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긴 소풍을 시작한 너를 묻어주며
8월의 초록이 답답할 정도로 짙다. 여름이 한창이다. 이럴 때면 아이들은 여름방학을 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겨울 방학보다 여름방학이 더 좋았다. 시골에서 겨울을 나는 건 바람 없는 날 내리는 눈처럼 지루하지만 여름은 만물이 생명력을 뿜어내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골의 여름은 더욱 풍요롭다. 할머니 말대로 "지천에 먹을 것이 널렸다."이다.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니 나도 다시 여름방학이 생겼다. 한 동안 중요한 걸 잊고 산 기분이다.
그러던 중 매스컴에서 '우영우 나무'라는 것을 보았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나오는 500년 된 나무였다. 초록이 웅장하게 뻗은 나무를 보고 나는 우리 시골 동네 윗자락에 자리한 크고 아름다운 비자나무가 떠올랐다. 지금쯤이면 열매를 맺어 향이 더 짙어졌을 크고 웅장한 그 나무. 여름이면 시골집이 생각나는 것도 그 나무의 향을 잊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크고 오래된 나무는 마치 곧 말이라도 할 것처럼 신비롭다.
그 나무를 지나 불과 이십여 미터쯤이 우리 집이다. 이번 여름은 아이와 함께 시골집에 처음으로 단둘이 가보았다. 목표는 아이랑 시골 살기를 하는 것, 또 쪼깐이를 마당에 묻어주고 오는 것이다.
지금 시골집엔 호통을 치던 할아버지도 없고 나의 부친과 90이 훨씬 넘은 할머니뿐이다. 어린 손자 둘을 한 번에 휘어잡던 할머니의 기력은 예전 같지 않다. 이제 자신이 이 동네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면서 미소를 띠는 할머니의 얼굴에서 지나간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같이 동네를 이루던 사람들이 다 가고 홀로 남은 할머니의 발이 오래된 나무같이 딱딱하게 굳어있다. 아이는 "할머니 발 이상해"라는 소리를 해 어른들을 무안하게 한다. 할머니는 "할머니 발 이상하제?" 하면서 크게 웃는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가보다. 증손자가 예쁜지 연신 얼굴을 쓰다듬어 준다. 할머니의 거칠은 손이 아이의 보드라운 피부를 쓸어주는 걸 보고 있으니 인간의 일생이 찰나 같이 느껴진다.
나는 시골에 온 이유를 말했다. 같이 살던 고양이가 죽어서 화장한 유골을 묻어주러 왔다고 말이다.
"무슨 괭이도 화장을 한다냐?"
90의 할머니께 나는 본의 아니게 또 신세계를 알려주는 전달자가 되었다. 반려동물의 위상이 이처럼 높아진 것은 그녀에게 적잖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할머니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생각한 반응과 사뭇 달랐다.
"서운하드냐?"
네. 사무치게 서운했다. 정확히 할머니 말이 맞다. 90이 된 어른에게는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현명함이 있나 보다. 나는 내 고양이가 무지개별로 간 것이 서운했다. 쪼깐이가 애틋하고 아깝다. 삼냥이 중 유난히 나를 따르고 고양이 주제에 사람처럼 말을 많이 하던 아이. 울음소리가 좀 양처럼 애처로워 우습게 들리는 아이. 큰 덩치에 무서운 것이 많고 소심한 쪼깐이가 세상이 없는 것이 아깝고 서운하다.
태풍이 오려는 듯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바람이 등을 떠밀면 발이 휘청일 정도의 센 자람이 불었다. 아이는 처음 맞아보는 산 아래 강한 바람에 설레기까지 했나 보다. 나도 아이였을 적엔 비 없는 태풍이 불면 산 아랫 길에서 바람을 맞으며 놀았던 기억이 있다. 세상 걱정을 다 짊어진 요즘은 태풍 소식이 달갑지만은 않다.
아이에게 시골은 훌륭한 자연 교본이다. 동요 속에서 '달팽이 집을 그립시다'라는 말에 상상으로만 달팽이를 생각하던 아이가 살아있는 달팽이를 만져볼 수 있다. 달팽이가 진짜로 있었구나 하는 표정이 우스우면서도 귀엽다. 나의 보잘것없는 보편적인 지식이 (예를 들면 달팽이를 달팽이라고 알려주는 것) 아이에겐 놀라운 사실이 되는 것이 즐겁다. 아이는 진지한 자연학자처럼 달팽이의 기관을 관찰하며 움직임을 확인하기도 한다. 인내심은 그리 길지 않지만 말이다. 우리는 그 뒤로도 매일 방아깨비, 죽어서 떨어진 매미, 토마토 열린 것, 옥수수 대에 숨은 옥수수 같은 것 들을 보며 놀았다. 그리고 곧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아빠는 창고에서 삽을 꺼내와 마당 한 구석으로 가 작은 구덩이를 팠다. 나의 쪼깐이는 어디 간걸까? 이제 못 본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세상 어디에서 살고 있을 것 같다. 그래. 우리 집에서 태어나 평생을 집 고양이로 살다 간 쪼깐이가 이제 소풍을 가려나 보다. 두려운 것 없이 아픔도 없이 세상에서 자유롭게 놀다가 다시 우리 집, 우리 고양이로 와줄래? 너에게 최고로 좋은 주인은 아니었지만 다음에도 그러진 못하겠지만 다시 만난다면 더 많이 사랑해줄게.
초록보에 쌓인 쪼깐이의 유골은 이제 초록 이불을 덮는다. 마당 한 켠에 쪼깐이를 묻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