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에서 처럼 마라톤에서도 어느 정도 실력 이상을 갖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무릇 모든 취미가 그럴 것이다. 취미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으려면 최소한 어느 정도 이상의 실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또 그 취미를 즐길 수도 있다. 마라톤에서도 초급자와 중급자, 고급자를 가르는 기준이 존재한다. 중급자와 고급자를 가르는 기준은 물론 `서브-3‘다. 우리나라에 이 기준을 충족하는 고수들은 3천-4천명 정도 있는 것 같다. 중급자와 초급자를 가르는 기준은 `서브-4’다. 풀코스를 4시간 이내 즉, 3시간대로 달리는 것을 말한다. 어떤 사람은 마라톤 대회에 몇 년을 출전해도 달성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마라톤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몇 년내에 달성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서브-4를 달린다면 일단 어느 정도 이상되는 수준의 마라토너로 인정을 받는다. 이것은 그냥 매일 달린다고 달성되는 기록이 아니다. 이 기록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근육이다. 평소에 헬스클럽에서 다리와 복부의 근육운동을 병행해야 한다. 잘 발달된 근육이 관절을 튼튼하게 잡아주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기록이다. 마라톤 풀코스 첫 완주와 한달뒤 첫 중도 포기. 그후 다시는 중도 포기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겨우내 헬스클럽에서 다리 근육 운동을 열심히 했다. 그리고 3월중순에 열린 동아마라톤대회.
“내가 왜 이러지? 미쳤나?”
20㎞ 지점을 지나면서 지치기는 커녕 몸이 더욱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고 불현듯 경계심이 든다. “이러다가 30㎞지점부터 지쳐서 포기하는 것 아냐?” 속도를 높이려는 유혹을 뿌리치고 현재의 페이스를 유지한다.
지난 대회들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첫 풀코스 대회였던 작년 10월 하이서울마라톤에서는 30㎞지점부터 다리가 뻣뻣하게 굳어버려 걷다시피 달려야 했다. 마라톤의 어려움을 그때 알았다. 두 번째인 중앙서울마라톤에서는 처음부터 왼쪽 무릎의 통증 때문에 고생하다 35㎞지점에서 회수차에 강제로 태워졌다. 그때의 비참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이번 대회는 달릴수록 몸이 가벼워진다. 약점인 왼쪽 무릎만 견뎌준다면 목표인 3시간50분대의 기록을 낼 것도 같다.
사실 이번 대회도 시작은 그렇게 좋았다고 볼 수 없다.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에서 출발할 때 스톱워치를 누르는 것을 깜박 잊고 있다가 남대문까지 와서야 출발 버튼을 눌렀다. 문제는 그 사이에 시간이 5분이 지났는지 10분이 지났는지 아리송한 것이다. 달리면서 스톱워치를 봐도 지금 시간에다 몇 분을 더해야 진짜 기록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달리는 동안 내 기록을 정확히 잴 수 없다는 찝찝한 기분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소변도 말썽이었다. 레이스 도중 화장실에 가지 않으려고 출발 30분 전에 화장실에 다녀왔지만, 5㎞지점부터 살살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레이스에 대비해 아침부터 계속 조금씩 수분을 섭취한 것이 그런 결과를 낳았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일부 참가자들은 청계천을 따라 달릴 때 작은 골목에 들어가 집단으로 노상방뇨를 했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월요일에 그 가게들이 문을 열면 아마 지린내 깨나 진동할 것이다. 수백명이 배출한 소변 냄새는 언제나 사라질까. 나는 참고 참다가 결국 10㎞를 지난 지점에 있는 파출소로 뛰어 들어가 위기를 모면했다. 그때 일을 본 시간이 아마 2-3분 정도는 족히 된 것 같다. 기록을 그만큼 손해 봤다는 생각에 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일단 볼 일을 해결하고 나자 달리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마스터스(일반인 참가자)만 2만5천명이 참가하는 국내 최대 규모 대회인 서울국제마라톤(동아마라톤)은 하이서울마라톤이나 중앙마라톤과는 훨씬 다른 느낌을 주었다. 대규모 인파와 함께 달리는 기분도 전율을 느낄 만큼 좋은 것이었지만, 서울 시내 넓은 차도를 장시간 달리는 코스는 뭐랄까, 시원하게 뚫려 있어서 마라토너들의 달리기 본능을 충족시켜주는 뭔가가 있었다. 옆사람과 부딪히는 혼잡함이 별로 없어 달리면서 쾌감을 느낄 여유도 있었고, 함께 달리는 사람들을 보며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할 여유도 있었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는 지난 겨울 내내 달리기 훈련과 근력운동을 병행하는 등 나름대로는 조금 준비를 했다. 충분히 성에 차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무게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하루에 30분씩만 벤치프레스를 연습해봐. 그러면 학기말에는 50kg를 열 번 들 수 있을거야.”
대학 1학년 교양체육 첫 시간에 노교수가 하신 말씀이다. 나는 반신반의했다. 정말 그럴까. 그때 나는 30㎏도 가까스로 들던 약골이었다. 나는 그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학기 내내 매일 학교 체육관에 가서 30분씩 벤치 프레스를 했다. 그런데 정말 신기했다. 3개월이 지났을때 나는 거짓말처럼 50㎏를 열번 들 수 있었다.
그 경험은 나에게 무엇인가를 깨우쳐주었다. 하루에 30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며, 그 시간을 잘 이용한다면 처음에 엄두가 나지 않던 엄청난 일도 성취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하루 30분‘이라는 시간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피아노도 그렇고 달리기도 그렇다. 하루 30분이 10년간 쌓인다고 생각해보라. 아니, 20년, 30년간 쌓인다고 생각해보라. 하루 30분씩 다리 근력 강화 운동을 거르지 않고 한다면 30년 뒤 내 다리는 관절통 걱정을 전혀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튼튼할 것이다. 또 하루 30분씩 피아노 연습을 계속한다면 30년 뒤 나의 피아노 연주는 그래도 들어줄 만한 수준이 될 것이다. 물론 그 시간을 하루 한시간이나 두시간으로 늘린다면 그 효과는 두배, 세배가 될 것이다.
무슨 일이든 마찬가지다. 같은 일을 매일 반복하다 보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정말 그 일을 잘하게 됐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단,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다면 훨씬 효과적이다. 기타를 하루 30분씩 배우고 연습해보라. 또 요리를 하루 30분씩 배우고 실습해보라. 그리고 십년이 지났을 때 그것을 얼마나 잘 하고 있는 지 처음보다 얼마나 실력이 늘었는지 확인해보라.
달리기도 마찬가지다. `달리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매일 30분씩만 달려도 몸이 달라지고 기록이 달라진다. 사실 나의 마라톤에서 그런 깨달음은 대가가 없지 않았다.
지난해 가을 무리한 운동으로 무릎에 부상을 당했을 때 두 달 정도 연습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먹는 것은 그대로였다. 따라서 체중은 더욱 불었고, 혈당마저 위험수치에 도달하게 됐다. 달릴 수 없다는 상황이 나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지 하루하루 절실하게 느꼈다. 기분은 우울해졌고, 체중은 늘어만 갔다.
“나이는 어쩔 수 없구나.” 자조 섞인 혼잣말이 저절로 나왔다. 50세라는 나이는 점점 더 크게 머릿속을 차지했고, 더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사소한 일에 짜증이 늘었고, 음주도 자제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연말이 가까워 오던 어느 일요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한강변에 혼자 차를 타고 나가 10㎞를 달렸다. 조심스럽게 무릎을 느끼면서 한발 한발 내디뎠다. 무릎에 꺼림칙한 느낌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일단 땀을 내면서 달리고 나니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연말까지 걷기를 위주로 하고 무릎이 완치됐다고 느끼자 새해부터 헬스클럽에 등록했다. 다시는 마라톤에서 중도포기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규칙적인 훈련에 들어갔다. 헬스클럽에서는 달리기와 근력운동을 병행했다. 달리기는 6㎞를 천천히 달리는 것에서 시작해 대회를 앞둔 3월 중순까지는 하루에 8㎞를 시속 15㎞의 속도로 뛰었다. 근력운동은 주로 무릎과 허벅지 강화를 위한 것이었고, 복근과 팔 근육 운동도 약간 곁들이는 정도로 했다. 연초부터 일주일에 평균 4일은 헬스클럽에 간 것 같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 풀코스를 뛰고 나면 가장 타격을 받는 부분이 바로 무릎과 고관절이다. 역으로 말하면 그쪽이 튼튼하면 풀코스를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배 근육은 얼핏 생각하기에 달리기와 별로 관계가 없을 것 같지만, 사실은 매우 관계가 깊다. 복근은 달릴 때 자세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준다. 복근이 부실하면 30㎞ 지점부터 허리가 굽어지고 허리가 굽어지면 허리와 무릎에 힘이 집중된다. 나중에는 허리와 무릎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왕십리를 지나 30㎞ 지점이 가까워지면서 아직 왼쪽 무릎이 버텨주는 것을 느꼈다. 근력운동이 효과를 낸 것이다. 이제는 스퍼트를 해도 되겠구나 싶었다. 허리를 펴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서 달렸다. 초코파이와 바나나도 열심히 먹고 물과 게토레이도 한컵 또는 두컵씩 들이켰다. 무릎이 약간 뻐근해지기 시작했지만 끝까지 버텨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에 머리가 유난히 하얀 사람이 독특한 폼으로 달린다. 등에는 ‘이XX‘라는 이름이 쓰여 있다.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상태로 달리는데 키에 비해 보폭이 크고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있다. 그 외로운 듯한 모습과 한쪽으로 기울어 뒤뚱거리는 몸의 리듬이 보는 사람에게 약간 ’슬프다‘는 느낌을 주었다. 달리는 모습도 슬프게 보일 수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렇다고 그가 지쳐 보이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를 추월하면서 흘끗 옆을 보니 거무스름한 얼굴이었고 6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그 나이에 그렇게 달릴 수 있는 것도 축복이었다.
35㎞지점을 지나 잠실대교를 건너갈 때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속도를 더 높였다. 시계를 보니 네 시간 안에 들어갈 수 있을 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처음에 스톱워치를 누르기까지 10분을 지체했다면 4시간 내에 골인하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았다. 골인하고 힘이 남으면 뭐하나. 속도를 더 높였다. 그런데 ‘이XX’가 다시 나를 추월한다. 대단한 힘이다. 그 뒤로는 그를 다시 보지 못했다. 내가 앞으로 그의 나이가 된다고 해도 그처럼 달릴 수 있다면 성공일 것이다.
롯데월드를 지나 석촌호수를 지난다. 가도 가도 끝이 없다. 1㎞, 1㎞가 왜 그리도 먼 지... 마침내 잠실종합운동장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트랙을 거의 한 바퀴 돌아야 골인이다. 미친듯이 달렸다. 스톱워치를 늦게 누른 탓에 기록에 대한 확신이 없었으므로 어떻게든 4시간 안에 골인해야 한다는 생각에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입에서는 기합인지 괴성인지 모를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가방을 찾아 바지를 입는데 한쪽 다리로 서도 무리가 없다. 어찌된 셈인지 힘이 남아돈다. 더 빨리 달렸어도 문제가 없었는데... 그렇지만 이것도 좋은 경험이다. 다음 대회에서는 페이스 조절을 더 잘하게 되겠지.
옷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보니 기록이 이미 문자메시지로 도착해 있다. 3시간53분21초. 계산해보니 내가 처음에 스톱워치를 누르기까지 달린 시간은 6분 정도였다. 아무튼 목표 기록인 3시간50분대를 달성한 것은 나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나를 일년 전에 마라톤에 입문시켜준 우리 회사 부산지사의 심부장에게 전화하니, 그는 이미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가고 있었다. 그는 부산에 약속이 있어 점심을 함께 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어떻게 됐어요?” 내가 물었다.
“내 기록은 조금 단축했는데, 서브 쓰리는 못했어요.”
“기록이 얼만데?”
“3시간16분.”
“대단하십니다.”
나보다 37분 먼저 골인한 것이다. 심부장은 오늘 컨디션이 좋아 나도 은근히 그의 `서브쓰리(sub-3; 풀코스를 2시간대에 달리는 것)'를 기원했는데 아쉽게 됐다.
마라톤이라는 취미가 없었다면 지금 내가 이 정도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지 자신이 없다. 나는 지금까지 16차례 풀코스를 완주했다. 일 년에 두 차례씩 풀코스를 달렸다. 물론 하프코스는 일년에 4차례 이상 달렸다. 풀코스를 위한 준비훈련 삼아 하프코스를 달리곤 했다. 풀코스 한번 뛸 때마다 하프코스를 두 번 뛴다고 보면 일 년에 네차례다. 하프코스 최고기록은 1시간40분30초. 풀코스 최고기록은 3시간41분12초. 풀코스 기록이 4시간 밑으로 내려가 `서브4(sub-4: 4시간대 밑, 즉, 3시간대로 완주하는 것)‘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근육운동을 병행하라는 동료의 조언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