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넘어지면 일으켜줄 사람이 있을까
늦은 점심을 먹고 2시쯤 집을 나섰다. 다리의 통증이 없어진 것 같아, 걸어서 피아노연습실까지 가기로 했다. 마스크를 쓰고 사람들에 부대끼며 전철을 타기 보다는 차라리 35분을 걷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고속터미널의 횡단보도를 건너 메리어트호텔을 지나 육교를 건넜다. 그리고 미도 2차 아파트로 계단을 올라가서 다시 미도 1차 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아크로비스타 맞은 편 가정법원 옆 길로 올라가 교대역쪽으로 내려간다.
언덕길이 오르막에서 내리막으로 바뀔 때 앞에 한 사람이 걸어가고 있었다. 뒤에서 볼 때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안되었다. 단, 키가 163cm정도 돼 보이고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다. 군인 작업모처럼 생긴 납작한 모자를 쓰고 배낭을 메고 있었는데, 걸음걸이가 좀 이상했다. 뒤뚱거리는 걸음이었다. 고관절이 유연하지 않을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걸음걸이였다. 자세히 보니 다리가 O자 형으로 약간 휘어있었다. 그리고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언뜻 봐도 근육이나 살이 없는 젓가락처럼 가는 다리였다. 그는 필요이상으로 빨리 걸으려고 했는데, 결국 내리막길에서 가속도가 붙은 몸을 다리가 못따라가 앞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너무 세게 엎어졌기 때문에 그는 엎어지고 나서 한동안 그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엎어질때 머리에도 충격이 온 것 같았다.
나는 얼른 달려가 말했다. "괜찮으세요? 일으켜 드릴까요?'
그는 힘없이 "예" 라고 말했다. 그때까지도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었다.
몸무게가 어찌나 가벼운지 배낭까지 멘 그를 쉽게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그의 왼쪽 약지가 심하게 찢어져 있었다. 뼈가 들여다 보였다. 이제부터 몇초 안에 피가 많이 나올 상태였다. 순간적으로 119를 부를까 하다가 일단, 약국을 찾아 응급처치를 하는 게 순서라고 생각했다.
그는 부축해 교대역쪽으로 내려갔다.
"가족에게 연락해야 할 것 같은데요."
"..."
"어디 사세요?"
"서초소방서 근처, 반포운동장옆에 살아요."
그때 비로소 그가 여자임을 알았다. 나이는 70대 정도로 보였다.
그녀의 말에는 경상도 사투리가 약간 섞여있었다.
손가락에 피가 점점 차 올라오더니 길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내 호카 운동화 위에도 한방울 떨어졌다.
백미터 정도 내려가니 작은 약국이 보였다.
"길에서 넘어져서 다치셨는데, 응급처치좀 해주세요. 손가락이 찢어졌는데, 뼈가 보일 정도네요."
여자 약사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친 여자를 바라보았다.
"보호자세요?" 약사가 나에게 물었다.
"아니오, 뒤에서 걸어가던 사람이에요."
약사는 소독약을 손가락에 붓고 밴드로 감쌌다.
"이건 임시조치고, 병원에 가보셔야 할 거에요."
"이 근처에 병원이 있나요?"
"길 건너에 정형외과가 있어요."
그 와중에 다친 여자에게 전화가 왔다.
여자는 교대역 근처 산부인과에 가는 길이었다. 아마 예약시간에 많이 늦었던 모양이다. 병원에서는 여자가 오지 않자 전화를 건 것이다. 내가 전화를 넘겨받아 상황을 설명하고, 산부인과에서 상처부위 치료가 가능한지 물었다. 거기에서는 치료할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다친 여자는 약값을 내려고 배낭을 뒤적였으나, 시간이 너무 걸려 내가 카드로 계산했다. 그리고, 약사에게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에요. 제가 더 감사하죠." 다친 여자를 치료받게 해줘서 자기가 나에게 감사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여자를 데리고 나오면서 생각했다. "왜 나에게 감사하지?
나에게 감사할 일인가? 그건 무슨 어법이지?"
다친 여자는 나에게 "바쁘신데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나의 사정을 생각해주는 것을 보니, 여자가 정신은 멀쩡하며 몸이 약할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정형외과까지 가는 동안 배낭을 내가 들었다. 배낭이 가볍지 않았다. 여자에게는 많이 무거웠을 것이다. 힘없는 여자가 무거운 배낭을 메고 빨리 걷다가 사고가 난 것이다. 나는 오른손으로 여자의 왼쪽 팔 윗쪽을 잡고 걸었다. 여자는 몇번이나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려 내가 힘을 많이 써야 했다.
정형외과에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치료를 부탁했다. 그런데, 여자는 신분증을 집에 놓고 왔다는 것이다. 배낭에서 신분증을 찾는 과정에서 여자의 신용카드가 두개나 보였다. 내가 병원비를 지불하지는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신분증 문제는 다행히, 친절한 병원 여직원이 해결했다. 여자의 핸드폰으로 건강보험증을 발급받은 것이다.
병원에서도 역시 나에게 보호자냐고 물었으나, 나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가족에게 전화하세요," 내가 여자에게 말했다.
"... 멀리 있어요." 여자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대답했다. 외국에 있다는 말로 들렸다.
한편, 상황을 파악한 다른 여자 대기 환자와 병원 직원이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여자를 도와줘서 고맙다는 것이다. 나는 다시 생각했다. 왜 나에게 고맙다고 하지?
내가 가려고 하니, 여자가 일어서서 나를 따라오며 연락처를 물었다. 나는 황급히 여자를 의자에 도로 앉혔다.
"괜찮습니다. 잘 걷지도 못하시는 분이 일어서시면 안되죠. 치료 잘 받고 가세요."
그리고 병원 직원들에게 말했다.
"잘 부탁합니다."
병원을 나오는데, 갑자기 슬픈 감정이 밀려왔다. 사람들은 힘없이 다친 여자를 동정하고, 그녀를 도와준 나에게 고맙다고 하지만, 거기까지다. 결국 여자는 혼자 남는다. 왜 혼자인가? 가족이 멀리 있다니. 비상시에 나를 구하러 와줄 가족이 멀리 있다니. 늙어서 나를 돌봐줄 가족이, 옆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얼마나 큰 차이인가. 더구나 인생의 황혼기에. 여자가 진료기록에 적은 생년월일을 보면, 여자는 만 77세밖에 되지 않았다. 이 시대에 그 나이는 그렇게 많은 나이가 아니다. 아직, 팔팔하게 걸어다닐 나이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보니 몸은 급격히 약해졌고, 가족은 옆에 없다. 어쩌다 혼자 살게 되었을까. 그녀도 젊었을 때에는 누군가의 귀한 딸이었고, 누군가의 연인이었을 것이다.
전철을 타면 많은 사람들을 본다. 남루한 옷차림에 무표정한 노인들도 있고, 큰 소리로 고객과 통화하는 변호사들도 있고, 약한 사람들을 밀치며 활기차게 다니는 체격좋은 청년들도 있다. 그들중에는 물론 행복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언뜻 봐도 결코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피곤해서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아주머니'들도 있고, 건드리면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의 젊은이들도 있다. 누구나 다 사연이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결코 알지 못할 깊은 사연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