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도 피아노처럼 렛슨을 받아야 한다
피아노를 배우면서 가끔 피아노가 인생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정말 신기한 일이다.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피아노에서 인생을 배울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누가 그런 소리를 했다면 그냥 웃어넘겼을 것이다. 곽샘의 레슨을 받으며, 때로는 내가 피아노 레슨을 받고 있는지 아니면 인생 레슨을 받고 있는 지 헷갈린다.
때로는 내가 나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내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지, 그것이 내가 의도한 나의 모습과 들어맞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때로는 나의 말과 행동을 객관적으로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하루 정도는 나의 말과 행동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돌아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마치 피아노 연주를 녹음한 뒤 다시 들어보는 것과 같다. 피아노는 “깊이 있게”치면서 소리가 “겉돌지 않게” 해야 한다. 나의 말과 행동도 마찬가지다. 내가 부지불식간에 "깊이 있는“ 말을 하지 못하고 ”겉도는“ 얘기만 했다면, 그것을 다시 반추해보며 나의 부족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피아노 연주에서 왼손은 기본적인 화음을 눌러주는 역할을 주로 하지만 깊이 눌러주지 않으면 연주의 깊이가 없어진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인 일들을 소홀히 한다면 인생의 깊이가 없어질 것이다. 기본적인 일들이란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상황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다. 가족과의 관계, 직장 동료와의 관계다. 가족들과 또는 매일 만나는 동료들과 겉도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인생의 깊이를 도모하기는 어렵다.
오른손은 본격적인 멜로디 연주를 맡는다. 왼손으로 아무리 기본적인 화음을 잘쳐도 오른손이 멜로디를 거칠게 친다면 좋은 연주가 되지 못한다. 오른 손이 분위기를 유지하지 못하고 갑자기 음을 강하게 때리거나 성의 없이 건반을 건드린다면 듣기 좋은 음악이 될 수 없다. 그 날의 일을 멜로디라고 생각해보자. 내가 맡은 일을 하면서 취재원이나 부하 직원들에게 거칠게 대한 일은 없었는지 생각해본다. ”갑자기 소리가 커지면“ 안된다. 목소리와 행동의 강약 조절을 하라. 나의 말과 행동이 듣기 좋은 음악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느껴질 수 있다면 최선이다. 하루를 마감하면서 나의 말과 행동을 한번쯤 반추해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일부러 그런 시간을 갖지 않아도 혼자서 산책을 하거나 명상을 할 때 저절로 그날의 일들이 다시 생각나는 경우가 많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느껴보면 내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거나 과격한 행동을 한 것에 대해 많은 반성을 할 수가 있다.
인생은 일종의 연주다. 그 연주를 듣기 좋은 음악으로 만들어갈 지 아니면 불협화음과 갑작스런 돌출음이 난무하는 소음으로 만들어갈 지는 나의 노력에 달렸다. 때로는 들릴 듯 말 듯 조용하게, 때로는 열정을 담아 폭풍이 휘몰아치듯 강렬하게, 건반을 두드린다. 그런 음들이 서로 조화를 이뤄야 한다. 그래서 하나의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
곽샘은 내가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고 있다. 내가 나름대로 듣기좋게 건반을 누를 때에도 여지없는 지적이 들어온다.
“끝 부분이 소리가 너무 크잖아요? 마치 사라지듯이, 이렇게 들릴 듯 말 듯 하게 쳐보세요.”
“이 부분은 소리가 좀 더 커도 괜찮아요. 조금만 더 강하게 눌러주세요.”
“거봐요. 그렇게 하니까 더 듣기 좋잖아요?”
피아노를 배우며 가장 좌절하게 되는 순간이다. 왜 나는 그런 소리의 불필요한 강함과 약함을 인식하지 못하는데 곽샘은 알아채는 것일까. 어느 부분에서 어느 만큼의 강약을 줘야 그 곡을 아름답게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을 언제나 알게 될까.
“오늘은 페달 밟지 말고 쳐보세요. 페달을 밟으면 자기 소리를 못 들어요.” 곽샘이 말했다. 페달을 밟으면 음이 오래 울린다. 계속 밟고 있으면 소리가 지저분해진다. 쇼팽은 페달을 사용한 연주를 매우 중시했지만, 페달을 너무 자주 사용하는 연주자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쇼팽은 동시대의 피아니스트였던 지지스문트 탈베르크에 대해 “피아노를 손이 아니라 페달로 친다”고 비판했다.(제러미 니콜러스의 `쇼팽, 그 삶과 음악‘ 중에서)
아무튼 나는 내 연주에서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 수 없었다.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고수와 하수의 차이인 것이다. 고수가 지적하는 결점을 나는 알아채지 못하는 상황, 피아노를 배울 때 가장 절망하게 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곽샘이 시키는 대로 했다.
“왼손을 깊이 눌러주세요. 소리가 겉돌아요.” 얼마후 곽샘이 다시 말했다. 페달을 밟으며 왼손을 깊이 눌러주면 소리가 지저분해졌다. 그래서 왼손을 살짝 눌러주었는데, 그것이 잘못이었던 것이다. 깊이 눌러주면서도 소리의 강약을 조절할 수 있는 감각이 필요했다. 곽샘이 페달을 밟지말고 왼손을 깊이 눌러주며 연습을 시킨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사흘간 하루에 한 시간씩 페달 없이 로망스를 연습했다.
“이 부분은 시작 부분이니 약하게 치세요. 이 부분은 가장 높이 올라가는 부분이니까 소리가 커야 해요.” 곽샘이 말했다.
“소리가 여기서 갑자기 커지면 안돼요. 직전의 음과 맞춰서 강약 조절을 하세요.”
곽샘의 지적은 끝이 없다. 지적하는 것이 그녀의 일이다. 나로서도 돈을 내고 렛슨을 받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지적을 받기 위해. 그리고 지적받은 부분을 개선하기 위해 렛슨을 받는다. 인생도 그렇게 렛슨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불행히도 인생에 대해 렛슨해주는 선생님은 찾기가 어렵다. 또 자신이 그런 렛슨을 받을 자세가 안돼 있는 경우도 많다.
나는 기타를 혼자 책을 보고 배웠다. 한때는 라디오 음악을 녹음해서 채보한 뒤 나름대로 코드를 붙여서 기타를 치기도 했다. 그렇게 친 곡이 바로 박두호라는 잊혀진 가수의 ‘아이야’라는 노래다. 김태곤이 나중에 편곡해서 `아야 우지마라‘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 편곡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곡이 좋았다. 그 반주는 독특한 주법이었다. 보통 4분의4박자, 슬로 고고 리듬의 곡은 많이 사용하는 아르페지오(펼친 화음)로 기타줄을 뜯는다. 8분 음표를 8개로 나눠 그 길이대로 여덟 번 기타 줄을 튕기면 한마디가 지나간다. 그런데 `아이야‘의 반주는 첫 번째음을 칠 때 그냥 튕기지 않고 음을 끌어올린다. 예를 들어 `미’라는 음을 치는데 4번줄 개방현 `레‘를 친 뒤 두 번째 프랫을 눌러주면 음이 끌려 `미’로 올라간다. 그리고 중간에는 한마디의 두 번째 음을 좀 길게 끌면서 카사노바 리듬 비슷하게 치는 곳도 있다. 나는 녹음을 수백 번 들어가며 그 주법을 혼자 따라 배우느라 고생했다. 스무 살 청춘이니 그렇게 열정을 갖고 고생을 했지, 지금 같으면 벌써 몇 분도 안 돼 포기했을 것이다. 그렇게 혼자 배운 기타 실력은 지금도 그렇게 내세울만한 수준이 못된다. 그저 노래 반주하는 수준이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악기는 돈 내고 배워라.‘ 어떤 분야든 고수가 있다. 그 분야에서 다른 고수에게 배우고, 또 배운 것을 익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배우면 그들이 과거 했던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다. 그들은 지름길을 일러준다. 그리고 나의 노력과 재능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내려준다. 나의 연주에 대해 일반인들은 해주기 어려운 전문적인 평가를 해준다. 내가 월 수강료를 내고 배우려는 자세만 돼 있으면, 그리고 내가 아주 절망적인 음치만 아니라면, 어느정도 수준까지는 악기를 다룰 수 있도록 해준다. 대신 나는 그의 전문성을 전적으로 인정해야 하고, 겸손한 자세로 배우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 부분은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배우려면 그의 전문성을 존중하고, 겸손하게 배우려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예컨대 내가 초보 기자라고 치자. 선배가 내 글을 고쳤다. 나는 선택해야 한다. 그 선배의 글을 배울지 아니면 나의 글을 고집할지. 나는 선배가 어떤 부분을 왜 고쳤는지를 물어본다. 대부분의 경우 그냥 고친 글을 읽어보면 왜 고쳤는지 안다. 그러면 나는 원래 내가 쓴 글과 선배가 고친 글을 비교한다. 선배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본다. 그리고는 깨닫는다.
“아, 이 부분은 좀 더 간단명료한 표현으로 고쳤네. 아, 이 부분은 중언부언이라서 삭제했네.”
그러나, 나의 글이 완벽한데 선배가 고쳐서 글이 엉망이 됐다고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다. 물론 나의 글이 완벽한데 선배가 고쳐서 글이 더 나빠졌을 수도 있다. 그러면 나는 왜 선배가 그 부분을 고치려 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의 관점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관점에 일리가 있다면 나는 다른 식의 글로 그의 관점에 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다른 사람이 얘기할 때 주의 깊게 듣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듣는 목적은 오로지 그의 논리를 반박할 근거를 찾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얘기할 때 이들은 이 말을 어떻게 반박할 지만을 궁리한다. 그들은 대화를 엉망으로 만들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나쁜 이미지를 심어준다. 물론 치열한 논쟁을 벌여야 할 때가 있기는 하다. 대통령 후보 토론회같은 것이 그런 자리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서도 다른 후보의 얘기를 주의 깊게 듣고, 때로 “일리가 있다”거나 “한번 검토해볼 가치가 있는 것 같다”는 반응을 보인다면 그 후보의 이미지는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정말 그가 상대 후보로부터 배우는 점도 있을 것이다.
피아노 레슨에서도 전적으로 배우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나는 곽샘이 지적할 때마다 그것을 악보위에 메모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금방 잊어먹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부분은 “레가토가 중요”하다거나 다른 부분에서는 “세게 치지 말 것” 등의 코멘트를 적어둔다. 그리고 연습을 시작할 때마다 그 코멘트를 다시 세세히 읽어봤다. 그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사람들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최소한 나는 진지한 배움의 자세를 견지했다고 생각한다. 누가 나에게 무엇인가 가르치려할 때 일단은 귀담아 듣는 것이 중요하다.
로망스의 엔딩(ending: 끝 마무리)은 고민이었다. 내가 첫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악보의 엔딩은 딱 다섯음이었다. 내가 산 CD 속에 있는 구라모토의 연주도 다섯음으로 끝났다. 그러나 구라모토의 연주회 동영상을 보니, 열한개의 음을 연속으로 쳐서 끝내고 있었다. 두 번째 선생님에게 물어보고 같은 식으로 쳐봤다. 그 음은 거의 3옥타브까지 걸쳐 펼친 화음으로 끝냈다. 그런데 곽샘은 두 옥타브까지만 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렇게 치세요. 절대 느려지지 말고, 마지막에서 다섯 번째 음부터 느리게 치세요. 그리고 마지막 세 음을 치기 전에 약간 뜸을 들이세요. 이렇게, 따다다다 따다 다 다.. 다 라 라. 마지막 세 음은 매우 여리게 치세요.”
나는 혼자 그 엔딩을 연습했다. 그리고는 로망스를 처음부터 다시 쳐보았다. 곽샘은 밖에서 듣고 있었다. 엔딩까지 쳤을 때 뭔가 옛날과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 조금 더 잘쳤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가면서 곽샘에게 물었다.
“어땠어요? 지금 친 로망스.”
“아주 좋았어요.”
“그런데 와이프가 자꾸 아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내 소리가 아들보다 못하다고 하던데... 어떻게 해야 할지.”
“지금 치신대로 한번 부인 앞에서 쳐주세요.”
“그래요? 그러면 평가가 달라질까요?”
“그럴 거예요.”
한 곡을 기껏 잘 쳐놓고 나서 엔딩을 형편없이 해버린다면 전 곡을 망치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음악만 그런 것이 아니다. 매사가 그렇다. 해설 기사나 시론을 일껏 잘 써놓고 끝맺음을 성의 없이 한다면 그 글은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몇 년간 조심스러운 관계를 유지하다가 기약 없이 헤어질 때가 있다. 연인 얘기일수도 있고, 그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 얘기일 수도 있다. 그런데, 헤어질 때 자기 마음을 담은 선물이라도 준다면, 그러면서 그동안 그 사람에 대해 어떤 점에서 감사를 한다고 말을 해준다면, 그 사람은 나와의 관계를 오래도록 즐겁게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그저 “어쩌다 어디어디로 가게됐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고 형식적으로 간단히 말한 뒤 헤어진다면 글쎄... 그 관계는 어떤 의미였을까. 나중에 그 사람이나 자신이나 서로의 관계에 대해 회의감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