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 포기

by 비마



인생에서 포기한다는 말처럼 허무한 말은 없다. 공부도 그렇고, 연애도 그렇고, 취직도 그렇고, 피아노도 그렇고, 마라톤도 그렇다.


나는 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다. 그저 소설책에 탐닉했다. 소설 속의 일들이 너무 재미있어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내가 세칭 일류대학에 진학하기를 바라셨다. 자식이 얼마나 공부를 못하는지도 모른 채 “서울법대에 가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담임선생님께 차마 서울대 원서를 써달라고 얘기하지 못했다. 고려대 국문과 원서를 써달라고 했다.

“야, 너 내가 나온 대학이라고 우습게 보는거냐?” 고려대 국문과 출신인 선생님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예? 아뇨 그런게 아니라.. 그저 한번 시험이나 볼라구요.”

“떨어져도 나 원망하지 마라.” 선생님이 원서에 싸인을 하며 말했다.

“예.”


결과는 뻔했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노력을 하지 않고 좋은 결과를 바라는 사람은 사실상 도둑놈이라는 것을. 지금은 그것이 나의 소신이다. 합당한 노력을 하고 그 결과를 기대하라. 재수하면서도 나는 공부에 몰입하는 대신 기타를 치고, 소설책만 읽었다. 그때는 예비고사라는 것이 있었다. 예비고사에 합격해야만 대학별 본고사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 재수하면서 예비고사에는 간신히 붙은 뒤, 이번에는 경희대 국문과에 지원했다.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삼수를 했다. 역시 나의 생활 패턴은 변하지 않았다. 내방의 재떨이에는 청자 담배만 수북이 쌓였다. 낮에는 학원을 다녔고, 밤에는 소설책만 읽었다. 학원을 안가는 날이면 기타를 치거나 친구들과 놀러다녔다. 소설책을 읽는 대신, 대학입시 참고서를 그렇게 읽었다면 분명히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세월을 보낸 나는 삼수 후에 예비고사마저 떨어졌다. 그후에는 자포자기였다. 집에서도 더 이상 학원비를 대줄 형편이 안 되었다.


사수를 하고 다시 예비고사를 치를 계절이 되자 이번에는 군대 징집영장이 나왔다. 도대체 내 인생에 무엇이 잘못됐는지도 깨닫지 못한채, 머리를 박박 깎고 논산훈련소에 가는 열차를 탔다. 훈련소에서의 첫날은 일생일대의 충격이었다. 내가 전혀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든지 조교들이 시키는대로 해야 하며,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야 하고, 정해진 시간에 잠들어야 했으며, 잠을 자다가도 순서가 되면 일어나 내무반의 불침번을 한시간씩 서야 했다. 그리고 젓가락 같은 지급받은 물품들을 누가 훔쳐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정해진 틀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면 각목으로 속칭 `빠따‘를 맞거나 `원산폭격(엎드려 뻗쳐 자세에서 머리를 바닥에 박고 뒷짐을 지는 자세)’같은 얼차려 기합을 받았다. 그렇게 삼일이 지났다. 앞으로 3년을 그렇게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탈영‘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누군가 탈영을 시도하다 붙잡혀 영창에 갔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암울했다. 그때 한 내무반에서 기타를 치는 병장이 있었다. 나는 그가 기타치는 모습을 지켜봤다. 집에서 부모님의 보호를 받으며 기타를 튕기던 편안한 시절이 생각났다.

“어이, 훈련병, 내가 제대 얼마나 남은 것 같냐?” 그 병장이 기타를 치다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가 제대가 임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 삼개월 남으신 것 같습니다.” 나는 나의 제대가 삼개월 남았으면 참을 만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대답했다.

“하하, 야 지금 내가 삼개월이나 더 군대생활 해야된다면 자살하겠다, 임마.”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 삼일 남았다.” 그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군대생활 삼일밖에 안된 나에게 그는 삼일 뒤면 제대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때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은 바로 그 병장이었다. 나에게도 과연 그날이 올 것인가. 앞으로 삼년동안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다. 나는 철원 지역에서 헌병으로 군대생활을 했다. 10.26, 12.12, 5.18 같은 현대사의 큰 사건들을 군대에서 귀동냥으로 들었다. 그리고 1980년9월 제대할 때까지 거의 일 년간을 비상계엄하에서 지내야 했다. 그 기간에 총기탈영병과 총격전을 벌인 일도 있고, 또다른 총기탈영병을 체포한 적도 있다. 사람의 목숨이라는 것이 한순간에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지켜봤다. 군대 삼년은 나를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세상사를 아무것도 모르던 백면서생이 비로소 세상일에 눈을 뜨게됐다. 왜 그들은 탈영할 수밖에 없었나. 왜 누구는 편안하게 사무실에 앉아서 훈련도 안받으며 교련혜택 6개월까지 받아 27개월이면 제대하는데, 왜 나는 삼십삼개월을 순찰 돌며, 훈련받으며, 총기 탈영병과 총격전까지 벌이며 보내야 하나. 나는 대학을 다니지 못했고, 세상 일도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어찌보면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은 것이다. 군대에서의 삼십삼개월은 나에게 삼십삼년이었다.


제대가 가까워 오자 입대 동기가 나에게 물었다.

“제대하면 뭐 할거냐?”

“응? 공부해서 대학 갈려고 해.”

“뭐, 대학?” 그는 코웃음을 쳤다.

“네가 대학을 가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그는 자신있게, 그러나 다소 경망스럽게, 말했다.

나는 왜 다시 공부해서 대학을 가려고 결심했을까. 물론 사회에서 학벌로 인한 차별을 받지 않고, 나 자신의 소양이나 능력을 높여보자는 생각도 크게 작용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대학입시 공부를 해보자고 다짐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내 인생을 `의미있게 연결(레가토)’해보자는 생각이었다. 대학을 가지 않으면 앞으로 내 인생 행로에 많은 어려움이 닥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대학을 향한 도전을 `중도 포기‘하기 보다는 반드시 성취해보자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찼다. 중도 포기. 젊은 패기에 그 말은 듣기 싫었다. 한 번 시작한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힘든 군대생활도 결국 삼십삼개월간 중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지 않았는가.


제대한 날 집에서 잠을 실컷 잤다. 그리고 다음날 고려대에 다니던 여동생에게 `성문종합영어‘와 `수학의 정석’을 서점에서 사다 달라고 했다. 내가 직접 사러 가기가 창피했던 것이다. 나이가 들었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그 다음날부터 아침 6시에 일어나 하루에 12시간씩 책을 파기 시작했다. 아침 8시부터 12시까지 성문 영어, 점심 먹고 1시부터 5시까지 수학 정석, 저녁 먹고 6시부터 10시까지 다시 성문 영어. 한 달 만에 성문 영어를 한 번 독파했다. 독파란 모르는 단어를 다 외우고, 문제를 풀어가며 그 책의 모든 부분을 빠짐없이 살펴봤다는 얘기다. 문법규칙중 이해가 안되는 것은 무조건 외웠다. 그리고 한달간 그 책을 가르쳐주는 학원에 다니면서 두 번째로 독파하고, 그 다음달에는 다시 혼자서 3독, 그 다음달에는 4독을 했다.


그리고 2월달에 종로학원 입학시험이 있었다. 그 시험도 제법 어려운 시험이었으나, 합격했다. 그리고는 3월부터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지금도 기억한다. 이른 아침 서울역에서 내려 중림동으로 걸어갈 때 왼쪽에 늘어선 구두방들에서 나던 심한 가죽냄새를. 아침은 학원 매점에서 산 기름투성이 김밥을 옥상에서 혼자 씹어먹으며 때웠다. 제대후부터 대학입학 학력고사까지의 15개월은 그때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밀도있게 한가지 목적을 위해 노력한 기간이었다. 그리고 그 기간 나는 호랑이 등에 타고 있었다. 내리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악착같이 호랑이 목을 감싸안고 떨어지지 않게 애썼다. 그리고 학력고사가 끝났을 때 비로소 나는 호랑이 등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학력고사가 끝난 뒤 시험장에서 나올 때 허탈감에 울고 싶었다. 그런데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대학 진학에 성공했다. 대학 진학을 위한 공부를 중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싶다. 내가 제대할 때 주위 사람들은 말했다. “이제는 머리가 굳어서 공부가 되겠어?” “이제 무슨 공부야? 돈이나 벌어.”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았다. 그러나 나는 하던 일에 끝을 보지 못하고 중도 포기한다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제대로 해보고 싶었고, 제대로 했는데도 안되면 그때는 포기하자고 생각했다. 군대에서 “하면 된다” “안되면 되게하라”는 등의 구호가 있었다. 정말 우악스럽게 적극적인 마음가짐을 요구하는 구호였다. 나는 그 구호에 동감했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구호는 나의 경우에 맞아 떨어졌다. 그리고 대학 입학후 나는 일단 목표를 세우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행정고시, 사법고시, 외무고시이던 아니면 언론고시이던 간에 말이다. 왠지 공무원은 재미가 없을 것 같았고, 언론인은 글을 쓰는 직업이었기에 기자 시험을 봤다. 글을 쓰는 일이 아니라면 나에게 별 의미가 없었다.


중도포기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 중도 포기하는 일도 있기는 하다. 어렵다는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성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사람들, 그렇게 이뤄질 가능성이 작은, 또는 자신의 의지대로 될 수 없는 그런 일들을 이루겠다는 목표를 세운 사람들은 때로는 중도 포기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세상에 모든 일들이 다 중도 포기하면 안되는 일은 아니다. 그중에는 진작에 중도 포기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되는 일들도 있다. 마라톤도 마찬가지다. 나는 정말 무릎 부상을 당하고도 어리석게 달리다가 결국 대회를 중도 포기한 적이 한 번 있다.


어리석은 자는 앞만 보고 달리며, 휴식을 모른다. 일주일에 7일을 달리면 몸이 쉴 시간이 없다.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몸에 휴식을 줘야 한다. 무조건 많이 달린다고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몸 상태가 받쳐주지 않는 상태에서 연습만 많이 한다면 부상을 피할 길이 없다. 첫 풀코스인 하이서울마라톤을 완주한 지 2주일만에 다시 혼자 연습삼아 43킬로를 뛰었다. 그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이었는지는 나중에 알게됐다. 하이서울마라톤을 뛴 지 불과 한달 만에 다시 중앙서울마라톤을 뛰기로 하고, 그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한강변에서 연습 삼아 혼자 풀코스보다 약간 긴 거리를 달린 것이다. 천천히 뛰어 5시간10분이 걸렸다. 그러나 그때 무릎에 이상이 온 것을 알았어야 했다. 그때 빨리 병원에만 갔었어도 `중도 포기‘라는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련하게도 조금 쉬면 괜찮겠지 하고 3주일간 쉰 뒤 중앙서울마라톤에 출전한 것이다. 그래도 왼쪽 무릎이 완전치 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초반 페이스를 늦췄다. 1킬로에 7분 정도의 속도였다.


차도를 뛰는 코스였기 때문에 주최측에서는 뒤에 처진 참가자들에게 계속 빨리 뛰라고 독촉을 해댔다. 주최 측은 아반테 승용차에 확성기를 달고 후미에 처진 사람들을 따라왔다. 처음에는 "하위차선으로 뛰세요"였다. 교통통제를 풀어야 하니 한 차선만 이용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래도 이해가 됐다. 그러나 그 뒤에는 "교통통제를 풀어야 하니 빨리 뛰세요"였다. 20킬로 정도가 지나자 이제는 "11시에 25킬로 지점에서 교통통제가 풀린다"고 고압적으로 협박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차 안에 타고 잔소리를 해대는 그 젊은 친구에게 항의를 했다. 그래도 그는 지지 않고 눈을 부라리며 "빨리 뛰면 될 것 아니냐"는 식으로 맞받아쳤다. 25킬로 지점부터 그는 "이 차보다 늦게 가는 사람은 인도로 뛰세요" "걸어가시는 분은 회수차에 탑승하세요" "교통통제가 풀리니 회수차에 타세요" 라고 긁어댔다.


다시 나의 페이스 얘기로 돌아가서... 문제가 생긴 곳은 왼쪽 무릎이었다. 그렇게 혹사했는데도 오른쪽 무릎은 멀쩡했다. 오른쪽 무릎은 그런대로 주인의 혹사에 적응한 것 같았다. 왼쪽 무릎 바깥쪽이 10킬로 지점부터 따끔따끔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부위의 명칭은 장경인대였다. 그렇게 계속 뛰면 금방 걷잡을 수 없이 통증이 심해질 것 같았는데도 한참 뛰다보면 통증이 없어지기도 했다. 인체란 참 오묘한 것이라고 감탄했다. 그렇게 문제가 있는데도 나름대로 상황에 적응하는 것이다. 15킬로가 지나자 배가 고프고 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하이서울마라톤에서 아침을 많이 먹어 고생했기 때문에 이날은 간단히 식사를 했다. 그것이 또 문제였다. 주최측이 보낸 대회 안내문에 20킬로 지점에 `연양갱'이 있다고 돼 있었기 때문에 아픈 다리를 이끌고 열심히 뛰었다. 머릿속에서는 계속 `연양갱' 생각 뿐이었다. 입에 침이 돌았다. 아침에 종합운동장에서 3개에 5천원주고 산 파워젤을 주머니에서 꺼내 짜서 먹었다. 물과 함께... 그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다시 힘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신기하게도.. 그래도 연양갱은 먹고 싶었다.


중앙마라톤 코스는 예상보다 오르막 내리막 경사가 심했다. 첫 풀코스 대회였던 하이서울 마라톤은 대부분이 한강변이었기 때문에 거의 평탄한 코스였다. 중앙마라톤은 초보 마스터스들에게 별로 좋은 코스는 아니었다. 그러나 서브 쓰리 주자등 고수들에게는 재미가 있을 법한 코스이기도 했다. 간신히 도착한 20킬로 지점에는 연양갱이 없었다. 실망하려는 찰나, 초코파이가 눈에 띄었다. 초코파이와 게토레이를 맛있게 먹으며 "뛰려고 먹는지 먹으려고 뛰는 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왼쪽 무릎을 양손을 한번 비벼준 뒤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미 반환점을 돈 엘리트 선수들이 반대편에서 달려왔다. 케냐 선수들 3명이 나란히 뛰어 지나갔다. 그 뒤로 좀 키가 작은 흑인 선수. 그리고 이봉주가 지나갔다. 케냐선수들은 마치 사슴이 뛰어가는 듯 성큼 성큼 달려갔다. 그렇게 되려면 심폐기능, 지구력, 노폐물 처리 능력, 혈액의 산소운반 능력, 근육의 에너지 저장능력, 근육의 젖산 처리 능력 등 모든 것이 최고로 올라가야 한다.


연양갱은 25킬로 지점에 있었다. 그렇게 맛있는 연양갱은 일생에 처음이었다. 종합운동장을 출발해 올림픽공원-수서 IC-성남시를 돌아오는 이 대회의 코스는 교통통제를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주최측은 시민들의 불만을 고려해 5시간을 넘을 만한 마라토너들을 중도에서 포기시키기로 작정을 한 것 같았다. 절룩거리며 뛰기를 4시간여. 천신만고 끝에 35킬로를 지나 완주를 눈앞에 둔 시점이었다. 바로 그때 수서역 사거리에서 교통통제가 풀려 있고 주최측은 대회 참가자들을 강제로 회수버스에 태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가 막혔다. 주최측의 `행동대원들'을 피해 일부 마라토너들은 차도로 돌진했고, 일부는 지하도로 길을 건넜다. 시계를 보았다. 4시간15분. 그리고 6킬로정도가 남아있는 상태였다. 충분히 5시간에 완주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길을 막다니.


내가 순순히 회수버스에 탑승한 것은 순전히 길을 몰라서였다. 무릎도 좀 아팠고... 역시 회수차에 강제로 태워진 40대 아주머니들이 불평을 해댔다. "아니,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왜 강제로 태우는거야. 내가 지하도로 갈려고 하니까 저 젊은 눔이 내 손목을 꽉잡고 안 놔주는거야. 나쁜 놈들 같으니..."


완주를 못한 기분이 어떤 것인지를 처음 느껴봤다. 씁쓸하고 찝찝하고... 화장실에서 뒷처리를 깨끗이 안하고 나오는 느낌... 그리고 다음 대회에서도 이런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지 생각해봤다. 완주자들과는 다른 곳에서 기념품을 받으면서 굴욕감까지 느꼈다. “다시는 이런 굴욕감을 느끼지 말아야지.” 혼자서 다짐했다. 그 뒤로 지금까지 모두 15차례 완주를 했고, 중도 포기한 대회는 없었다. 정말 완주하기 힘든 대회도 있었으나, 중도 포기가 주는 굴욕감을 다시는 맛보고 싶지 않았다.


다음날 정형외과에 갔다. "무릎 바깥쪽의 힘줄이 뼈와 오랫동안 마찰을 일으켜 염증이 생기고 물이 약간 고였다"고 의사는 말했다. 2주일 정도는 약을 먹으며, 운동을 중단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2주일 동안 운동을 안 한다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도 완전하게 나은 뒤 다시 연습을 해야 더 오랫동안 뛸 수 있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좋지 않다. 연약한 인간의 육체를 갖고 있으면서 마치 철인이라도 되는양 마음껏 근육과 관절을 혹사한다면 그 결과는 뻔하다. 절제의 미덕은 마라톤에도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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