷하다. 그런 순간에는 언어를 뛰어넘은 깊은 내면의 나와 네가 만난 것 같은 기분이다.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바로 누구의 엄마라는 자아가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엄마라는 자아 괴리감 때문에 '이게 맞나?'라는 의문만 더해져 괴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그런 순간들에서 나의 존재 의미는 바뀐다. 이제 과거의 나는 아주 먼 옛날 아는 사람처럼 느껴지고 누구의 엄마인 내가 된다. 마찬가지로 고양이를 키우며 나누는 깊은 교감뒤엔 다시 고양이가 없었던 때로 돌아가지 못한다. 나는 고양이가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청소년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시작한 후 이렇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경험을 어디서 하겠는가.

 인간은 어려서부터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같은 의문을 한쪽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지도 모른다. 그런데 육아나 육묘 중 나의 가치는 그들에게 생명줄과 같다. 내 가치가 필요 그 이상이라는 점은 힘들기도 하지만 내가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아기가 처음 엄마라고 불러줄때. 자고있는 사이 내 침대에 처음으로 기대오는 고양이. 내가 주는 사랑이 너에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사실확인. 볼품없는 트로피지만 보상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


 

 육아와 육묘. 둘은 공존할 수도 있고 절대로 공존할 수 없기도 하다. 인간 엄마는 결국은 인간 자식을 더 사랑하게 될 테니까. 이제는 엄마인 나의 정체성이 꽤나 맘에 든다. 고양이들은 이런 나라도 괜찮은 걸까? 엄마를 나누어도 좋은 걸까? 고양이에게 물어볼 수 있다면 묻고 싶다. 아무래도 좋은 대답은 나오지 않을 듯 해 물그릇, 밥그릇이나 채워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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