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중

여론에 대한 공포 (Fear of Public Opinion)

by 비마

이사를 갔다. 낡은 아파트라 며칠간 인테리어 공사를 새로 한 뒤 이삿짐을 들여놨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문제는 피아노의 위치였다. 공간의 효율성과 소리의 울림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했다. 내 방에 들여놓을까 생각도 했지만 결국 거실에 놓기로 했다. 방에서는 아무래도 울림이 좋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직사각형의 거실에서 베란다 반대편의 벽에 피아노를 놓았다. 피아노는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 그리고 벽과 얼마나 거리를 두느냐도 중요하다. 이삿짐들이 대충 자리를 잡은 뒤 피아노 소리를 시험해보고 싶어졌다. 아들이 있다면 쳐보라고 했을 것이지만, 마침 집에 없었기 때문에 내가 피아노 뚜껑을 열고 그 앞에 앉았다. 그리고, 외워서 칠 수 있는 곡들을 치기 시작했다. 영화 러브어페어(Love Affair) 주제곡, 미셸 폴라레프의 `누가 할머니를 죽였나‘라는 샹송을 편곡한 이루마의 `When The Love Comes (사랑이 찾아올 때)', 헨델의 사라방드, 유키 구라모토의 로망스, 조지 윈스턴 버전의 캐논변주곡을 쳤다. 연주한 것이 아니라 그냥 쳤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의 실력이었다. 피아노 소리는 잘 울렸던 것 같다. 기분이 좋아졌다. 앞으로도 소리가 잘 울리는 거실에서 피아노를 칠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즐거운 기분이 됐다. 잠시 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50대 아주머니였다.

“옆집에 사는 사람이예요.”

“아, 그러세요? 반갑습니다. 인사도 미처 못 드렸는데,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아녜요. 저희가 잘 부탁드려야죠.”

“여기 전세 오셨어요?”

“아뇨. 샀어요.”

“그러세요. 옆집에서 같이 오래 지내겠네요.” 아주머니는 인사가 끝나고 나서도 약간 뜸을 들였다. 무언가 할 말이 남아있는 듯 했다.

“그런데...”그녀가 말했다.

“지금 피아노를 누가 치셨어요?”

“제가 쳤는데요.”

“어머, 그래요? 잘 치시네요.” 나는 그녀가 의례적인 칭찬을 했다고 지금도 백퍼센트 확신한다. 그때의 내 실력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요? 감사합니다. 시끄러웠을 텐데.”

“아녜요, 좋았어요. 사실은 우리 딸도 피아노를 치거든요. 그래서 피아노에 관심이 많아요.”

“따님이 지금 몇 살인데요?”

“대학 졸업반요. 서울대 피아노과예요.”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동시에 등에서 소름이 돋았다.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요? 아, 그럼 앞으로 피아노 치지 말아야겠네요. 피아니스트가 옆집에 있는데 초보자가 계속 치면 얼마나 시끄러울까.”

“그런 말씀 마세요. 우리 아이도 계속 집에서 연습하는걸요. 좌우간 반갑습니다.”


현관문을 닫으며, 내가 아닌 아들이 피아노를 쳤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의 피아노 건반 터치는 정말 섬세했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아무튼 그때부터 집에서 피아노 연습을 할 때마다 옆집의 청중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청중을 의식해서 잘 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피아노가 금방 잘 쳐지는 것은 아니다. 장기간 레슨을 받으며 피나는 노력을 해야 겨우 한 곡을 제대로 칠까 말까 하다. 어떤 분야든 마찬가지다. 피나는 노력 없이 이뤄지는 것은 없다.


몇 년 전 회사의 야유회. 1박2일로 가는 야유회 장소에 피아노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열심히 연습한 뒤 야유회에서 회사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용감하게 연주했다. `러브어페어‘와 `로망스’를. 내가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킬만한 연주 실력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연주했을까. 그것은 청중 앞에서 연주를 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도 생각했기 때문이다. 난생 처음으로 많은 눈이 지켜보고 귀가 듣는 가운데 연주를 하면 손이 떨린다. 머릿속은 하얗게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그저 운동신경으로 기계적으로 친다. 실수만 하지 말아달라고 속으로 자신에게 빈다. 틀리면 무슨 망신인가. `러브어페어‘는 틀리지 않게 쳤으나, 로망스는 치다가 손이 꼬였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청중들이 속으로 어떻게 생각했을까. 겉으로는 박수를 쳤으나, 속으로는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그 정도 실력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감히 연주할 생각을 하다니... 돌아오는 길에 다짐했다. 다음에는 정말 연주를 잘 할 수 있도록 연습해야지. 이런 경험들이 쌓여서 좋은 연주를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는 것 아니겠나. 다음에는 최소한 손이 떨리지는 않겠지. 그리고 나의 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겠지. 나의 연주를 들은 사람들이 “정말 듣기 좋았다”고 진심으로 말할 때 내가 느낄 행복감은 무엇에도 비할 수 없을 것이다.


청중의 비평은 참고만 해야 한다. 그 비평에 매달리다가는 아무런 일도 이룰 수 없다. 영국의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론(The Conquest of Happiness)'에서 `여론에 대한 공포(Fear of Public Opinion)'에 대해 얘기했다. “대중의 의견에 대한 두려움은 다른 모든 형태의 두려움처럼 억압적(oppressive)이고 성장을 방해한다. 이런 종류의 공포가 강력하게 남아있는 한 어떤 종류의 위대함도 성취하기 어렵다. 그리고 진정한 행복이 들어있는 영혼의 자유를 획득하기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 삶의 방식은 우리 자신 깊숙이 자리잡은 충동에서 나와야 하며, 우연히 우리 이웃이나 친척이 된 사람들의 돌발적인 기호와 욕구에서 나오면 안된다는 것이 행복에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 즐길 수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의 비평이 두려워 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행복을 포기하는 일이다. 단,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행복을 느낄 권리가 있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뭐라고 하든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좋다. 물론 자신의 행위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참고하는 지혜는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 해도 참고만 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비평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포기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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