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그리는 소리의 공간

by 비마

“피아노 건반에서 손을 들어서 반원을 그리면서 다음 건반을 누르세요.” 곽샘이 말했다.

피아노를 배운지 십년만에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때까지는 건반을 신속히 옮겨다니는데 급급한 나머지 손이 건반에 붙어다녀야 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손을 들어서 반원을 그리라니. 하긴 가끔 TV에서 피아노 연주자들이 손을 높이 들어 다음 건반을 누르는 장면을 본 적은 있다. 그런데 그런 동작은 정말 고수중의 고수들만이 할 수 있는 동작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폼이 나는 동작이긴 하다.


“손을 조금만 더 올리세요. 그렇죠. 그 정도로.” 곽샘이 말했다.

손을 건반에서 약 십센터미터 정도는 올린 것 같다. 그런 동작은 가까이에 붙어있는 건반을 칠 때에는 불필요하다. 한 옥타브 이상 떨어진 음을 칠 때 지름길로 가지 말고 반원을 그리며 돌아가라는 것이다. 물론 레가토를 해야할 때에는 그렇게 손을 올리면 안 된다. 음이 멀리 떨어져 어쩔 수 없이 음이 끊어질 때에 해당되는 얘기다. 낮은 음자리표의 도를 친 뒤 오른 손으로 폼나게 건반위에 반원을 그린 뒤 한 옥타브 높은 도를 부드럽게 누르는 것이다.


“그러면 손과 건반 사이에 공간이 생겨요. 그리고 그 공간만큼 소리가 풍성해지는 거예요.” 곽샘이 말했다.

그 얘기는 마치 지름길로 갈 수 있지만 돌아서 가면 여유가 생긴다는 의미인 듯 했다. 그냥 마음 속에 여유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피아노가 내는 소리에 여유가 반영된다는 뜻이다. 빨리 갈 수 있지만 천천히 가는데서 여유가 생긴다. 마음이 풍성해진다. 그리고 그 풍성해진 마음을 청중이 알아챈다. 멀리 떨어진 건반을 누르기 위해 급한 마음에 지름길로 가기 보다는 손을 높이 들어 공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소리에 여유가 묻어난다. 멀리 떨어진 건반을 제때 누르는 일은 급한 일이지만 그것을 여유를 갖고 해낼 때 소리에 여유가 생긴다.


“급할 수록 돌아가라.” 잘 알려진 속담이다. 이 속담을 처음 들었을 때 이것이 피아노 연주에도 적용된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못했다. 또 반대로 피아노 연주에서 이 속담을 연상하는 주법을 배우리라고는 결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영어에도 비슷한 속담이 있다. “More haste, less speed. (급할 수록 속도를 줄여라.)" 또는 ”The longest way round is the shortest way home. (가장 멀리 돌아가는 것이 집에 가장 빨리 가는 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경험에서 배우는 것은 비슷한 모양이다. 동서양에 비슷한 속담이 있는 것은 그만큼 그 말이 현명한 말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마라톤에도 적용해보자. 코스를 돌아가라는 얘기가 아니라, 준비를 많이 하라는 얘기다. 기록을 단축하고 싶다고 급한 마음에 매일 한강변을 두시간씩 열심히 달려보기도 했다. 그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연습하느라 근육과 관절이 쉴 틈이 없었던 것이다.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는 쉬어주는 센스가 필요하다. 또 무작정 달린다고 몸이 건강해지고, 달리기를 잘하게 되고, 기록이 단축되는 것이 아니다.


기록을 단축하고 싶다면 우선 헬스클럽에 등록한 뒤 매일 다리 근육 강화운동부터 해야 한다. 다리의 모든 관절을 보호해주는 근육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달리기만 한다면 얼마 못가 관절은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고장날 것이다. 다리 근육은 생각보다 쉽게 강화된다. 다리 근육은 평소에도 많이 걷는 사람이면 어느 정도는 발달돼 있다. 그런 상태에서 헬스클럽에서 `무릎 근육 강화운동(leg extension)'이나 `무거운 것 어깨에 메고 앉아 일어서(squat)'를 매일 10분씩만 해준다면 3개월 뒤에는 풀코스를 무리 없이 달릴 수 있는 근육을 만들 수 있다. 물론 헬스클럽에 다니면서 일주일에 50-70km 정도는 달리는 연습을 병행해줘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는 쉬면서 근육이 회복될 시간을 줘야 한다. 한 달이 멀다하고 풀코스 마라톤에 출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짧은 기간에 풀코스 완주 100회를 기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몇 살까지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불과 10년만에 풀코스 완주 100회를 기록한다. 나이도 오십대 중반밖에 안된다. 그러나 나는 일년에 두차례만 풀코스 대회에 출전한다. 나는 십년에 풀코스 완주 100회를 기록하는 것보다 오십년의 기간에 풀코스 완주 100회를 기록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지금까지 16회 완주했으니 앞으로 매년 두차례씩 완주해 100세에도 풀코스를 완주하는 것이 목표다. 지금 나이가 만 57세이니 100세까지는 43년 남았다. 43년간 일년에 두 차례씩 풀코스를 달린다면 86회다. 그러면 16+86=102회가 된다. 단기간에 얼마나 많은 풀코스를 뛰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 풀코스를 뛸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천천히 달리면서 오래 달리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서브쓰리(sub-3) 보다도 정말 달성하고 싶은 목표가 있다. 바로 100세에 42.195km를 완주하는 것이다. 그것도 5시간 내에.


생각해보면 마라톤처럼 인생도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을 전속력으로 달려서 젊은 나이에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을 알고 있다. 나는 그가 부럽지 않다. 그는 취미가 없다. 취미를 가질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가 혼자서 석양을 바라보며 인생의 의미를 곱씹는 시간을 가졌다면, 권력에 기대는 대신 셰익스피어에 빠졌다면, 어쩌면 풍성한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그 인생의 깊이가 더 깊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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